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민 8:3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0-11
우리가 주의 기쁨이 되는 것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 삶에 등불을 붙인다. 오늘 말씀은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심과 같았다.’ 이는 그 만들어지는 과정과 양식을 주가 주신대로 하였다. 이를 레위인들로 구별하여 정결하게 하는 것과 연관 지어 묵상하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민 8:6).” 이를 위해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전신을 밀고, 의복을 빨게 하였다(7). 그런데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소제물을 위해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속죄제물을 위해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오게 하였다(8). 이스라엘 자손이 저들을 안수하게 한 후에 아론이 레위인을 흔들어 요제로 바쳤다. 곧 저들은 이제 회막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는 자들이 되었다(10).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으면 엄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다. 스스로 계신 자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그 영광은 가히 두렵기만 하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이는 엄연한 주의 존엄함이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레 10:3).”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 잠잠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한 마음이 그 속에 있다. 이에 누구는 주를 영접하고 누구는 거부한다. 즉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것이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단면이 되었다. 예로부터 그러했으나 본래 어둠의 속성은 빛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저 막연한 개념으로가 아니라 실제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 이치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가끔씩 병원 대합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보면 여러 생각이 동시에 든다. 죄와 허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생에서의 모습과 사람들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이 땅에서의 실상을 알 것도 같다. 이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사는 데 따른 어쩔 수 없는 무게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어찌 세상을 이리 두시는가, 생각할 때에 그리하여 주의 영광은 더욱 빛난다. 곧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곧 하나님의 특별한 세상을 알게 하시려고, 애굽에서 저들을 단번에 구원하실 수도 있었으나 저들로 저들의 실상을 알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려 하셨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되는 네 가지 질문을 갖게 된다. 첫째는 내 인생에 있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귀하고 빛나기를 원하는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그저 어떤 불안과 고통으로 남들처럼 일그러진 삶을 살면서 일그러진 형태의 바람으로 꿈꾸는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둘째로는 나의 죄가 모두 그의 은혜로 소멸되었다는 것과 그리하여 더는 더러워지지 않으려 애쓰는가? 즉 내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시는 말씀에 주의하고 사는지(엡 5:8). 셋째는 그리하여 내 삶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현하며 살고 있는지? 곧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8).” 넷째로는 이를 생각만 해도 십자가의 구속을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행복하면서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 결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나는 병원을 다녀오면 늘 좌절한다. 같은 말, 같은 진단으로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으로 마음이 어렵다. 어쩔 수 없다는 말, 그것으로 좌절하다 그것 때문에도 새 힘을 얻는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다. 저들이 어렵게 출애굽을 하는 과정에서도 그때마다 하나님이 어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묵상할 때, ‘그 기쁘신 뜻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데 안도하기도 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빌어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차원에서의 것이라면 이보다 더 불안한 게 또 있을까?
나는 늘 내가 어렵다. 내가 가장 다루기 힘들고 대하기 어렵다. 나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더는 자랑하거나 자부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수시로 흔들리는 나의 나 됨을 누구보다 나는 안다. 그런 나의 소원대로가 아니라 다행이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대로 행하심이 그래서 귀하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7).” 내 안의 어떤 소원, 그 간절한 바람으로는 언제 또 무엇으로 바뀔지. 나의 변덕스러움과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요소에 신물이 난다. 그런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비하심으로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2-24).
이 놀라운 구원의 흐름을 나는 공교롭게도 병원 대기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며, 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을 돌아보며 실감한다. 나의 약함에서 아니 그 악하고 늘 되풀이되는 죄 중에서 깨닫게 된다. 내가 무얼 잘해서, 나름의 뿌듯한 어떤 성취감에서가 아니라 하면 할수록 약하고 더딘 나의 연약함으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데서 비로소 안도하고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나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나는 이 말씀이 참 좋다. 마치 다시는 변개할 수 없는 엄연한 법적 효력을 지닌 증서를 가지고 있는 듯이 말이다.
나의 소명, 그 부르심이 더 없이 귀하고 감사하고 송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아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의 안도함이라니! 내가 아는 나로 나의 행위대로였다면 대체 내가 무슨 수로 이 놀라운 은혜를 소유하고 살 수 있을까? 이를 병원에서 또는 어떤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 실감할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다. 적당하고 괜찮을 때야 이런 것을 생각이나 하고 느끼기나 했겠나? 감사는커녕 없고 모자란 것으로 늘 불평과 원망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을 텐데.
아침에 몸을 틀면서 무얼 잡으려다 윽, 하고 옆구리가 결리는가 싶더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두려움이 또는 고통이 몰려왔다. 반대로 몸을 뒤틀며 놀란 근육을 풀려고 하는데 그럼 그럴수록 경직됐던 몸은 더욱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다. 순간 이러다 엠블런스에 실려가운 거 아닌가? 하는 불안과 함께 우습게도 창고에 쌓인 쓰레기봉투와 박스들을 정리하여 일찌감치 밖으로 내어놓았다. 약간은 강박적인 게, 더는 내가 없을 때를 생각하게 된다! 가령 하루를 마치고 가방을 들고 나서기 전에 책상 위를 점검하고 놓인 것을 바로 한다. 오늘 나서면 다시는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함으로 나의 정리정돈은 다소 병적이지 싶다. 그래봐야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하여 외과로 가봐야 하나? 내과로 가봐야 하나? 무작정 걷다 영화관으로 갔다. 정신과로 가기로 생각했는데 담당의가 오후 두 시 진료라, 마침 시간이 그 정도 비어 이른 점심을 먹을까 하다 그만두고 천천히 걸어 박소담, 송새벽 주연의 <특송>을 보았다.
천천히 걷는 동안 몸은 풀렸고, 덕분에 오후 진료를 오전에 들러 예약을 해둔 터라 일순위로 보게 해놓고, 영화관에 도전을 한 것이다. 담당의는 이를 권하곤 하였다. 어제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료시간 직전까지 잘 이겨냈고, 비록 끝부분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가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누가 나의 이런 하루를 동행 취재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퇴근했다며 두 번씩이나 전화를 하는 아이의 전화를 어쩔 수 없이 받을 수 없었고, 어느 아이엄마의 전화도 받지 못했다. 영화관에는 앞에 두 내외뿐 텅 빈 어둠이 가득하였고 과장되고 요란한 내용의 영화는 저 혼자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 대합실. 꽉 찬 정신과 대합실의 사람들은 나의 선입견이겠으나 불안으로 조용하다.
그리고 이 아침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어쩔 수 없는, 속절없는 어리석음 가운데서 더욱 빛난다. 그 최고의 정점은 그래서 십자가이다. 더는, 그야말로 더는 어쩔 수 없는 방편으로의 구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내가 종종 영화를 볼 때 나는 이를 간접적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범죄이야기든 사랑이야기든 우리의 이야기는 온통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는 형태였으니, 돈이거나 자신의 감정에이거나…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이는 모두 예화다. 교훈이며 간접적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대선을 앞두고 펼쳐지는 우리나라만의 이 스팩타클한 일련의 사태가 곧 성경의 실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의 하나같은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어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권위나 위신은커녕 누구는 영매(靈媒)도 아니고 무속인도 아니고, 서로들 혼탁한 가운데 그럼에도 진영 싸움은 몰염치의 극치를 치닫는 것 같으니,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나만 두려운 것일까? 너무 요란하고 시끄럽고 무절제하며 함부로 처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1-23).
어쩌면 모두가 조용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조용히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정신과 대기실이 클로즈업 되면서 곧 우리 모두의 묵묵부답, 할 말을 잃고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어떤 대기실을 연상하게 한다.
어제 나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고, 나는 평소대로 약을 타고 의사의 하나마나한 소릴 듣고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아,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0, 13).” 오늘 우리는 거룩한 씨로 남겨두신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거룩한 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2-6).
이에 오늘 시편은 일깨운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시 147:3, 5, 7).
결국,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