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민 11:4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거룩은 지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마음, 시간과 관심과 열심은 모두 거룩한데 아직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다. 이는 우리 안에 ‘섞여 사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우린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때론 막연하여서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이 강하게 나를 쥐고 흔드는 것도 그때다.
그때 생기는 게 원망이다. 원망은 탐욕의 결정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보여준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가령 우리가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랫말들이 실은 ‘그때가 그립다’는 쪽으로 흐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6).” 하는 저이들의 말은 허상이다. 노예 신분으로 그리 호사를 누린 게 얼마이겠나? 기억이 만든 거짓은 감정을 흔들고, 휩쓸린 감정은 저 혼자 부풀려져서 ‘그때가 좋았지…’ 하는 순간 오늘의 감사를 순식간에 말려버린다. 지혜자는 그래서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전 7:10).”
한데 회상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는 또한 감사가 근거를 잃는다. 우린 늘 과거를 살뿐 미래는 닿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찰나적으로 지나 과거가 된다. 고로 한 통에 감사도 원망도 같이 섞이게 되는 모양새다. 결국 이 일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저들 사이에 섞여 사는 무리들과 같이 내 안에 섞여 있는 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이때의 그 주의는 말씀으로다. 거룩을 지키는 길은 그래서 하나뿐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어제는 아이 하나가 대표로 기도를 하고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아이들과 만날 때마다 놀란다. 하루는 온탕, 하루는 냉탕을 오가듯 전날에는 가슴이 큰 바위가 얹힌 듯 답답함으로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 힘들더니만… 어제는 아이가 처음으로 하는 기도이어서 내가 몇 소절을 앞서면 따라하는 식으로 하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였다. 특히 아이 혼자 한 대목에서 ‘오늘도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부분이 종일 마음에 여운으로 남았다. 살아있어 좋은 것은 아직 기회가 있어서다. 종종 어려울 때 우리는 죽기를 바라기도 한다.
오늘 모세도 주 앞에 투정하듯 기도하였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린 싫든 좋든 ‘섞여 사는’ 속성이 있다. 그 엄청난 엘리야도 이세벨의 등살에 쫓겨 가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였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이 모두는 덩달아 이는 원망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거룩이 훼손되지 않고 일정하게 보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었고, 저마다 살아서 산 동안에 주 앞에 고하고 엎드렸다.
놀라운 사실 또 하나는 대표로 기도한 아이는 그 부모들이 함께 아이들을 차에 태워 교회로 갔던 것이다. 그럼 나머지 둘은 어땠나? 하고 물었더니 실은 데려갈 사람이 없어 같이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 저 둘은 돌아오는 주일부터 우선은 우리 교회로 오게 하였다. 그 부모들이 언제 마음을 다시 돌이킬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서이다. 정말로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로서는 ‘섞여 사는’ 마음을 다루는 데 있어 ‘주 앞에 바쳐지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주가 계신 곳이면 거룩하다. 내 의지, 나의 신을 벗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누가 말하길 예지예정론을 거론하며 우리의 자유의지, 그 선택의 비중을 높이 사는데 이는 웨슬리의 주장이기도 하다. 한데 성경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이와 같은 주장은 헛될 뿐임을 알 수 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출 12:10).” 하나님 앞에서 외에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 거룩이다. 자신을 그렇게 자신할 때 이미 거룩은 훼손된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저를 기억하심이다.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 105:42).
저가 순종을 해서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서서도, 아들 이삭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려 해서도 거룩이 아니다. 앞서 주의 거룩한 말씀이 있어서다. 우리가 주 앞에 귀한 것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예언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며, 그보다 더 엄청나고 거룩하게 무슨 일을 행하였다 한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무엇이 헛것이고 무엇만이 남는지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목사는 씨름할 의무가 있다. 전날에 누구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하게 하시고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원망과 울분을 쥐고는 거룩한 손을 들 수 없다. 내가 누구로 인해 기뻐하고, 아이들로 인해 마음이 좋은 것은 그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 안에는 ‘섞여 사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엄마니까, 가족이니까, 목사니까 하는 어떤 당위가 우선하는 것도 그래서 불순할 수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은 거룩뿐이다. 거룩은 하나님 한 분으로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일을 강조하고 예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아이는 싫다고 빼지 않고 어떻게 하는 건데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앞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감사를 아뢰고 ‘네가 드리고 싶은 말을 해’ 하자, ‘오늘도 살아있어서 감사합니다.’ 하고 다소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으나 나는 덧붙여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마쳤다. 점점 더 훨씬 더 많은 것을 아뢰고 고하며 늘 주 곁에 살고자 할 것을 믿는다. 그것이 거룩이다. 내 자신이 아무렴, 주 앞에 서기만 하면 거룩하여진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우리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저는 전능하신 이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아, 이 놀라운 말씀 앞에 나는 굴복당한다. 누가 아무리 어떻다 해도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전날에 누구에게도 같이 함께 오기만 해도 좋을 것이라 이른 것은 내가 뭘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 오는 것만으로도 주가 다 이루신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그래서 거룩하심이시다.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예지예정이 어떻고 하는 말에 나는 이제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리 알고 그리 선택하여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무언가? 탐욕으로 원망뿐이지 않던가? 나는 지금 오늘 아이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따위의 고민을 거둔 이유다. 그 모든 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으로, 저는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이때의 저는 누구신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밝히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 거기에 우리의 무슨 판단? 어떤 협력?
한 정원사가 있었다. 저의 일은 고택을 돌보며 그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을 손질하여 한 가운데 미로를 꾸미고, 벽을 이루듯 나무들을 나란히 세우고, 온갖 꽃들을 손질하여 아름답고 보기 좋게 책임지고 있었다. 하루는 성대한 파티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보며 감탄을 외치고 주를 찬송하였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던 정원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자신이 손보기 전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자나나 있던 넝쿨과 삐뚤빼뚤한 나뭇가지들을 보지 못해서 저런 소릴 한다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곁을 같이 지키고 서 있던 젊은 보조 정원사가 왜 표정이 안 좋은지 물었고, 늙은 저는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며 속엣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젊은이는 그 손도 기술도 그리고 일하실 수 있는 기력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하고 되물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자신의 위대함 그 놀라운 자유의지를 운운하는 사람 치고 참 감사는 드려지기 어렵다.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그리 더해주신 것을,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
이를 알지 못할 때 우린 우리 몫을 스스로 챙기려고 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이를 안다면, 아이의 저 한 마디가 기도가 나의 풍성한 어휘로 가득 채워지는 어떤 기도보다 귀한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안에 ‘섞여 사는’ 것들은 병든 것들이다. 없어져 할 것들이고, 그로 인하여 광야 40년을 돌아야 했던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 나는 말을 더듬거나 어눌하였다. 그래서 때론 말을 한참 입안에 궁굴리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삼키고는 했었다. 그때 그것이 실은 조급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의 나 됨으로 억눌리거나 위장을 하려 들 때,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4).” 이 또한 하나님이 치유하셨음을 안다. 그럼에도 실은 여전히 그런 증상이 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삼킬 때, 때론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으나 그것도 안 해도 될 말이 조절되기도 한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5-7).
이를 안다는 것, 오늘 본문에서 나는 저들의 원망이 얼마나 헛된가를 생각하다 그것이 여전하여 내 가운데도 ‘섞여 사는’ 것으로 시달리는 게 있음을 묵상하게 된다. 즉 주 앞에 고하고 그럼에도 그런 나를 들어 ‘오늘도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아이의 기도로 응축된다. 때론 힘에 겨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민 11:14).” 우리가 주께 아뢸 때 주는 이를 나무라지 않으신다. 못하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를 주는 기뻐하신다. 특히 어느 가정이 흔들릴 때, “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사르리니(렘 32:29).” 부부 사이도 보면 자기주장, 그 지긋지긋한 자기 나름의 자유의지를 우선할 때 가정이 흔들린다. 그때도 ‘갈대아인이 와서 불을 놓았다.’
누가 흔히 하는 말,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소린데 그 말이 가진 함정을 저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나는 그가 그의 가정의 작은 불꽃이 되길 당부하였다. 먼저 알고 이를 위험하다고 주의 신호를 감지한 것이려니 여겨,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 할 수 없다고 여기지 말고 우선 자신이 할 일부터, 여기에는 다소 치열하고 신랑이 어떻고 아이가 어떻고 하는 문제가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 앞서 수반되는 것이다. 이때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렘 33:6).” 주가 치료하신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게 설령 사랑하는 가족이라 해도, 분별해야 한다. 그리 돌아가서는 다시 그 안에 안주하는 것은 ‘섞여 사는’ 속성이 의외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 와서 또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의기소침해하며 무엇이 서러워 운다. 우는 저를 나는 한동안 둔다. 우리가 가는 길은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가야 하는 길이다. 이만큼 왔다고 내가 더 나은 게 아니다. 늘 우리의 길은 새로운 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기도, ‘오늘도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내용에 큰 의미로 되새겼던 것일까? 주가 오라 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다시 ‘오늘도 살아야 한다.’ 겨울에 떨어진 낙엽들은 흙이 데려간다. 하늘을 날던 작은 생명들은 어디로 가서 겨울을 견디고 있을까?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함께 계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허투루 살다 가는 생명은 없다.
부디 말씀으로 변화받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저 무의미하게 읽고 쓰는 성경은 없다. 말씀이 일으키시는 잠재적인 변화를 나는 믿는다. 우리가 같이 읽은 한 장의 성경이 어느 순간 저 아이들은 물론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섞여 사는’ 것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더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당연히 이제 교회로 간다. 성경을 하루 한 장씩이나마 읽고 써서 묵상글을 올린다. 한참 힘들고 예민할 수 있는 나이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저들을 보내셨는가,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제 오늘 또 시편의 마지막 장을 묵상한다. 벌써 또 150여 일의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시간은 분절로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 같으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해져 언제고 본향에 가 닿을 것을 믿는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