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전봉석 2022. 2. 1. 05:17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9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후에 놋뱀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릴 위하여 들린 예수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죄 없으신 이가 죄가 되어 그 죄를 도말하신 것이다. 오늘도 보면 저들의 원망-죄가 당혹스럽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마다 주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어찌 늘 맥없이 잦은 죄악에 시달렸던 것일까? 앞서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과 저들의 아다림 길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 손에 넘기셨다. 너끈히 저들을 무찌르고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다. 바로 이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할 때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였다. 순간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저들의 원망도 그 타령이 그 타령이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하고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하는 것으로, 것도 한두 번이지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며 하나님이 더하신 놀라운 만나와 메추라기에 신물을 났다(1-5).

 

이와 같은 불평과 불순한 마음에 대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 마치 늘 같은 일의 반복으로 그러는 동안 ‘섞여 나온 무리’가 걸러지는 듯도 하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해 주께 중보한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저들을 죽음을 사하실 방도를 더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야에서의 전투들. 어쩌면 우리 일상의 소소한 불만불평과의 전쟁인 듯도 하다. 그때에 시인의 소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우리로 더욱 강하고 담대할 수 있도록, 대장장이의 담금과 두드림에 강철은 더욱 단단하여지는 것처럼,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고 이를 즐거워 하게 하심이 아닐까?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 81:1).

 

평소처럼 설교원고 초안을 잡고 한 주간을 시작하였다. 주가 두신 곳, 나의 모든 상황에서 나는 내 핑계와 잦은 마찰을 경험한다. ‘다는 곳이었더라면…’, ‘좀 다른 여건이었더라면…’ 하는 어떤 불편함이 내 안에는 있다. 내색은 할 수 없으나 때론 오늘의 나의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더 파더>를 보고 한참을 울기도 하였다. (나는 주로 슬픈 영화를 찾아본다. 최근에는 <기적>을 보고도 울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미안해요, 리키> 같은 오늘의 현실 같은.) 점점 기억의 혼재와 상실을 경험하는 치매 역할을 하는 주연의 열연을 보며 우리의 삶이란 게 얼마나 맥락 없이 다가와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를 실감하였다. 나도 모르게 어휴, 주님! 하는 탄식과 함께 눈물을 짓곤 하였다. 곧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게 하는, 눈물과 슬픔은 나만의 경로이기도 하다.

 

곧 우리의 참된 예배가 지금, 나름, 온전할 때이다. ‘곧 이때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내게 두시는 모든 일상을 사랑한다. 그리 사랑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슬픔이기도 하다. 그것을 주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실감하는 데 있어 눈물이 주는 정화능력은 크다. 전심으로 주를 찬송한다는 것은 오늘에 속한 나의 어쩔 수 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애곡할 때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내가 받은 게 귀한 줄 알면 알수록 나의 모든 다른 것은 부수적일 뿐, 그 은혜가 고마워 눈물이 난다. 주께 일심으로 나아오는 길,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행여 나의 위선과 아집으로 그때의 감정이 니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이때에 성경은 이르신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대상 16:29).” 곧 우리의 경배는 매순간의 예배로 눈물 없이는 감당이 안 되는 현실이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이상적이다. 이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요건은 솔직히 주에 의해서이기보다 남들처럼, 나의 욕구가 채워질 때인 것을 잘 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비대하여 주를 바라는 마음이 이상적으로만 작동할 때는 참된 예배가 모호하다. 나의 만족인지, 주를 바람으로 얻는 만족인지. 그래서 나의 자체 그것으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실 때 과연 내 안에 자원하는 마음으로인가?

 

자원함으로 주가 기뻐하시는 삶이 예배이다. 이에 찬양은 필연적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시 81:2).

 

우리의 이와 같은 찬송 소리에 모든 상한 심령들도 그 영혼을 달랜다. 즉 나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의 감사가 나의 충족한 삶의 기쁨을 가지고 만족해하는 것보다 성도에게 울리는 울림으로는 다르게 작동하는 것을 느낀다. 곧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삼하 6:14).” 그리하여 나는 하찮은 사람을 만난다해도 천박해지지 않고, 죄성에 물든 사람을 만난다 해서 덩달아 죄성에 물들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나의 눈물이 나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함으로, 우리의 의연함이란 나의 인격으로가 아니라 주를 사모함으로 찬송하게 하는 슬픔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가?'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1).

 

그럴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내가 나를 움직여, 내가 선택하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이의 음성을 따라 부르신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충성이었다. 전도자 곧 지혜의 말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왜 그럴까?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이는 결코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내가 주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충동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으로라는 사실이다. 마치 주의 사역을 스스로 선택하여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한 발짝도 주의 곁으로 갈 수 없다. 이때에,

 

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9:3).

 

나의 날들이 나를 어지럽히고 힘들게 할 때, 주일을 중심으로 예배의 의무가 살아 있음으로 삶은 온전하여진다.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81:3-4).

 

곧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하신 주의 말씀에 응하는 것은 그 날만이 아니라 그 날로 인하여 모든 삶이 그러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35:2-2).” 때론 그 날과 그 날들이 무상하고 무심하여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지만,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4).

 

결국 이는 우리의 의무다. 믿는 자로 살면서 마땅히 취하고 섬겨야 할 필수였다. 기준이 없으면 모든 게 뒤섞여버린다.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이 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예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군주가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라(겔 46:3-4).” 우리가 사는 동안 주를 바라고 주를 찬송함이 하루하루의 주축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에 내 어깨의 짐을 덜어주신다. 이는 실제 느껴본 사람만 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같은 기독도인데도 여전히 그 등에 등짐을 지고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도 수두룩하다.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시 81:6).

 

다들 사느라 사는 일에 짊어지고 섰는 일이 너무 고단하다. 누구로 사는 일, 무엇을 위해 사는 일, 그 어떤 상황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온전히 자기고집 때문이다. 덜 믿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은, 살아오며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다. 교회에서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그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의 성도라니! 팔이 다리더러, 눈이 귀더러 더는 서로 관심을 두기 싫어해서 혼자 아파하고 혼자 부대끼면서도 치를 안 낸다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니 우리의 해방이 실은 또 다른 감옥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굳이 내가 책임질 인생은 없었다. 나 자신도, 내게 맡기신 자녀도, 가정도, 교회도… 실은 그것으로 주를 더욱 의뢰함이었지 책임져야 하는 무게의 의무가 아닌 것이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 세상에 외쳐 이르시기를 내놓으라! 하신다. 놓으라, 하시는데도 놓지 못하고는 신앙도 짐처럼 여겨 목사도 일이고 사랑도 지겨울 법 하니, 다들 참 얽매여 있는 것들로부터 고생이 많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백날 말해주어도 현실은 여전하니 이게 웬일인가, 했더니!

 

아주 가끔은 학습된 무기력과 같이 두려움이 또는 그래야 한다는 어떤 당위적인 의무감으로 시달리는 것 같다. 더 이상은 전류가 통하지 않는 철창 안에서 어떤 신호음이 울리기만 하면, 미친 것처럼 밀려드는 불안으로 또는 고통으로 시달리는 영혼은 아닐까? 해보지도 않고 의기소침함으로, 이제 시작인데 벌써 결말을 놓고 염려하는 것처럼…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 앞에서 나는 주의 자비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시 81:7).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애써 그때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고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시게 하시며 입히시기를 멈추신 적이 없는데도 이를 어찌 은혜로 받지 못하는 것일까? 구원은 나의 어떤 수고에 따른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는 모두 은혜로다.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거저 주신 삶에서 어찌 그 값을 지불하려 고단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을 알지 못함이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시 81:8).

 

내가 입을 열어 주를 찾고 인정하는 일,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주가 원하시는 일이 오직 그 하나인 것을,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그런데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안달이고, 이는 미덥지 않음으로 스스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르다의 열심’이었다. 이것이 곧 우상이다. 다른 신을 두고 사는 자의 본질과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시 81:9).

 

그러므로 고달픈 것은 스스로의 인생일 뿐인데,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그러자니 그 안에 평안이 없다. 감사는 씨가 마른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결국은 두 마음으로 사는 일이어서 사느라 산다고 산다는데 그 삶이 고단하기 이를 수 없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아,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생의 한복판에서 나의 고단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향하는 입’은 어떠해야 할까?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시 81:10-11).

 

듣지 않고 원하지 않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무게에 대해서는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알면서도 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구원이었다.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이와 같이 간단하고 명료한 말씀을 두고 어찌 우린 복잡한 일상을 사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구하지 않으면 별 수 없다. 구하여도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면 어쩔 수 없다. 허튼 데 쓸 것을 주가 더하시지는 않는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그럴 때 우리의 가장 참혹한 현실은 ‘하나님의 유기’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시 81:12).

 

징계와 꾸지람이 없는 삶은 거짓과 온갖 고약한 일들로 가득할 따름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우리 사회의 서술인 것 같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숨으시는 일이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신 31:17).” 아무리 주를 찾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실 때,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느 9:28).” 그리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통’이 우리로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한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시 81:13-14).

 

어쩌면 이보다 더 간단하고 명징한 방법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서 오히려 고난이 우리의 복이라.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심이 실은 고통으로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이와 같은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복이겠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당장은 어려우나 그 어려움으로 영생의 삶을 소망하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 놀라운 신앙 고백 앞에서 참 지혜를 얻는다. 즉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말은 안 해도 마음이 이래저래 어려운 날이었다.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처량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이 그립고 부럽기도 하고, 공연한 우울감으로 침잠하는 영혼처럼 마음은 저 혼자 시름시름하였지만… 굳이 나는 또 안 그러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것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나의 나 된 것,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를 인정하는 것. 이 또한 바울의 표현과 같이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의 하나로 여기려고 하였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힘든 것은 힘든 것으로… 다만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일.

 

오늘 시편의 기도를 나는 그렇게 읊조리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 10:1).

 

마치 하나님이 나를 그냥 모른 체 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러나 그것으로 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더욱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2).

 

 

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의 심정에 대하여는, 오늘 시편의 찬송과 기도를 입 안에 오래 머금고 웅얼거린다. 나를 괴롭게 했으나 나로 살게 하신, '놋뱀'으로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올려다 보며,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