[묵상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전봉석 2022. 1. 8. 05:27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 24:1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우리 안에 어떤 작은 버튼이 있어, 이는 자존심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툭, 하고 건드리면 숨었던 자아가 작동을 하는 것 같다. 걸러지지 않은 말과 아무 연관도 없는 생각과 쾌쾌묵은 감정까지 한데 뒤섞여 요동을 친다. 이는 신분을 막론하고, 어디서 그런 혈기가 작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에 오늘 말씀은 그 기준을 분명히 한다. 더욱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셨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그리하여 오늘 말씀은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6)." 하심은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음으로 경계를 강화하신다.

 

곧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우리가 살며 주를 원망하거나 어떤 서러움을 토로할 때도 있으나, 이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향하여 아뢸 때는 기도가 되어 비탄이 되지만 남에 말로 옮길 때는 저주가 되고, 주의 이름을 거스르는 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어쩌다 그리 되는 게 아니라, 항상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곧 우리 안에 우리를 거스르는 어떤 버튼, 자존심이라는 이 실제의 것이 우리를 쥐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의 어떤 언사를 들을 때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하고 놀라워하다가도 그게 다름아닌 나 자신인 것을 알고 가슴이 아프다. 죄 때문에, 이는 상처다. 여전히 건드리면 아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이는 어제 오늘의 '나의 일'이 아닌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로부터 거듭되어 되풀이 되는 일이다. 그 속성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게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사 14:12-13)." 이는 교만이고 자부심이다. 하여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4)." 하나님을 무시하는 언사가 되풀이 된다. 결국은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5)."

 

이 믿기 어려운 죄의 원조를 마음 한복판에 두고 사는 것이 여전히 사람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의 일이다. 누구의 일련의 사태를 어제 전해 들으며, 길게 한숨을 쉬고 어찌 저 모양일까? 하고 놀라워하다가도 그게 또 나 역시 다를 게 없다는 데서 나는 절망한다. 누가 들으면 '넌 안 그래!' 하지만 나 스스로는 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여전히 툭, 하고 누가 건드렸을 때 그 자존심은 순식간에 수치심을 발동하고, 수치심은 심한 모멸감으로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 우리도 주체할 수 없는 막말을 쏟아내고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깔아뭉갠다.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이는 엄연한 폭력이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을 두고 함부로 행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과 같다.  

 

그러함을 인정하고 주께 고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주께 아뢰며 용서를 구하면 거짓말처럼 우리 하나님은 예전 일을 없던 일로 돌리신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이는 주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렇다면 이를 인정하고 주께 아뢰고 도움을 구할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문제는 그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문제인 것조차 모르게 하는 문제, 죄는 그처럼 은밀하게 자신을 감춘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그러니 이 놀라운 변신술에 우린 다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간다. 스스로 괜찮다고 한다. 마음에 좀 걸리면 다음에 적당히 잘 하다가도 언제 또 버튼이 툭, 하고 눌리면 순식간에 악을 쏟아내고 상대에게 무안을 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게 또 미안해서 며칠은 잘하는가 싶지만, 이게 누구만의 일인가? 나는 어떤 이의 일련의 사태를 들으며 길게 한숨을 쉬다 그게 나 자신인 것을 인정하였다. 나 역시 다를 게 없는 죄인인 것을 주께 아뢰었다. 그래서 내 곁에 일부러 더 '그런 사람들'만 붙이시는가? 하는 것도 이제는 아멘, 하고 인정한다. 경계의 시선으로 주를 바란다. 함부로 내가 누구를 오라 가라 하지 않는 이유다. 이를 감당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감히 내가 누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그러니 이를 주께 아뢰고 주께만 간구하는 것인데,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11).

 

달리 방법이 없다. 누구 사연에 길게 한숨을 쉬다 내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어서, 보란듯 나도 쉬 자빠지고 넘어지기 일쑤여서, 내가 누굴 나무라고 탓할 일이겠나? 오직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그러니 누가 누구더러 혀를 끌끌 차며 구제불능인 것처럼 비판하랴.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 그래서 내 안에 저에 대한 애정이 또는 어떤 관심이 넘치는가, 하고 생각이 들었다. 보면 그게 나만 그런가? 누구의 우유부단함이 실은 나의 것이고, 저의 뭉개고 미루는 마음이 또한 나의 주저함과 다를 게 없으니 저를 생각할 때면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밖에. 또 누구의 막말과 거침없는 언사를 두고도 어찌 그러는가? 하고 한탄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안고 씨름하여 주의 이름 앞에 고개 숙이는 모습이지 않나. 

 

희한하지? 하나님은 꼭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다. 들어보면 다 내 얘기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정이 그 본 모습이 실은 나의 숨겨놓은 자아가 아닌가? 남들이야 이제 아니지싶은, 그러나 여전한 내 안의 갈등이며 순간 욱, 하고 치미는 감정이다. 흔히 우리는 누구를 상담하고 누구 일에 감정이입을 주의하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진짜 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나?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병든 자와 가난한 이들을 보고 발길을 멈추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가 직업적인 상담사를 준비할까 한다는 말에 우선 반대를 한 것은, 그것이 앞으로 꼭 필요한 직종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이고 전망 있는 일이기는 하겠으나. 너무 고달프다. 그저 냉정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만 저를, 상담자와 내담자로 상대하는 일이 주의 사역으로도 가능할까? 저의 일로 같이 아파하지 않으면 저를 위한 기도가 나올까? 저의 문제로 내가 주 앞에 씨름하지 않으면 정녕 주의 사랑으로 주의 권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를 알고 두려워할 줄 앎으로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 왜 우리에게 말씀을 부탁하셨는지? 이는 단지 지적 허영을 위한 것으로가 아닌, 저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려고. 즉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하나님과 화목한 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또 자빠지고 또 쓰러지기 일쑤면서도 여전히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마주한다.

 

새로운 아이들이 몇 명 다음 주부터 오기로 했다. 사전에 아내는 아이들의 이런저런 상태를 귀띔해주었다. 중2 올라가는 어느 아이는 욱, 하면 뿔딱지를 내고 함부로 군다. 같은 또래 여자 아이는 새로 시작하여 따로 정보는 없으나 대충 짐작이 갈 정보는 몇 개 가지고 있다. 중3이 되는 아이는 예전에도 한동안 글방으로 오던 아이다. 한참 그 나이 때 그렇지만 요령이 좋고 능구렁이 같다. 고1 올라가는 여자아이는 다소 주의가 필요한데 자칫 성정체성의 모호함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런저런 자세한 것을 글로 밝힐 수는 없으나 한참 그 나이 때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것들을 어쩜 그리도 하나씩 골고루 갖추고 있는지. 나는 아내의 설명을 듣다 혼자 속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다. 내가 오게 하고 가게 하지 않는다. 

 

분명히 주께서 뜻이 계셔서 이번 일도 추진하시는 것일 테고,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하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 무슨 말을 어찌할지 나는 모른다. 나는 누구에게도 상담을 공부는 하되 나서서 하려 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소리를 해주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는 것, 다만 오늘의 그 관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요성도 실은 주께서 미리 예비하게 하시는 것일 테니. 앞서 내가 어찌 하겠다고 장담하고 계획한들 특히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확실히 알겠다. 하나님은 수수께끼 같이 일을 숨기신다. 어쩔 땐 일부러 내 뜻과는 다르게 전개하시는 것도 같다. 설마 그렇겠나만 그만큼 내 생각이란 게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데서 헤맬 뿐이다. 


아이들이 오는 일도 누가 오고 안 오고, 나는 저 목사의 오게 하심도 내가 뭘 어찌 할 수 있겠어서가 아니다. 내가 그였다. 여전히 그이다. 그런 나는 싸운다. 날마다 싸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일어서다 혈기를 부릴 때도 있다. 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하고 개탄스러워하던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인정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나 역시 이를 따른다. 나도 나로 힘들다. 좀 의연하길, 너그럽고 인자하며 마음의 평안으로 부디 조바심치지 않기를. 남들은 겉사람인 나를 보고 그리 느낀다고 하고 정작 나의 속사람은 날마다 전쟁이라. 이를 바울의 진술로 점검하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이처럼 주 앞에서 나는 나의 의롭고 선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번번이 나는 또 나에게 당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 결국은 죄였다. 죄 때문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8).

 

이를 가지고 절규할 수 있는 것,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9-20)." 어쩌면 이러한 사투가 우리 육신이 죽기까지 거듭되는 동안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래서 바울도 한 법을 깨달았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

 

이 단순한 논리 앞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더욱 바란다. 주의 도우심만을 의뢰한다. 아,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나는 내 곁에 보내시는, 교회로 오는 한 영혼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저의 한탄과 서러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게 오늘의 나인 것이다. 아이들이라 하여 저들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어른아이로 여전한 나의 모습을 고스란히 저 아이들이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면 주께 아뢰기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6).

 

오늘 시편은 이를 알게 함으로 기도밖에는, 주를 의탁하는 길밖에는 달리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 앞에 나를 세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

 

결국 내가 의뢰할 한 가지, 어떠하든지 감사한 것은 그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