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민 24:1-2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광야를 지나면서 에돔 땅을 우회하는데 이스라엘의 불평이 이어졌다. 이에 저들은 불뱀을 만나 그 원망의 대가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혹독한 벌을 치른다. 그 우회 길에서 또한 전쟁을 만나 아모리 족속 시혼과 바산 왕을 죽이며 승리한다. 그들의 행적을 모압 왕 발락이 듣고 두려움에 떨다, 메소포타미아의 마술사 발람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한다. 발람도 자신의 점술을 가지고 세 번씩이나 주의 백성들을 저주하려 하나, 오히려 첫 번째에는 저들을 하나님이 택하심을 축복하고, 두 번째에는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심을 축복하고, 세 번째에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발전을 예언하며 축복하고 심지어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다.
놀라운 사실은 저주를 하려하나 그것이 축복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발람이 비록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하여 취한 일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점술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히 본다.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민 24:1-2).” 그때에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자신이 의존하던 점술을 버렸다. 다음은 온전한 낯빛으로 눈을 들어 주의 백성들을 보았다. 그러자 저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함께 하심을 보게 된다.
발람의 교훈은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저 역시 엄연히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때에 저의 의존은 자신의 기술이다. 누구는 언변과 용모로, 누구는 그의 지식과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누구는 사람들이 따르는 재주와 그의 처세로 주의 일을 감당한다. 때로는 재물이나 사람 간의 관계가 우선한다. 저의 호감가는 인상이 저의 매력이 되어 주의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이 또한 교육하고, 신학교에서는 필수과목으로 다룬다. 웃는 인상, 말하는 어법과 어감, 옷매무새와 손놀림 등. 어쨌든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 말의 재간과 용모의 호감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데 이는 부수적인 일이고 쓸모없기까지 하다.
오늘 17절에서는 그러하였던 발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그 비밀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이는 세상의 결국이 어떠할지를 알게 하면서 동시에 메시야 곧 ‘한 별의 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것심을 예언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처럼 기이하고 오묘하다. 사람의 발상으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의 입에서 그와 같은 엄청난 예언의 말씀이 나올까? 하고 놀라울 정도이다. 하나님은 저의 불의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주의 행사를 알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반전의 섭리다.
저들 이스라엘은 어떠했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탈선하게 된 광야 40년의 세월이 기구하였다. 그러는 동안 20세 이상으로 60만의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다. 이는 영적으로 우리 안에 죽어야 할 숱한 헛된 것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들 중 고라와 다단, 아비람은 주의 종 모세를 대적하다 땅이 갈라져 저들을 추종하던 250명 족장들과 같이 스올에 떨어져 죽었다. 후에 고라의 후손을 남기셨고, 저들이 성전의 찬양 맡은 자들로 봉사하게 하심은 또한 반전이다. 후에도 저들의 원망과 불평은 전염병을 창궐하게 하여 만사천백 명이 죽게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축복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발람은 마치 이를 증명하는 인물이다. 결국 훗날에 미디안을 칠 때 점술가 발람도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데는 거침이 없다. 어떤 불의도 사교(邪敎)도 재물도 사람들의 득의도 나름의 소용도 막힘이 되지 못한다. 마침 어제 누구의 일로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다. 새로 사역지를 구하고 있다는데, 그 마음이나 태도가 안이하기 짝이 없고, 그래서 개척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 또한 셈이 앞서고 계산이 먼저다보니, 골치 아플 땐 삶은 태만을 따르는 것이라. 사모는 그런 이를 두고 답답함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게임에 몰두하며 폐인 모드로 지내는 듯하다. 일련의 사연을 듣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안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차라리 사역을 그만두면 어때?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막말로 혼자 죽을 일이지 가족도 죽이고 다른 영혼들까지 구렁텅이로 빠뜨릴 셈인지, 나만 두려운가?!
보면 게임이나 어떤 사교적인 모임에 몰두하는 사람 치고, 답이 없다. 어찌 감당이 안 된다. 뭐라 해도, 누구 말도 듣지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옆에서 어린 자식이 그대로 따라하는 데도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당최 그 속에 두려움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지, 저는 두려움이 떡이 진 사람이다. 그러고 있는 감정이 자신의 건강도, 그 영혼의 침체도, 곁의 사랑하는 아내도 돌볼 여유가 없게 만든다. 자고로 게임은 기괴한 사탄의 창조물로 현대판 괴물들을 만든다. 시간을 함부로 흘려보내고, 늘어진 영혼은 각성할 기회를 잃는다. 사모는 자신의 서러움에 눈물을 찍어내는데 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자식을 위해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울기를 빌었다. 맡기신 그 사명의 존귀함을 어디다 잃어버린 것일까? 차라리 하지를 말지, 그저 혼자 그 한 영혼이나 신자로나마 잘 건사하며 살지! 나는 자꾸 두렵고 떨림으로 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절규의 고백인가? 사역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음으로, 그 믿음의 가치를 알고 따르는 길이다. 사역자가 일반 성도와 다른 점은 더더욱 주를 두려워할 줄 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개척을 위해 이런저런 현실적인 계산은 하면서 정작 늘어져 답이 없는 게임에 빠졌으니. 모르겠다, 나는. 누구처럼 몇 십 억의 전별금을 들고 한 방에 턱하니 교회를 세우고, 또 누군 물려받은 재산이나 교회를 등에 업고 수월하게 교회를 이어가기도 하고, 이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저들의 그런저런 여건을 축복으로 여겨야 할지, 저주로 보아야 할지.
오늘 ‘발람의 사역’이 그 교훈을 더하는 것 같다. 주의 축복을 모압 땅에 알리고 심지어 우리 구주 오실 메시야의 예언을 저 같은 이의 입을 통해 전파하게 하시니, 결국은 점술가로 죽임을 당하였으나 저의 일도 사역은 사역이었으려니. 애굽의 바로도 주가 세우신 종이라 하시는데. 나는 가끔 전해 듣는 어떤 사역자들의 말로를 보며 오금이 저린다. 팽생을 저는 목사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말씀을 전하던 자였다. 한데 노년에 교회 공금을 착복하여 교도소도 갔다 오고 지금도 도망자로 산다고 하니. 또 누구는 평생을 바쳐 전하였던 복음을 스스로 부정하며, 무슨 피복음이 어떻고 하는 이단에 빠지기도 하고. 또 누구는 스스로 먹고 사는 일에 매진하여 목사나 사모가 다단계에 함몰되어 결국은 구차한 신세로 전락하기도 하고. 저들을 말로(末路)가 비참하고 구차하여 나는 더 두렵다.
주가 세우신 바로는 쓸모를 다하자 홍해에 수장되었다. 점술가로 발람은 칼에 죽었다. 나의 두려움이 새삼스러운가? 오히려 나의 두려움이 정상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주 앞에 엎드리는 것, 나름은 좋은 취지(?)로 주의 뜻을 앞세워 하는 일이 우리를 속일 때가 많다. 누구는 평생 주의 일에 쓴다며 기를 쓰고 돈을 모아 노년에 어떤 이상적인 주의 마을을 꿈꾸었는데, 오히려 주의 종들의 사심과 탐욕에 모두 털리듯 빼앗기고 어디 저기 뒷방으로나 물러난 신세가 되었다고 하고. 그러니 주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특히 사역이랍시고 주의 일 운운하며 스스로 덤비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그 경로가 뻔하다. 노인이 된 늙은 목사는 어디 대형할인마트에서 잡일을 하며 한 푼이라도 벌어 하루하루 연명을 한다. 왜들 비참하게 된 것일까? 그래서 일찍이 바울 사도는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절대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부르심은 어쩔 수 없이라도 끌려오는 것이지 룰루랄라 산보 가는 길이 아니다.
목사가 장난인가? 마치 내가 어떤 확신으로, 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현실에 따라, 이치에 맞게,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을 떠받들려는 시도다. 발람도 주의 일을 했다! 장차 오실 메시야도 전했다! 부디 정신 차리시라. 안일함으로 게임에나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에게 육신도 돌보지 않아 당뇨에 우울감에 심각한 자기혐오로 도착되었으면서 전혀 문제의식이 없다.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예의도, 자식에 대한 기도도, 성경적인 가르침도 없는 목사가 교회에서 무얼 전할까? 성도들은 어찌 대할까? 대체 무얼 내팽개치고 사는 것일까? 겁도 없나? 나도 모르게 툭, 하고 튀어나오는 말로 되묻기도 하였다. 죽기 살기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시원찮을 판에 게임질에 미쳐 날로 피폐해지는 아내나 강퍅해지는 아들은 아랑곳도 않으면서. 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읽고 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결국 성령이 우리 영혼을 주도하셔야 한다. 그런데 통로가 막힌 것은, 그야말로 현대판 발람과 같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기술이 있다. 마술과 같이 저들의 적당함이 저들로 간절하지 못하게 한다. 점술과 같이 등 비빌 데가 있어 그 나이에 그 부모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요구하고 필요에 따라 억지를 쓰기도 한다. 자라지 못한 아이가 거구가 되어 어른이 되었다. 도무지 무절제하다. 흩어져 있는 삶이 문제다. 내키는 대로 산다. 하고 싶은대로 한다. 그때마다 어지러울 따름이다. 것도 피해가면 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고, 하고 싶은 것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의 일이라니! 무절제한 삶으로는 몸도 마음도 아둔할 뿐이다. 지금 저의 몸은 거구(巨軀)다. 아직 젊은데 방치하는 몸은 하나님께 데한 모독이다. 죄의 증거란 건강을 돌보지 않는 데서도 나타난다. 엄히 말씀하시길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너희 몸' 하고 정확히 지칭하였다. 이를 ‘창녀의 지체’로 만든다는 것은, '원하는대로', '바라는대로' 사는 꼴이다.
하다못해 안 믿는 자들도 백세시대를 운운하며 체력을 관리하고 건강을 돌본다. 하다못해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도 주신 생명을 다하기까지 이 엄동설한에 볕을 좇고 자신의 활동을 최대한 비축하느라 등껍질이 다 벗겨졌다. 혹은 추위를 견디며 수액을 최대한 아끼느라 스스로 가지를 말라 떨어뜨리기도 한다. 오늘의 발람도 자신의 뜻대로 주의 일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모압 왕 발락의 요구대로 그 일을 수행했다. 사람보고, 돈 보고, 훗날을 모색하며, 주의 일을 스스로 꾀하는 사역은 모두 두려운 일이다. 재물을 탐하고 알량한 사람들의 환심에 우쭐하면서,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 주의 백성들을 저주하려는데 축복이 나온다! 저의 요구대로 하나님은 내버려두시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성경의 여러 인물 가운데 발람보다 못한 오늘 우리의 사역에 경각심을 준다. 사역자로 사는 게 만만한가? 나귀도 보는 것을 저는 보지 못하고, 나귀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을 저는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모르겠다, 나는. 누가 다녀가면 나는 늘 다음 날 묵상글을 쓸 때 말없음표(…)만 는다. 말줄임표(……)는 그래도 뒤에 이을 말이라도 남았다는 소린데, 말없음표는 마침표를 찍기는 찍어야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기는 바라는데…. 늦은 시간에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친구가 교회 계좌번호를 물으며, 계속 나중에, 나중에 하고 미루려니까 끝도 없다며 얼마라도 있을 때 감사헌금을 드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저가 날 보고 주려는 것이겠나? 저의 이런저런 사연은 입이 닳도록 말로 옮겨도 끝이 없다. 내가 아는 내 주변의 불행한 사람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경우를 꼽으라면 저 친구의 사연이다. 그런데 감사헌금이라니! 미천한 사람을 친구가 아닌 주의 사역자로, 보잘것없는 교회이나 주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갸륵하여 가슴이 저렸다.
누구에게는 곳간에 곡식이 썩어나는데도 먹을 게 없다고 신세타령하다 죽을 판인데! 나는 종종 누구의 한탄에 하도 기가차면 ‘사지육신 멀쩡한 것이!’ 하고, 저의 멀쩡한 몸뚱이를 두고 뭐라 나무란다. 누구는 정신과 약물 과용으로 지능이 떨어져 어른아이 수준으로 살면서도 말씀을 필사하기를 하루에 네 장씩, 일곱 장씩 한다. 아침에 출근하여 오전근무만 하는 특수근로자이나 그의 열심은 예배다. 오늘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알고 대답하는지, 모르고 대답하는지… 감사하죠! 은혜롭고 좋았어요! 한다. 때론 저의 언어구사능력이 저의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 것을 알 것 같다. 누군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도 감사가 넘치고, 저의 십일조와 헌금이 넘친다. 그런데 가만보면 할 건 다 하면서, 가질 건 다 가지고 살면서 늘 돈타령, 그러니 어려우면 가장 먼저 깎는 게 헌금이고 그때마다 생략하는 게 십일조다. 여러 변명과 핑계가 있을 수 있겠으나, 발락의 꾐에 얼씨구나 하는 발람을 보는 것도 같다.
나는 발람의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는다. 특히 ‘스스로 사역의 길을 택한 자’와 ‘부르심에 끝내 끌려가는 신세 같으나 순종하는 자’의 차이는 엄연히 다르다. 먼저는 그 절박함의 결이 다르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 그의 결말도 다를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정작 이길 마음이 없이 변명만 늘어놓으니, 어쩌겠나? 누구 이야기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관심이 온통 게임에 가 있으니, 전략을 짜고 전술을 그린 지도가 옆에 수두룩하단다. 사역자로 주의 길을 가면서 말씀을 그리 연구하고 메모하고 설교원고로 작성하기는 하는지?!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6-27).”
보자, 저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향방 없이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싸우기를 허공을 치듯 하고 있지 않나? 바울은 행여 자신도 그럴까 하여,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누가 일러주면 들리기는 하나? 하다못해 나귀새끼도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두려움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막대기질도 참아내는데? 차마 내가 할 소리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는 저에게 차라리 사역을 그만두지 그래!? 하고 감히 말하였다. 이 글을 읽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사모를 생각하면 안 됐고, 속상하고, 답답하다. 그 속이야 오죽할까만, 그러니 날마다 눈물로 호소하는데 난들 어찌 해줄 수가 있나? 부디 그 눈물이 신세한탄으로 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저도 그런데 덩달아 같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달려가기를 ‘향방 없이 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듯> 하고 있으니, 뭐라 한들. 저이는 늘 부산하고 번잡스럽다. 같이 대화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오만 군데서 알림이 온다. 전화가 들어온다. 대부분이 광고다. 쓸데없는 알림이라고 한다. 다 좀 지우고 정리하지! 하고 말해주어도, 그게 어렵다.
오죽하니 나는 카톡에 적힌 이름이 단촐하다. 수백 명은 숨김으로 몰아두었다. 일이년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경우다. 전화번호도 가끔씩 정리하는데, 몇 년째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인물은 삭제한다. 너무 널린 게 많고, 너저분하면 들고나는 데 걸림이 되는 건 당연하다. 누구 문제, 누구 문제, 누구 문제가 아니라 '나로 너' 네가 문제다! 면전에서 그리 일갈했다. 이 말을 저이는 심각하게 들었을까? 농담으로 들었을까? 안 입고, 안 쓰는 옷이니 물건이 몇 년째 처박혀 있으면 버려라, ‘아름다운 가게’를 소개하고 거기에다 갖다 주면 그나마 형편이 안 되는 이들에게 헐값에라도 가져다 쓴다! 하고 매번 같은 소리다.
우리에게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무슨 마술 같은 게 아니다.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게 점술에 의한 자기 기술적인 언변으로가 아니다.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란, 우리의 일상에서다. 일상을 질서 있게, 허공을 휘젓는 싸움이나 향방 없이 바쁘고 부산스러운 삶으로는 이 길을 갈 수 없다. 단언하건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길을 택한 게 아니다. 주의 부르심에 확신이 없다면 부디 그만두시고 자기 몸이라도 제대로 챙기시라. 주가 주신 생명, 하다못해 나무나 새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살아서 생을 다하는 날까지 사투를 다해 겨울을 나고 새봄을 기다리는데…… 나는 가끔 길을 걷다, 등껍질이 다 벗겨진 길가의 양버즘나무 앞에 선다. 한참을 숨을 고르듯 뚫어져라 나무를 본다. 또는 나뭇가지 틈새 양지바른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비둘기나 참새를 보면 가만히 발길을 피해 저들의 일광욕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저 생명들도, 산 것은 살아서 그 생을 다하는 날 동안 충일하다. 하루가 성실하다.
한낱 생명도 이처럼 주신 생을 소중히 여기며 사력을 다하는데. 온 몸으로 겨울을 나고 새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그것도 주의 부르심을 운운하는 사역자로 산다면서! 어쩌고 어째? 그리 위세를 떠는 이가 눈 뜨기 무섭게 게임기 앞에 앉고, 종일 게임으로 집구석에 처박혀 있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맞다면 결코 전과 같이 그렇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차라리 눈을 뽑고, 다리와 팔을 잘라서라도 하나님의 일에 쓰신다. 천국 백성으로 삼으신다. 나는 솔직히 저이가 다녀가는 날이면, 배우는 게 참 많다. 공부하는 게 많다. 주를 바라는 마음이 새삼 더욱 간절하여진다. 나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보며 나를 쳐 복종하게 된다. 그야말로 큰 공부다. 저들은 나의 큰 스승이다. 발람은 막연해도 저들은 실제라, 말은 안 했지만 나의 이 안타까움이 비록 사소하고 보잘것없다 해도 부디 나의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부디 우리가 발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