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조상의 가문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민 18:1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7
직분은 사명이고 사명은 책임이며, 하나님이 책임을 지우신 것은 선물이 된다. 고로 교회에서 직분 맡은 자로 사명을 다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없다.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백성의 죄를 저의 책임으로 물으신다. 책임에는 권위도 따른다. 공통적으로 어떤 직분이 주어졌든 그 일에는 권위가 부여된다. 권위란 일정부분의 지휘권이면서 동시에 영향력이다. 권위에는 순종이 따르고 행사되는 권위는 위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묵상하면,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7).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순종의 첫 걸음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합당하고 당연한 일에 대하여, 교회의 직분 맡은 자는 책임을 진다. 그 일이 설령 궂은일이고 누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그의 이름 아래로 피한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5:11).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엄습하고, 실제 그 상황이 우리로 속상하게 할 때에도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주께로 나아가는 것으로 찬송이 된다.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74:21).
하나님은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로 삼으신다.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9).
즉 우리의 구함이 그 기준이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사하시는 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것으로 우리가 살았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죄사함을 받았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 이를 알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섞여 있는 무리’를 걸러낸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느 13:3).
말씀으로다.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세상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어릴 적의 기억으로 또는 자신만의 고충으로 인해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산다. 누가 말하길 사람들이 문신을 새기는 것은 그 상처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곧 몸 밖으로 나온 마음이라 할까? 교회 일을 할 때, 무엇으로든 누구에게나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행하는 일에 따른 찬송의 계기가 된다. 그러한 어려움이 없으면 기도가 앞서지 못하고, 기도로 행하지 않는 행위는 위선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마에 문신을 새기듯 스스로 위엄을 취하는 경우도 많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6:12).” 그런데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9).” 그러니 미련한 자보다 더 미련한 자가 스스로 옳다 여기는 자이다. 저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하니, 그의 하는 짓이 어떠한가를 알겠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17).”
오늘 날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는 구약시대에 레위 족속으로 한정되었던 일이라면 이제 우리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택하신 족속 곧 우리 자신이 레위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로 어두운 데서 불러내셨다. 이는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왜? 주의 이름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 곧 우리 모두는 사명자로 사는 것이지 목사나 어떤 특별한 직분 맡은 자만이 그런 게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하나님의 자녀는 긍휼 안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은 특별한 은택이다. 모두의 것이 아니다. 이에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함께 있게 하여 너와 네 아들들이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때 그들이 너를 돕게 하라(민 18:2).” 제사장과 레위인은 공동체적인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개별적이나 개체적이지 않다. 우리는 계통을 따른다. 멋대로 자기 일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 하지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 독립적이면서 공동체적이고, 공동체이나 개별적이다. 즉 나 혼자 외따로이 떠도는 섬이 아니다. 우리는 한 나무의 가지로 시인은 이를 강조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 80:8).
오늘 우리 개개인의 정체성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9-12).
온전히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허물어진 담으로 길 가던 이들이 그 열매를 따게 한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가 했더니 주의 백성들이 농락을 당한다. 이는 각각 남유다는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B. C. 586년에, 북이스라엘은 앞서 B. C. 722년에 그리 되었다. 시편 74편에서는 주의 성전이 함락됨을, 79편에서는 주의 주민들이 학살당함을 슬퍼하였다. 한데 이는 80편에서 앞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농락당하는 것을 보고 주께 아뢰고 난 뒤 200여년 뒤의 일이다. 보고, 듣고, 깨닫고 이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해 있었음에도 서로 똑같은 길을 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어리석음이란 그야말로 문신과 같아서 상처를 보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깨우침이 없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9:18).” 그러니 아무 말이나 듣고 멋대로 행함인데,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15).” 우리로 삼가게 하는 것이 직분이었다. 나는 친한 친구에게 저가 다니는 교회에서 평신도사역으로 자신이 배웠으면 또한 가르치는 자가 돼야 하는 것에 대해 적극 권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담스럽다는 말과 함께 여러 핑계가 따르지만 모두가 헛소리일 뿐 정작은 싫은 것이다. 수동적으로 머물기에 급급한 자는 사명자로의 직분을 경솔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1).” 굳이 몸 밖으로 마음의 상처를 도려낸다 한들 그 새겨진 문신은 혐오스럽고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 인디언 문화에서 이를 얼굴에 새김으로 자기 영혼을 몸 밖으로 드러내어 신성시하려 했다. 일종의 과시다. 남에게 보이는 나이다. 저의 인정과 그에 따른 귄위로 스스로를 즐거워하기 원하는 미신적인 마음으로다. 미신적이라 하면 스스로 따르고 옳다 여기는 마음을 근간으로 한다. 세간에 이목을 끄는 어느 대선 주자 곁에 이런저런 사교(邪敎)적인 인사들이 많은 모양인데, 세상이 미쳐 날뛰는 증거다. 어쩌다 사람들은 운(運)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만 못한 판단력을 갖게 된 것일까?
성경에도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사려 했던 마술사 시몬이 있었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9-20).”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베드로는 저를 엄히 내친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21).”
가령 교회의 직분을 맡아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이를 감사히 그 선물로 받아 행하기보다, 그리하여 행운이 따를 것처럼 복을 바란다면 마술사 시몬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하고 교회 일에 있어 박해 받기를 권하신다. 나아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행운(?) 곧 복의 기준이 얼마나 성경과 배치되는지 알 수 있다.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사 19:3).”
다시 말하면 이는 모두 세상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저들의 정신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의존하려 드는 사교(邪敎)적인 행태를 띤다. 하다못해 웃자고 하는 프로그램에서조차 무당복장을 하고 두 남자가 히히덕거리며 누구의 고민을 듣고 상담하고 이에 충고한다. 왜 하필… 이는 다 세상 문화로 애굽의 흔적이다. ‘애굽인의 정신’으로 교회를 다니고 섬기고 나름 한다고 하는 신자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저들은 자신의 헌신과 봉사 그 자체도 우상적인 숭배의 행위로 한다. 이를 조장하는 목회자들도 많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세상에 속해 사는 성도들은 모두가 혹한다. 어느 특정 심신미약자와 같이 우리 영혼은 허약한 체질로 자라기를 멈춘 듯하다.
오직 주만 바라며 우리 안에 스스로 ‘섞인 무리’를 걸러내는 일은 말씀으로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누구를 대할 때, 어떤 말로다 위로하고 권면해야 할 때도 가급적이면 나의 말보다 성경으로 하려 하는 것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 119:9).
이는 결국 나를 붙들어주신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
그러니 살면서 이 땅의 문화로 우리가 본의 아니게 그 영혼이 억눌릴 때,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8).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다른 대책이 없다. 그리하여 오늘 시편은 주께로 피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7:1).
우리는 결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스스로 이겨낼 수도 견뎌낼 수도 없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자신은 물론 자식과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그 기준은 명백하여,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