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
민 6:8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시 145:20
단지 몸이 아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 6:8).” 우리가 부르심(소명)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날마다 그 삶은 중생한다. 이는 단회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영구적으로 주의 나라 가기까지 거듭되기도 한다. 주의 부르심은 독자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회개나 성화는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겉으로 달라지는 나’와 ‘속으로 달라지는 나’가 있다. 이 때 삼위 하나님은 동시에 일하신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활동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우리로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이를 주장하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성부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에 성자 하나님은 실재하시다.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시고 쉬게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뿐 아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직접 오신 목적이 뚜렷하심을 밝힌다. 곧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우리로 스스로 만족스러워할 때에 곁에 오셔서 부르신다. 이는 실질적으로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 1:6).” 우리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에 실재하심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신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곧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우리 삶을 증언의 장으로 삼아 자신이 알고 타인이 알도록 증명하게 하신다. 이는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곧 우리로 순종하게 하시는 이가 또한 우리로 갈망하게도 하심이다.
이와 같이 삼위하나님의 전방위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소명이다. 허투루 그런가보다 하고 대충 그리 여기는 정도로의 삶이 아니다. 살아서 사는 동안이 증언이 돼야 한다. 모든 부르심에는 나날이 달라지는 어떤,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성장 없이 움직임이 그친 아이는 죽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변화도 움직임도 없는 부르심이란 거짓이다. 그 안에 또는 밖으로부터 어떤 변화가 꿈틀거리는 게 있다. 가령 나는 자꾸 ‘아이들이 신경 쓰인다.’ 예배를 드릴까? 오늘 주일인데 교회로 갔을까? 줌으로 하였을까? 꾸준하게 묵상글을 써서 올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 나는 수시로 아이들 카페를 들락거리며 하루치 잠언과 글을 썼는지 확인하면서 조바심을 친다. 이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의 마음 같다. 그러려니 하고 말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기운다. 평소 어디 던져두고 마는 것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수시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게 내가 하는 일이겠나?
아이들이야 또 어떨까? ‘예배드리겠습니다.’ 한 아이는 교회에 갔을까? 소위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람은 많다. 시작이야 누구라도 한다. 과연 이를 이어갈까? 하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 짧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지 못하면 점검이 필요하다. 꼬집어도 반응이 없을 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목사면 뭐하고 어떤 대단한, 그리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을 한다 해서 무슨 소용이겠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이는 엄연하고 엄중한 사실로 마치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인 행보와 같이 그저 기원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다.
모두에게 부르심은 들려지고 모두가 이에 둘러보고 반응할 수는 있다 해도,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6-18).” 같이 쓸려 다니는 안개와 같이 여기로 저지로 오락가락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거기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들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고, 이해도 간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9-20).”
종종 누구와 무슨 얘길 하다, 이해는 해요! 하는 말에 나는 그의 이해를 제지하기도 한다. 구원은 이해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해가 안 돼야 하고, 상식적으로 그럴 수 없는 게 구속이다. 누가 누구더러 이해를 한다 하고, 그럴 수 있다고 그 허용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겠나?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심에 따른 중생 즉 어떤 움직임, 달라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헛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하시는 말씀에 나는 이제 부복한다. 하다못해 누가 누굴 사랑해도 그 마음이 끌리고 몸이 따르고 안달복달 그 속에 애달파하는 게 당연한데 하물며 우리 안에 부르심이 주어졌는데 그에 따른 아무런 반응이 없다? 때론 성급하게 때론 더디게 나타나고 움직이기도 한다지만 여전히 그러하다면 그건 아니다.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해서 전부의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가끔 나는 내 안의 안달로 이를 알겠다. 누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못 견뎌하는 게 마땅하다. 상식적으로 저 아이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 교회를 가든, 글을 쓰든, 여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서로의 ‘너와 나’가 더는 남으로의 ‘너와 나’가 아닌 것이다.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하다못해 눈짓이라도 되고 싶고, 몸짓이라도 되어, 저가 나의 내가 저의 꽃이 되길 바라는 시인의 표현과 같이 부르심에는 엄연한 반응과 그에 따른 응함이 있어야 마땅하다. 저가 내 안에서, 내가 저의 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이를 증명한다. 복음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삶은 죽은 자의 몸으로 산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아이들이 혹시 올까 하였고, 저들이 어찌 교회에는 갔는지 궁금하였고, 이를 물어볼까? 확인해볼까? 말을 걸어볼까? 오후 내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내 안의 안달하는 마음으로도 알 것 같았다. 가령 누가 오겠다 하고 그만하면 저절로 나도 멈추게 된다. 더는 어떤 기대도 걸지 않는다.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 일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도 안다. 저 둘의 차이는 내가 임의로 그리 마음먹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어쩌며 나와 상관없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몸짓인 것이다. 서로 갈리는 어느 지점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이를 우리 주님은 한 예화로 말씀하시기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7-40).”
즉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어떤 일에 반응하고 이를 안달하듯 조바심치며, 연애하는 것 같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이 가고 몸이 반응하는 일, 이에 따른 복음의 산 증거가 없이 어찌 우리가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나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구별된 몸’을 그리 읽는다. 이를 시인도 알게 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시 145:20).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 그저 막연한 어떤 느낌이나 환상으로가 아니라 실제 삶으로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날 정도로 들들 볶이듯 하는 어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21).
안 그러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오늘 민수기서의 말씀을 시적으로 운율을 살려 다시 읽어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4-26).
하나님도 이를 감추시지 못하신다. 이를 시인은 알고 찬송하였다.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 106:5).
곧 누구에게 티는 낼 수 없으나 마치 아이처럼 손에 핸드폰을 들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혹시 글이 올라왔나? 오늘 교회에 갔는지, 카톡은 왔나? 먼저 물어볼까? 그저 좀 진득하니 기다릴까? 혼자서 안달복달하는 이 마음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이 놀라운 사실이 그저 누구에게 전해들은 말로 그치는 것이고 남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이는 나의 일이면서 곧 너의 일이다. 우리가 같이 반응하는 어떤 증상이고 상태고 감출 수 없는 마음이며 행실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아, 이 즐거운 안달이여!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내가 어찌 행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어서 더 이상하고 야릇하다. 내가 왜 이러지 싶은!
그렇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우리로 여기에까지 오게 하셨다. 나는 주의 일이 마치 연애하는 것 같아서 어떤 일은 이 사람으로, 어떤 날은 저 아이들로 인하여 애가 타고 속이 볶여 병이 날 지경이다. 사랑이란 게 그런 것 아니었던가?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 2:5, 5:8).
한 영혼, 어떤 사람을 두고 저를 생각하는 일이 마치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같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즉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일처럼 주의 사랑이 내 안에,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이 어찌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덤덤하게 그리 받아들이고 그런가보다, 할 수 있는 일이겠나? 오늘 시편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2).
안 그러고는 내 안에 꿈틀거리는 것으로 내가 견딜 수가 없는, 연애하는 마음과 같아서… 한 영혼을 두고 내가 이처럼 안달을 떠는 것도 이제는 나에게 익숙한 일이려니.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3-4).
조금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5).
어느 순간 나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연애하는 사람을 두고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같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7-18).
결국,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19-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