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전봉석 2022. 1. 25. 05:1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14:24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1

 

 

바로 앞에 ‘약속의 땅’이 있다. 우리가 주를 믿고 바라던 것이 우리 앞에 있다. 한데 늘 앞서 불안과 염려가 불만과 원망으로 작동한다.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 14:4).” 저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처구니없다. 한데 우리의 불만은 옛 생활을 오늘보다 낫게 여긴다. 이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5).” 앞서 주를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모세와 아론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 정도면 차라리 쳐내고 같이 화를 내며 저들을 대적해도 모자랄 판에 저들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권위도 자존심도 모두 버렸다.

 

이때 같이 통분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6-7).” 나서서 같이 어리석은 백성을 설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저들을 돌로 쳐 죽이려 할 뿐이다. 비록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 하며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9).”

 

아무리 세상이 미쳐 날뛴다 해도 그 숫자는 비록 둘뿐이나 주 앞에 바른 믿음의 소유자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는 저들을 다 진멸해도 모자람이 없으셨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2).” 그러나 주의 종 모세가 저들을 위해 주께 기도한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15-16).” 차라리 홀가분하고 어쩌면 아예 새로운 민족으로 시작하심이 낫기도 할 텐데, 모세는 주께 아뢴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8).” 결국은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고 들어갈 자가 들어간다.

 

참 다들 지지리도 말 안 듣는다.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30).” 결국은… 광야 4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35).” 삶이 허망하고 그 길이 헛되다 하심이 그래서인가.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37-38).”

 

이 말에 뒤늦은 후회란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39).” 그러지 말라는데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40).” 겉으로는 회개 같으나 끝까지 불순종이다. 멋대로 구는 것이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목자와 양 같다. 목자의 돌봄을 거절하는 양에게는 고통과 파멸뿐이다. 월요일, 설교원고 초안을 위해 본문을 살피면서 알게 된다.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시 80:1).

 

우리는 항시 주의 돌보심이 없이는 곁길로 가고 옳지 못한 판단에 휩쓸리게 돼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결국은 ‘광야 40년’이라고 이는 단순히 징벌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의 됨됨이는 결국 그러한가보다. 이에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렘 50:17).”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주의 백성에게였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이와 같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묵묵히 그 뒤를 따름이 복이다. 하면 주가 복을 주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10).”

 

우리에게 더하시는 복이 인과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이를 짊어지고 사는 것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으니… 듣지 못하는 동안 기어이 돌고 돌아야 하는, 그렇게 우리 안의 ‘섞여 사는’ 속성이 다 죽을 때까지는 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어찌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시 80:2).

 

어쩜 우린 그렇게 틈만 생기면 그릇 행하기를 자연스러운지. 좀 살만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주를 멀리하고 세상을 가까이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 여기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롬 5:8).” 말씀 앞에 가만히 엎드린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내가 누구를 생각하는 일에서도, 저 아이의 묵상글 하나를 어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아니 이 말은 주께서 나의 아주 사소한 순종과 감사로도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내용으로 이해가 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후회는 회개가 아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뒤늦은 반성이나 후회가 결국은 또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회개야말로 주의 은혜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주께 자연스럽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3).

 

우리의 어떤 바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주의 얼굴빛을 찾는 것,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는 값진 은혜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저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도 참 많다. 저들 나름의 바람을 갖고 주를 찾는 일은 불순하기까지 하다.

 

그럼 우리의 정직한 회개란, 그리하여 오늘의 삶의 불만을 바꾸어 달라는 요구조건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 80:4).

 

주의 노가 우리를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결국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그러니까 삶을 개선하고 주신 환경을 어찌 극복하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곧 우리의 평안은 주와 함께 하는 그 자체로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그럼에도 인생의 쓴 눈물은 죄의 결과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시 80:5-6).

 

나름 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믿는 믿음은 모두 가짜다. 저마다의 노력으로 애써 신앙을 살려하는 것도 모순이다. 우린 다만 주께 아룀으로 주께 맡긴다. 정직하여 그 어렵고 힘듦을 고한다. 그러면서도 있는 그대로 주 앞에 선다. 오늘 우리 현실은 우리가 선택한 일의 결과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다만 우리는 주께 고하고 또 아뢸 따름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 80:7).

 

우리가 주의 공로가 아니면 무엇으로 살 것인가. 시편 80편을 읽고 설교원고를 준비하면서 전반부(1-7)는 ‘목자와 양으로의 관계’로 후반부(8-19)는 ‘포도나무와 그 열매’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은 주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로서의 비유이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 80:8-11).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질문에 저마다의 답이 있겠으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우리의 복은 그 뿌리를 시냇가에 신은 나무와 같이 주께로 뿌리 내린다. 한데 우리 몸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이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를 앎으로 더욱 근신한다.

 

믿음의 자녀로서 우리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여 살게 하시는 이유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그럼에도 결정적인 것은, 불순종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담을 허문다. 주의 보호하심이 없는 것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자와 같을 뿐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 80:12-13).

 

우리 안에 들락거리는 숱한 생각과 나름의 갈등이 우리로 병들게 한다. 앞선 염려나 예기불안으로 스스로가 자신을 업신여긴다. 자신을 못미더워하니까 무슨 일에서도 혹시나 하고 세상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3-15).” 누구랄 것도 없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주의 보호하심을 담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시 80:14).

 

결국 우리는 주의 영광이다. 주의 영광이 주의 영광을 가리고 오히려 사람들의 구설수가 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 이를 어쩌면 좋은가? 우리는 주의 나라라.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 80:15).

 

이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어디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였든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정말이지 이러한 확신과 주를 향한 의지가 없이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니면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세상 권세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이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말씀은 일관되게 한 곳을 가리킨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에,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시 80:16-17).

 

그것이 우리 자신임을 확신하며 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삶이 복되었다. 곧 교회를 지키는 힘은 인내다. 요즘은 나는 자주 이 생각을 한다. 주를 사랑하는 일도 인내로 한다. 누구를 위하고 저를 주 앞에 온전히 세우는 일도 주가 더하시는 인내가 없다면 어림도 없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 80:18).

 

시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이 유지되고 이루어져 가는지, 그 과정을 그려 보여주는 신앙의 해부도 같다. 곧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누군들 환난이 좋을까만 그것으로 소망을 알고 소망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본다. 곧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어느 훗날 우리에게 더하시는 주의 말씀으로 비추어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시 80:19).

 

이처럼 나는 월요일 아침에는 설교원고 본문을 우선하여 초안을 잡는다. 그리고 이를 일주일 내내 다루고 또 적용하고 묵상하며 주의 뜻을 더욱 바란다. 내가 아이 하나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고, 누구 일로 마음이 어려울 때면, ‘아 이 마음이 주의 마음이겠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 이는 혀가 돌아가고 손가락에 어떤 초능력이 발휘되는 따위의 환상이 아니다. 실제였고 그 실상은 날마다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오늘 시편의 외마디 고백,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시 3:1).

 

우리가 바른 신앙으로 산다는 일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4).

 

오직 주의 보호하심을 알고 주께 아뢰며 주를 의뢰하며 사는 일로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