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 12: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 여러모로 덕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한데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보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데 성경은 주목하게 한다. 저들의 불평은 2절에 나온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의 잘못보다 자신들의 위신과 공로를 앞세우는 표현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세의 잘못보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난에 주목하신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 이에 연관지어 묵상할 수 있는 단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여러 추측이 가능한 평가다. 모세의 온유함이란 단순히 사람의 됨됨이를 의미하기보다 주만 바라는, 오직 주만으로 신뢰하는 삶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때의 온유도 강한 신뢰다. 하나님 앞에 정당한 자신을 의미한다. 다윗도 노년에 수넴 여인을 곁에 두었다.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1:4).” 모세나 다윗의 옳고 그름보다 이를 논하는 것에서 하나님은 주의 종이 비난당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리고 모세를 두둔하시며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 12:6-7).”
하고 이에 따른 처벌로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이 문둥병을 얻는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9-10).” 우리가 함부로 주의 종에 대하여 논하는 일에 대한 경고다. 저를 위해 모세가 기도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13).”
어떤 잘못보다 이를 논박하는 것에 더욱 신중할 것을 묵상하게 된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이해 너머에 계신다. 그러나 모든 일은 주의 목적 아래에 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나의 뜻이 설 것이니’ 하심에 머물게 된다. 이를 알기 어려울 때 설왕설래 말이 앞서고 생각이 우선하면서 듣기보다 말하기가 먼저이게 된다. 이때는 영락없이 비난이 앞에 선다.
이에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하신 데 주목하게 한다. 우리의 헤아림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는 온유함의 덕목이다. 비난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 저보다 낫다고 여길 때 함부로 탓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즐거움이 커지고 영원하기를 바라신다. 모든 일의 작정은 하나님의 것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우리의 판단으로는 무엇을 가늠하고 정의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의 판단으로 어떤 두려움이 근간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즉 모든 일의 성사여부와 그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29-31).” 하다못해 참새가 얼마에 팔리는 것까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고, 그 하나가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하물며 우리 일일까!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모든 것, 우리의 악함과 그릇됨과 잘못된 선택도 모두 선으로 바꾸신다. 이에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그렇다고 함부로 죄를 지을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는 데서 온유함도 자라간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도 된단 소리겠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바울은 안타까운 어조로 설교를 이어간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2-3).” 모세의 이런 경우는 사적인 일이고, 미라암의 저런 경우는 공적인 일이다. 생각으로 하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다. 자신이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우선이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 40:26).
결코 우리의 그릇됨을 옳다 할 수 없으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더욱이 주의 종에 대하여는 함부로 입을 열 게 아니다. 이에 우리가 그 기준을 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시 147:15).
오늘 말씀은 우리를 단정하여 말한다. 곧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게 아니고, 될 것이란 소리도 아니다. 이미 복이 있는 사람으로다. 이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1-2).
단정하기를, 우리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설령 그렇기로서니 그렇지 않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저녀로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누구도,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도 우리를 정죄하시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정죄를 당하시는 것과 같다. 주의 사랑은 우리의 그 어떤 죄보다 넓고 크고 높고 깊으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2:18-19).” 고로 우리가 복이 있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2).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온유함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이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곧 산상수훈의 여덟 가지 복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우리의 닮은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받았다. 이 가난은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있다. 하여 우린 ‘애통하는 자’이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그릇될 수밖에 없음을 아는 슬픔이다. 여기에 주의 위로가 머무신다. 이때의 ‘온유한 자’는 비로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한다. 그 만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더욱 더 갈급함으로 드러난다. 이에 누구를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사는데 이는 자신이 그의 긍휼하심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앎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도 안다. 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로 거듭 자신을 비우고 돌아보고 ‘하나님을 볼 것임’이다. 그때에 ‘화평하게 하는 자’로 다툼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저는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이미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를 알 게 하심은,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8).
내가 어찌 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아는 일이다.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욥 37:11).” 엘리후의 설명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체시다.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12).” 심지어는 우리에게 끼치는 재앙까지도 하나님은 그의 섭리 가운데 두심이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하나님은 선도 악도 아니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다. 이를 알고 베드로는 설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의탁,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맡기는 일. 나의 실수와 허물과 죄도 주 앞에 내어놓을 때 이는 선하다. 이를 붙들고 주께 아뢰기를,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25:7).
주의 선하심으로가 아니면 내 어떤 것도 의로울 수 없고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는 엄연하여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주를 인정함으로 내가 산다.
자꾸 어디가 아프다. 몸은 힘들고 마음은 어렵다. 주를 바라지 않고는 나의 날들이 어려워서 서럽기도 하다. 흐리면 흐린 날이어서 그런가, 너무 추우면 추워서 그런가, 이래저래 우리는 저마다의 고통으로 주의 선하심을 구하게 된다. 늘 어디가 불편한 몸과 마음과 여의치 않은 생활이 우리들로 하여금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하고 감사를 일깨운다. 누구나 몸이 아프면 마음이 어려워지고, 마음이 어려우면 여러 생각이 말로 나오려고 한다.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도 소용이 없는 것은 아무도 이에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는 이는 보는 이대로 안타까우나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는 지극히 개별적인 은사로밖에는 다가갈 수가 없다. 누구에게 말한들 매번 같은 소리뿐, 그러느니 서러움만 깊어진다. 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나는 이 놀라운 명제 앞에 굴복한다. 자유의지? 나름의 선? 의? 도덕과 열심을 다하는 충성? 대체 그것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며칠 전 누구에게 말하길 죽을 거 같아야 억, 소리도 나고 살려주세요, 하는 법이다. 염치? 어떤 위신이나 나름의 가치? 그래서 꼿꼿하게 자신의 주장을 붙들고 있다는 건 그만큼, 아직 살만한 것이다. 어쩌겠나? 부디 저의 적당함이 그 영혼을 다 갉아먹지 않기를. 본디 죽겠으면 억, 소리 내리면서 살려주세요, 하는 길밖에 없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거기서 무슨 옳고 그름이며 자유의지가 어떻고, 이는 다 여차하면 가룟인 유다의 기질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소신 있고 나름 자기 판단으로 자기 길을 간 인물을 꼽으라면 저이가 아닌가싶다.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까지! 자유의지를 운운할 거면 이 정도 절개는 있어야지. 한데 어쩌나? 하나님 앞에 누가 무엇으로 선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이것으로, 나의 약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바란다. 심령은 가난하여지고, 애통하는 자로 주를 부른다. 나의 온유함은 성품이 아니라 주 앞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송구함이다. 하여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른데, 그리하여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고 긍휼히 여기려 하고, 마음이 청결하기를 사모할 뿐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로 훙내라도 내며 살았으면 하는데,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데 이미 우리는 복 있는 자이다. 이 얼마나 염치없으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이 땅의 기준으로는 가당치 않는 나의 나 됨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렇게 나를 붙들고 계심이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이로써,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33:11).
이런저런 일로 또는 어떤 마음으로 주저하고 휘청거리기도 할 때,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8).” 하여 어제는 이렇고 오늘은 저렇고 하겠으나, 그러그러한 나의 날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선을 구한다. 그것으로 남을 위하기도 하고 누구를 더 긍휼히 여길 수도 있는 것이어서… 부디 나로 하여금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도 함께 더하실 것을 믿으며. 어제는 그렇게 어디가 불편하고 뭐가 어려워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그러할 때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오래 그 입에 머금는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3-14).
하여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서게 하시고, 주신 바 한 날의 생명을 귀히 여기며, 나는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에 담대함을 얻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 중심을 모으고, 모든 결국은 하나님의 것임을 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복 있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