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민 19:2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4-5
정결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은 귀하다. 본문은 재를 물에 타서 그것으로 씻어 소독제로 사용하였다.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민 19:17-19).” 이는 먼저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이를 정결하게 하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20).” 단순히 자신을 더러움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정결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힘이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정결케 하고자 하는 기도와 닿는다(56, 57편). 당시 근동에는 눈물을 담아 눈물병에 담아 이를 기억하였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8).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두는 일과 이것을 ‘주의 책’에 기록되는 일을 동일시한다. 즉 나의 모든 슬픔이 주께 보관되고, 주의 책에 기록되어 주께서 기억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할 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1).
더는 두려워할 게 없다. 사람으로 인하여 힘들 것도 없다. 실은 부대끼는 문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특히 명절을 앞두고는 가족 간의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다들 들어보면 이래서 문제고 저래서 힘들다. 저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라. 아주 멀리할 수도 그렇다고 더는 가까이 할 수도 없는…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의 눈물을 기록처럼 보관하여 주께 남김으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57:7).
오늘 본문은 이를 영구한 율례로 두었다. “이는 그들의 영구한 율례니라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린 자는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민 19:21-22).” 스스를 부정하지 않게 하기 위한 정결의식은 하나님께 향한 마음이다. 특히 이번에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결국은 사람과 사람 간의 전파이고, 이를 막는 길은 서로의 거리두기와 정결한 몸가짐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면 알 것 같다. 우리 죄의 근원은 서로 너무 밀착된 탓이다.
처음 사람 아담의 사랑고백이 생각난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한 몸이나 한 몸일 수 없는 자의 한계는 저를 의지함으로 찔린다는 것이다. 애굽은 세상이고, 세상은 사람들의 세계라,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곧 우리로 주를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전적인 요인은 사람으로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이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거듭되는 상처인 것 같다.
곧 회심하여 구원을 받고도 끊임없이 죄를 짓고 회개해야 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사람으로 인한 근심이 도리어 해가 되지 않고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주를 찾고 더욱 주께 의뢰하는 일이다. 곧 바울은 자신의 갇힘으로 근심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것으로 기도하고 회개함을 기뻐한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결국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자식이어서 부모를, 부모여서 자식에 대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어쩔 수 없는 고충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정의하는 게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0).
간단하게 말해 주의 이름으로 아뢰는 근심이 있고 주께 숨기려고 하는 근심도 있다. 모든 근심이 우리로 힘들게 하지만 그것으로 더욱 주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있고, 그것 때문에 더욱 주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근심도 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1).
오히려 우리의 근심으로 우리가 깨끗함을 나타낸다니! 오늘 본문에서 정결을 사모할 때 불결하고 불의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을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누릴 영광이 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이 놀라운 사실,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지혜로 가지고 산다는 것은 복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곧 오늘 우리의 정결은 단지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그 이상의 일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맑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훈련이 된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은 날로 가까워진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결을 사모하는 데 있어 그 의식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 2:6-7).” 나의 행실이 완전할 수 있는 길은 돌이켜 주께 아뢰고 나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특히 이 일에 있어 야고보 사도의 설교는 귀하다. 먼저는 우리의 정결을 위해 오래 참음을 권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오래 참음은 인내로써 이는 견딤의 결말이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11).” 주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우리의 인내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게 참고 견딘다고만 되겠나? 그래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8).” 주를 가까이 하면 손을 깨끗이 한다. 함부로 만지거나 쥐고 살지 않는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오직 주를 바람에서다.
복음은 여기서 우리의 ‘오직’을 붙들고 다스리고 간직하게 한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다섯 가지의 오직(Sola)’을 찾아보았다. 첫째는 말씀을 향한 오직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어제도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가장 자주 강조하고 또 부탁한 것을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기준은 변함이 없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다.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기 위해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 훈련을 쉬지 말기를. 오직 우리에게는 말씀이 우선이다.
두 번째의 오직은 믿음으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우리가 의인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그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그 일상이 드러낸다. 자주 생각하기를 믿음은 쉽다. 신앙은 어렵다. 믿는다는 느낌은 신앙으로 산다는 일로 구체화된다. 이는 실제의 부대낌이 따른다. 결국 내 안에 이는 어떤 서운함, 못마땅함, 귀찮음, 부정하고 싶은 마음 등으로 연속된다. 곧 끊임없는 갈등이 나를 괴롭힌다. 믿음이 없어서도 신앙을 저버려서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신앙을 더욱 지키려고 할 때 이는 더욱 구체화된다. 이때의 오직 믿음, 전적인 하나님 신뢰가 가장 큰 힘이다.
셋째는 오직 은혜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오늘의 나로 주 앞에서 살게 하심은 은혜뿐이다. 나의 어떤 공로로도 아니다. 내가 아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정결할 수 없다. 이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8-9).” 값없이 주신 이것,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하는 찬송이 저절로 드려진다.
어제도 오전에 아이들과 수업 중에 나눈 말씀으로 나는,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하는 구절로 아이들에게 고백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래놓고는 돌아와 곧 시험을 앞두고 가장 예민해하고 힘들어하는 시기의 아들에게 나름은 위한답시고 한 말이, 어디 오피스텔이라도 알아볼까? 하는 소리였다. 아내와는 이번 1차 시험이나 끝나고 한 번 물어보자고 했던 것인데… 잠도 편히 못 자고 교회와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안쓰러워서 했던 소린데……. 괜히 또 감정만 상하게 하고, 마치 나가라고 하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는 딸애의 지적에 속상하였다. 나는 늘 그런 식이라, 말씀으로 믿음으로 나름은 무장하고 보다 의연하게 조금은 온화하기를 늘 바라는데. 그래놓고는 연신 기도하기를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뿐이다. 행여 개떡같이 말했어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해달라고, 나의 기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막무가내다.
네 번째 오직은 복음을 토대로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이다. 그래서 이제 더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우리로 주 앞에서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이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이 있음으로 오늘도 산다. 이런저런 감정으로 휘둘리지 않게 된다.
이번 설에도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설 당일에 아버지가 줌으로 인도하시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서로의 왕래를 멈추었다. 오늘은 막내가 주일 예배 후에 글방으로 온다. 조카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그나마 얼굴을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래저래 코로나 정국이 우리의 일상을 흩트려놓았고, 나의 불안증이 어디 멀리 나다니지 못하게 한 결과이나 그것으로 족하다. 복음을 나는 그리 이해하며 자유로 받는다. 더는 번거로운 제사가 필요 없다. 두렵고 떨리는 어떤 의식으로도 아니다. 이는 예수께서 단번에 주신 거룩으로다. 우리가 무엇으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겠나? 상황이 아무리 어떠하고, 이런저런 서운함과 답답함은 있으나 이는 극히 사소한 것으로,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주의 은혜로 나는 오늘도 성소로 간다.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얻은 “우리의 거룩”이다.
다섯 번째의 오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를 위해 산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를 위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한 것이다. 곧 하루를 살아도 주의 영광을 위해, 이는 결코 나의 행위로 이루는 게 아니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9).” 나는 늘 이 대목의 말씀에서 감사가 나온다.
“그 기쁘신 뜻대로”다. 나의 어떤 수고나 노력으로 오늘까지 산 것도 아니었다. 인정하건대 나의 아이들이 이만큼 반듯하게 자라준 것도, 나 같은 죄인이 이처럼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게 하신 것도, 그리하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모든 것을 내가 인정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인데,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됨이다. 나는 한 게 없다. 가끔 어떤 사무치는 미안함으로 자식들 앞에 또는 내 부모나 형제들 앞에 면목이 없다가도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이미 오래 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 너무 고마워서 감사밖에는 없다.
감사는 곧 기쁨이라고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이 놀라운 감사와 기쁨의 상관관계를 놓고,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73:25).
이와 같은 고백이 나의 것이 되게 하심을 감사하며. 비록 늘 조급하고 어설프고 엉터리 같고 어줍기 짝이 없는 위인이지만,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영광인가? 그러므로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다.” 이에 더욱 부정을 멀리하고 오직 주 앞에서 정결하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나를 덮는 주의 영광을 찬송한다. 나의 허물과 죄를, 허접하고 늘 되풀이 되는 실수를, 죄악을 ‘오직’ 주가 모두 도말하신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드려지는 감사의 마음이었으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4-5).
나로 주의 자녀 삼으신 데 놀라울 따름이어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