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전봉석 2022. 1. 26. 05:2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민 15:38-39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무슨 일이 닥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전까지는 이를 모른다. 알면서도 외면한다. 설마,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은 닥치고 나서야 문제이다. 그때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사소한 것이든 돌이킬 수 없는 것이든 더는 예전 같을 수는 없다. 늘 자주 접하게 되는 엄마들의 말, 우리 애는 그럴 리 없어요! 하는 허상. 늘 엄마 품을 찾고 치대고 의지할 것이라는 착각이 저들로 하여금 방책을 잃게 한다. 하긴 자식을 가장 모르는 게 또한 그 부모이다. 그뿐일까?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가장 잘 안다고 여기지만 가장 잘 모른다.

 

“그때는 사람만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아프리카 시에리온 내전에서 활동하던 어느 ‘국경없는 의사회’의 한 사람이 말했다. 그때는 꿈을 좇느라, 그때는 사랑하느라, 그때는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이는 우리 모두의 후회가 아닐까? 그때는 자식을 사랑하느라, 그때는 교회 일을 하느라…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다소 의아한 처지에서의 말씀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저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광야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서두에서는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어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화제와 번제, 낙헌제와 절기제를 드릴 때의 규례와 상황과 그 방식을 이르신다.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민 15:14).”

 

틀어진 일을 두고 언제나 마땅히 당면하게 될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명령하신다.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19-20).” 앞으로 저들은 무려 40년을 광야 생활을 할 것이다. 그 동안에 대부분의 사람은 죽고 갓난아이나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들에게 일러 ‘그곳에서의 일’을 미리 알게 하신다. 곧 우리는 ‘그때의 일’ 곧 과거를 두고 후회하나 주님은 늘 ‘그곳에서의 일’ 미래를 두고 말씀하신다. 회개는 지나간 것을 개선하고 고치는 것이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주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일이다. 하면 자연스럽게 지나간 것은 개선이 된다.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 옷에 옷술을 달아 이를 보고 알게 하심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38-39).” 옷 끝에 술을 다는 것은 아무래도 활동하는 데 거추장스런 일이다. 하지만 이 옷술은 지나간 것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 된다. 즉 옷술이 치렁거릴 때마다 첫째, 자신의 믿음의 사실을 상기한다. 우리는 믿는 자로 살면서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다. 우리의 태만함은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 때 생긴다. 에이 설마, 하고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 옷술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살피게 하는 오늘의 일이다. 오늘도 살아서 이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갈 때 치렁거리는 옷술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행하는 이 일은 어떤 의미인지를 살피게 한다. 셋째, 그렇게 옷술은 우리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꾸준하게 독촉한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39).” 그야말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오늘도 하루를 더 살게 하셨는지, 이 일을 왜 하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를 바로 알지 못하면 방종하게 돼 있다.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살게 돼 있다.

 

어제 한 아이를 두고 매일하는 말씀 묵상과 주일을 지키는 데 소홀하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일렀다. 어느새 6개월이 된 아이인데도 여전하여서 오히려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둘까 하다, ‘너는 너를 이기니? 나는 나를 이길 수가 없다!’ 하는 생뚱맞은 말로 아이에게 일렀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옷술이 필요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도 하고 해야 할 일을 바로 하게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고, 세상의 유혹을 경계하게 한다.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방심할 때,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31).” 오늘 말씀은 엄히 경고하시는 것이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모든 일은 닥치고 난 뒤에 알게 된다. 옷술은 우리로 돌아보아 회개하게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를 알게 함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 우리는 이와 같은 나름의 옷술, 묵상하는 삶으로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또는 누구와 마주할 때에 저들에게 누누이 알린다. 왜냐하면 우리도 쉬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잊고 산다. 순간 어떤 일에 손을 댈 때, 무슨 생각을 할 때, 누구와의 만남에서 옷술이 치렁거리며 나를 흔들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 한두 줄 별 내용도 없는 것을 아이들이 매일 묵상글이라고 쓸 때 나는 안도한다. 이제는 누구의 일에 대해서도 ‘옷술’이 없이는 뭐라 이르지 않는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바울의 이와 같은 말씀을 나는 신뢰한다.

 

구원의 확신은 결코 막연한 기대나 그러려니 하는 적당한 위안이 아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확신에 찬 설교가 시적으로 들린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3-25).

 

우리로 오늘을 살게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이는 마땅하지 않다. 어느 날 건물이 붕괴되어 사람들이 죽었다. 누가 잘 다녀오겠다고 나간 뒤 더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겠나? 결국은 닥치고 나서야 안다.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세상을 상식으로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는 꼴을 보고, 예수님은 엄히 말씀하신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 17:32).

 

롯의 처, 저는 자신이 믿는 자로 구원 받아 천국 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나? 그와 같은 우리에게 야고보는 일갈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저마다 뭐라 하면 나름은 다 믿는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저의 생활에서 ‘옷술’을 발견할 수가 없다. 기도도 말씀도 생소한 듯 어색해한다. ‘그때에는 사람을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어느 의사의 말처럼, 자신의 헌신과 당면한 현실로 저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저의 희생은 눈물겹도록 높이 평가한다. 목숨 먹고 제3국의 내전 상태에서 저들의 생명을 돌보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하시니, 우리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오늘 본문의 옷술이다. 나는 그리 이해한다.

 

나라를 구하고, 국민을 위해 앞장서다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값진 희생과 노고를 치렀다 한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나 애간장을 태워가며 교회를 위해 불철주야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다 교회 헌신자들이라 한들? 설마 그의 ‘옷술’이 저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매순간 상기시키지 못했다면, 아니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국의 재개발 철거 명령에 신나와 가스통을 들고 순교를 외치는 교회 헌신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목사를 신봉하고 섬기는 교회를 무슨 신주처럼 애지중지 여기며, 이는 다 우상 숭배와 다를 게 없다. 그 원천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멸망을 면했다고 여겼는데, ‘롯의 처’를 생각할 때면 나는 소름이 돋는다. 기껏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았겠나?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를 떠났으나 여전히 저는 그 안에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나름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산다고 사는 사람들, 목사가 되고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면서 사는 사람들, 이름하여 교회 헌신자들, 이제 다 된 줄 알았는데…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어느 훗날 이구동성으로 죽음 저편의 나라는 아수라장이 될 게 뻔하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마다 억울한 게 얼마나 많을까? 나름 한다고 하며 살았지 않았겠나? 나는 어제 누구 엄마와 통화를 하며 주일을 왜 안 지키시는가? 하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아이를 지킬 것인가? 엄마의 기도하는 모습 없이 아이의 ‘옷술’은 무엇으로 달 것인가? 말씀을 묵상하고 같이 가정예배를 이어가시라. 그 일이 우리가 보일, 그리고 우리를 지킬 ‘옷술’이다. 하다못해 나는 아이엄마에게 아이 앞에서 시늉이라도 하시라, 하고 권하였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 해야 할 말씀은,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그럴 리 없다고? 자부하는 그 확신을 부디 의심하시기를.

 

아찔하고 두렵고 떨리지 않나? 하여 노인이 된 바울은 자신이 이룬 업적을 뒤로 하고 편지를 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를 볼 때 자신이 자신을 자신하고 사는 일보다 무서운 미신은 없는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다들 나름의 열심으로 최선을 다할 때는 정작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의당 주의 이름으로 목사도 되고, 집사도 하고, 누구는 찬양 가수로 활동도 했다. 저들의 목소리로 거룩을 노래하였고, 그들의 기도는 간절하여 구구절절 눈물겨운 하소연으로 바라는 소원으로 넘쳐났다. 숱한 사람들이 누구의 설교에 아멘, 하였고 누구의 찬송에 감동하며 할렐루야를 외쳤다. 심지어 은사를 운운하며 실제 절름발이가 걷고, 귀신 들린 자가 정신이 돌아왔다. 의당 자신들은 주의 일을 하였다 장담할만하지 않은가?  그리 믿고(?) 살았다. 그런데 주님은 저들을 모르신다니! 것도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인데…. 나는 등골이 오싹해진다.

 

하여 바울은 노년에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우리는 그와 같은 ‘옷술’을 달고 살아야 한다. 전 주에 누가 묻기를 나의 묵상글 쓰기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날마다 빠짐없이 매일 그럴 수 있나? 하고 물었을 때도 나로서는 이것으로 나를 친다. 쳐서 복종하게 함으로 나를 주 앞에 다시 돌이킨다.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대비한다. 옷술이 치렁거린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구원은 내가 이룬 게 아니다. 그러니 더욱 간절하다.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 얻은 것이라면 당연히 나의 소유권을 요구하겠으나 거저 주신 것이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받을 자격이 안 된다. 안 되니까, 오늘도 말씀 앞에서 면목이 없다.

 

회심하면 구원을 얻는다. 교리적으로도 성경이 이를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이루었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날마다 매순간의 회개를 재촉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옷술’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자꾸 묻는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그러니 어찌 아니 묵상글을 쓰지 않을 수 있겠나?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아이들은 매번 자주 빼먹는다. 그럼 나는 아이들의 옷깃에 술을 달듯 다시 또 채근하고 부탁한다. 누구에게는 가정예배를 드리라고 당부하였다. 내가 감사한 것은 돌이켜 주 앞에 두 손 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가정예배였다. 그때는 죽을 것 같아서 했다. 아들아이가 아직 필리핀에 가기 전이었으니 중2 때였나보다. 딸애는 고1,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오면 11시였다. 어디 학원이라도 한 곳 거치고 오는 날은 12시가 넘었다. 그때는 근데 필사적이었다. 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봐야 서로 둘러 앉아 천송 한 장 부르고, 누가 대표로 기도하고, 성경 한 장 읽고, 내가 대표로 기도하는 것으로 끝이다. 한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억지로든 형식적으로든, 우리는 그냥 한다.

 

곧 회계사 시험 날짜가 잡히고 아들은 더욱 마음이 급한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교회로 내려가 공부를 한다. 저녁에는 정확히 여섯 시에 맞춰 저녁을 먹는다. 그럼 아들은 시험 때가 가까웠으니 당분간이라도 가정예배를 안 드릴 줄 알았다. 한데 어림없다. 우리 가정의 ‘옷술’인 셈이다. 아내는 성급히 상을 치우고 부랴부랴 예배준비를 한다. 같이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 한 장을 읽고… 어제 누구 엄마에게도, 억지로라도 하세요! 하고 이른 것은 그 때문이다. 억지로라 하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듣는데, 그만큼 자신이 자신을 자신하는가? 나는 어림없어서 말이다. ‘옷술’을 달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너희는 이 술을

볼 수 있게 달도록 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주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것이다.

그래야만 너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너희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색욕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민 15:39, 새번역성경).

 

이에 오늘 시편은 이를 뒷받침하듯 주께 아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