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민 5:2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144:15
진영을 깨끗하게 하는 일과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일을 하나로 놓으신다. 나병이나 유출증이나 주검을 진영 밖으로 따로 격리한 것과 “이는 의심의 법이니” 하고 “의심이 생겨서 자기의 아내를 의심할 때에 여인을 여호와 앞에 두고 제사장이 이 법대로 행할 것이라(민 5:29-30).” 하심이 서두와 결말에 놓였다. 말씀은 우리를 판결하는 기준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말씀을 받고 이를 의식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복되다. 새로운 아이들과 하는 작업이 이것이다. 이를 연습하는데 잠언만한 성경도 없다. 한 장 한 장이 격언이고 그 의미가 깊어 나는 아이들이 문득 어느 구절을 마음에 담아 생각하는 것이 기특하다. 그 뜻을 헤아리고 자신의 생활과 연관 지어 묵상하는 것을 훈련한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러할 때 경건한 두려움은 우리로 거룩하게 한다. 주를 경외함이란 자신을 귀히 여기게 한다. 그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한다.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는 아이의 대답이 내내 흡족하였다. 매일 꾸준히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과 주일을 지켜 예배를 잃지 않는 것에 대해 지난 주간 수업하면서 부탁하였는데 그러한 태도와 반응이어서 나는 감사하였다.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께 바쳐질 때 이룩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이를 아이들로 알게 할 수 있다면….
실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복된 것은 달리 토를 달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일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 앞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훼방한다. 이를 열 마디 할 것을 아이에게는 한 번이어도 족하다. 주가 기다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앞서 왔던 어느 인물에 대하여 저의 살아온 시절과 오늘의 헛헛함을 두고 하나님이 급하게 부르시는구나, 하고 여겨 그리 알렸는데도 저는 이내 자신의 판단을 따라갔다. 우리가 서로를 위하고 그 영혼을 섬긴다는 일은,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곧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성결해야 한다. 아이들은 순수하여 기도로 시작하는 일과 말씀을 가지고 나누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완력으로나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을 든다는 일은 항복을 의미하며 더는 내 의지를 포기하는 일이다. 곧 기도란 주께 맡김으로 더는 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알리시는 것으로 거룩과 성결을 알리신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3, 14).” 곧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다.
이를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곧 우리 자신이 그 가치가 있는 것은 주의 것으로 주가 아시는 까닭이다. 그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6:10).” 이와 같은 사실,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일찍이 주를 그 마음에 모시고 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누구를 마주하면 서슴없이 나의 미련하였음을 숨기지 않는 까닭은 부디 나와 같이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저는 전능자, 절대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보다 복된 일도 없다.
이는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를 알고 깨닫고 삶을 바르게 조명할 수 있다면,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7).” 이 놀라운 영광과 함께 주와 함께 한다는 일,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오늘의 정결과 성결은 주를 더욱 바람에서였다. 그러할 때 우리 안의 망가진, 손상된 영혼과 육체는 치유될 것이다. 결국은 이는 우리 때문에 주가 당하신 일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오늘 나의 평안과 이 나음은 주가 대신 이루심이다. 하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그러니까 내가 그 나이 때, 이제 고작 중학교 아이들이었던 우리 예닐곱 명 또래는 같이 세례를 받았다. 앞서 여전도사님이 서로들 성경공부를 할 수 있게 격려하였는데, 저이는 거리가 멀어 일주일에 한 번만 오고 남은 요일은 우리끼리였다. 그때 우리는 설교원고를 받아 적고 이를 서로 돌려보며 학습과 세례 받을 준비를 하며 성경 모임을 가졌었다. 세례 받는 당일 날,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그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어찌나 울고 또 울었는지, 같이 축복하던 어른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주께 영광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같이 했던 또래 가운데 목사가 둘, 선교사가 하나, 사모가 하나… 모두는 주를 떠나지 않았고 주의 일에 쓰임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가장 뒤늦게 나 또한 목사로 세우심을 받았으니 그 일은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 아니고는 설명이 어렵다. 같이들 예배당 쪽방에 모여 노트를 돌려보고 우리끼리 기도회도 갖고 하였으니… 아, 그랬었다!
새삼스런 기억으로 드러나는 주의 손길이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곧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이는 병자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어쩌면 내 생에 그렇게 뜨겁고 간절하게, 같이 이를 공유하며 함께 하였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같이들 예배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는데 참 촌스러우면서도 기특하고 거룩하다. 이는 내 생의 복이었다.
저들 기억에는 어찌 남았는지, 그때의 일이 어떻게 작동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새삼 그때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어제그제 마음은 저 혼자 풋풋하고 그리워하다, 우리가 그렇듯 함께 하며 또래들과 같이 성경을 나누고 묵상하였던 일이 새삼스러웠다. 영적치유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1-5).
이 놀라운 찬송이 나의 것이었다니. 이를 저 아이들에게도 들려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들은 것을 저들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아 이 신박하고 놀라운 사실 앞에서 저 아이들도 놀라워할 날이 올까?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과는 신선함이 있다. 어른이란 그만한 세월동안 자신들의 경험이 있어 그것으로 되레 유혹이 갑절이 된다. 가령 술취함이나 성적인 유혹에 있어 아이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이를 경계하고 별 큰 유혹 없이 흡수하는데, 해 본 게 약점이라, 자신들이 행하였던 일로 걸려 넘어지기 일쑤인 게 나이 든 자의 단점이다. 담배를 펴본 사람이 흡연욕구도 알고, 성적으로 그 쾌락을 아는 사람이 음녀의 유혹에도 귀가 쫑긋한 것과 같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 73:27).
하면 저는 누구인가?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잠 6:26).” 나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고르듯 가만히 조용히 우리의 영혼을 기다린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은 누가 연락이 닿거나 오거나 하면 이는 영락없다. 그 인생의 어떤 신호인데 이를 절박하게 느끼는 것은 나 혼자인지, 저들은 그냥 돌아가기 일쑤다. 며칠 전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는, 난데없이 별 거 중이었고 친정엄마와 산다는 저이의 사정도 알 것 같았다. 교회는 다니는지, 신앙생황을 하고 있는지 하고 묻는데 저는 누구의 안부를 묻고 어떤 이의 소식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니. 그래서 성인들이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겪은 일로 자신들의 발목을 묶은 셈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치유를 약속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출 23:25).”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지금의 적당함 때문이다. 보면 영락없다. 차라리 두 손 들고 나올 수 있는 게 복이다. 아직 쥔 게 있어서, 저이도 무슨 가게를 두 개나 운영하고 있다고 하고 아이 둘도 적당히 잘 자라 제 몫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 굳이 아직은… 그리 절박하지가 않은 것이다. 새삼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어서 나는 주의 뜻을 알리는데도 저는 자꾸 다른 소리였다. 당장이라도 한 번 올 것처럼 굴더니 말씀으로 너무 디밀었나? 올해가 가기 전에 오겠다며 농담으로 건네는 안부에서 알았다. 이게 결국 내 임의로는 안 되고, 것도 내 맘 같지가 않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희한하지? 좋은 사이로 예전처럼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으면 단걸음에 달려왔을까? 말씀으로 건네면 영락없이 그 심령이 드러난다.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그 영혼의 상태가 선명해지는 것이다. 아직 멀었구나! 싶은. 당장 저를 향한 부르심이 강렬하게 느껴져서 누구에게는 ‘하나님이 급하셨군요!’ 하고 알려주었는데도 저는 하루 이틀 지나면서 오늘의 적당함으로 도로 몸을 숨기고 말았으니….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119:50).
나는 이를 안다. 저이에게도 이를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다. 기껏 자신들의 푸념이나 이런저런 넋두리에 동조하는 것은 좋아하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자, 성경공부를 하자 하면 냅다 꽁무니를 빼기 일쑤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순수하게 받고 한 구절 성경을 놓고 생각하고 이를 생활에 적응하여 글로 쓰는 것이 어찌 아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나! 노파심에 나는 단톡방에 오늘이 주일인 것을 알리자, 한 아이의 답변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이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가당키나 한 것이겠나? 처음 왔을 땐 싫은 내색이더니 한두 번 시간을 더하자 그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라니! 다시 느낀 것이지만 말씀으로밖엔 다른 수단이 없다.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잠 4:2).” 때론 더디고 더 멀리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20-21).”
그러니 요즘은 참 잘 됐단 생각을 한다. 돈 벌 궁리를 멈추고 더는 글방을 그 수단에서 배제하면서, 여전히 나는 글방 선생으로 있으나 그에 앞서 목사인 것과 말씀으로밖에는 다른 여지를 두지 않음으로 그 선이 분명해지는 것 같다. 비록 그 숫자는 미비하다 해도, 혹은 너무 더디고 지루한 반복이 계속된다 해도, 그러는 동안 주의 영이 하심을 나는 목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렘 33:6).”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우리에게 약속된 보장,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것. 가끔은 놀라운 사실을 오늘 시인은 알고 찬송하였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3-4).
우리의 헛되고 헛됨을. 저이도 통화 저편에서 그런 소릴 하던데, 자신의 그 헛됨을 알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어쩌다 교인으로 있으면서 스스로는 구원 받았네, 천국 가네, 하며 너스레를 떠는 꼴이라니! 뭐라 할 말이 없이 좀 더 시간이 지나야겠구나, 하고 더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제 아이의 대답 한 마디가 매우 강렬하게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으니,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는 말에 이처럼 큰 기쁨을 보람을 즐거움을 느낄 줄이야!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 144:2).
고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