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79편 /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

전봉석 2022. 1. 21. 12:34

220123 주일

 

시편 79편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

 

시 79:11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시 79: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시 79:13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들어가는 말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으로 특정된다. 레위기서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7:28-29).” 여기서 사람도 그 예외는 아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사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입다’를 기억할 수 있다. 저는 암몬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께 전쟁의 승리를 구하며 그에 따른 서원으로 다소 엉뚱한 약속을 하였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결국 저는 승리하였고, 이에 승전가를 울리며 돌아올 때에 저를 가장 먼저 반기며 즐거워하였던 이가 그의 외동딸이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이에 저는 끝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었다(39).

 

여기서 우린 저의 성급했던 서원과 그에 따른 약속 이행의 오류를 볼 수 있다. 먼저는 함부로 서원하지 말 것이며,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 5:5).” 또한 우리가 갚지도 못할 서원을 했을 경우에도, 특히 이런 경우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제물로 요구하지 않으신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21).” 즉 이런 경우 사람을 동물로 대속하여 바치게 하셨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출 13:13).” 즉 다른 이교도들과 달리 사람을 짐승과 같이 죽여 그 목숨을 거두어 제물로 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이는 매우 중요한 요점으로 입다는 문자적으로 자신의 서원한 제물에 대해 딸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를 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룩이 무엇인지, 그 거룩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피려 한다. 곧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거룩한, 죽음으로 비로소 온전하여지는 거룩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한다.

 

본문 이해

본 시편은 여섯 편의 민족애가 중 한 편으로 분류가 된다(44, 60, 74, 79, 80, 90) 그 가운데 네 번째로 B. C. 586년 바벨론 함락 당시 유다의 멸망이 시적배경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시편 74편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의 근거를 제시하고, 하나님께 대한 선민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으며, 민족적인 비극의 참상을 아룀으로 애곡하는 시편이라 하겠다. 그런데 74편과는 다른 점이 앞서는 ‘예루살렘 함락’을 부각시키며 이를 애가(哀歌)한 것이라면 오늘 본문 79편은 ‘원수들의 살육을 고발함으로 주의 백성들의 참상’을 아뢰고 있다.

 

시적 구분은 모두 3연으로 1연은 1-4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능욕당하고 있는 참상을 호소한다. 2연은 5-9절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주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3연은 10-13절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참상을 아시고 복원, 보수 치유하실 것을 탄원한다.

 

 

1. 우리의 가치는 거룩이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

 

예루살렘이 건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이다. 곧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24).” 이렇듯 우리가 주께 드려짐은 미신적이고 사교적인 어떤 행위나 의식, 물건을 성물로 여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함부로 어느 물건을 또는 누구, 어떤 사람을 특정하여 성물과 성인으로 삼는 것은 그래서 그릇되다.

 

오히려 우리는 그 자체로 거룩하니 그 이유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을 바로 하는 것은,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회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즉 오늘 날 외형적인 교회 건물과 형식적인 어떤 의식과 그에 따른 예복 등에 너무 지나친 의미부여는 옳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살피신다. 오늘 시인은 이를 강조하면서,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 79:2-3).” 실제 우리의 어리석음은 얼마나 참혹하고 악랄한지 모른다. 이와 같은 참상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가 멸망시킬 때만 있던 원시적인 참혹함이 아니다. 오늘에도 여전하여,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되고 사람들을 끌려다 죽였다. 아, 이와 같은 현실을 목격하면서,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 우리의 심정은 애곡하는가?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렘 7:33).” 이는 모두 죄의 결과이고 죄악의 참상이다.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4:16).” 이와 같은 실상은 오늘에도 여전하여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19:7).” 죄의 결정은 여전하다.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34:20-21).” 일찍이 우리는 이를 분별하고 주의해야 한다.

 

2. 죄는 결국 하나님의 자녀로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시 79:4).”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할 때, 저들의 비방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즉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겔 22:4).” 그러니 오늘 날 악을 더욱 악하게 부정한 사회를 더욱 부정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기독교 국가들에 의한 일이다. 누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를 기초로 <네 가지 확장> 곧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 둘째, 날마다 자신의 죄사함을 위해서도 기도와 묵상은 끊어지면 안 된다. 셋째, 우리의 생활이 은혜를 은혜답게 보존해야 한다. 넷째, 평소 우리 몸에 밴 습관이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 오늘 시편 9절을 보자.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앞서 말한 네 가지 사실을 축약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분명한 것은 우선순위다. 우리가 아뢰어 기도하는 이유는 주가 다 아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렘 15:15).” 곧 우리가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남들처럼 적당히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써가 아니다. 이어서 오늘 시편 11절을 보면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오늘을 사는 이유가 담겨 있다.

 

3.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79:12-13).”

 

곧 예수님의 명령이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를 위해서도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119:131-132).” 마치 우리의 묵상은 먹잇감을 입에 물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사자와 같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게 아니다. 아니면 우리가 어떤 시련을 당할 때 무엇으로 견디어낼 것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적당하다는 것,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것, 이것이 무조건 축복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와 같이 감옥에 갇혀 곧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고백이 과연 내 것으로 가능한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우리는 지금 어떤가? 마치 이만하면 잘 살았다싶은가?

 

 

나오는 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우린 복 있는 사람인가? 이를 시편 119편에서 근거하여 <묵상이 우리에게 주는 세 가지 복>이 무엇인가를 짚고 마무리를 하자.

 

첫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거룩한 길을 가게 된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둘째,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 영혼은 위로하심을 받는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셋째,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