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전봉석 2022. 2. 5. 05:41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민 25:18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하나님의 자녀를 죄에 굴복시키기 위한 역사는 끝이 없다. 발람이 결국 실패하자 이번에는 여자들을 내세워 꾀를 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6).” 당시는 성적으로 문란하였으며 이를 종교적으로도 활용하였다. 다산의 신을 기반으로 저들의 타락은 정당화하였다. 다산 신앙은 출산과 소출의 풍요를 기원한다. 이는 하나님 앞의 전면적인 죄악이다. 출산과 소출의 열매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은혜의 산물이다. 한데 이를 인위적으로 행사하는 데 있어 문화라는 위선과 쾌락이 육감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이는 결국 우상 숭배로 이어져 그와 같은 행사가 종교적인 행위로 미화되거나 포장되어 서로를 용인하였다. 이로 인해 염병이 시작되고,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 25:9).” 이는 당시의 미개했던 문화로 인한 게 아니다. 오늘 날의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버젓이 자행되는 일이다. 어쩌면 인류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러한 성적인 쾌락은 끝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한 이름이 있다. ‘미디안 여인 고스비’다.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15).” 고스비의 뜻은 사기와 거짓을 의미한다. 그 지역 방백의 딸이다. 상류사회에 속한 자였다.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18).” 그 유혹에 하나님의 백성들, 그 가운데 시므리가 넘어갔다. 저를 위시하여 성적인 타락은 순식간에 퍼졌고, 음행하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6-15). 시므리는 유다지파로 세라의 아들이다. “세라의 아들은 시므리와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라니 모두 다섯 사람이요(대상 2:6).” 후에 동방의 족속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을 백성으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시므리의 모든 왕과 엘람의 모든 왕과 메대의 모든 왕과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렘 25:25-26).”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타락하고 한 여자를 중심으로 많은 여자들이 음행에 가담하였다.

 

우리는 각자 개별적인 존재로 살아가지만 이는 계통이 있고 그 뒤를 이어 전가되는 죄의 유전도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우리는 좌절한다. 지금 그 아비의 행실이 자녀를 길들인다. 무의식적인 우리의 계통발생은 개체발생으로 이어져, ‘나’는 나 하나로 온전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는 내 아버지가 있고, 함께 했던 모든 사람의 습성이 있어 오늘의 ‘나’이다. 곧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그 성향도 성품도 달라지는 것과 같다. 이를 최인훈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나’라는 개체적 DNA는 수많은 DNA`로 연결되었다고 하였다. 곧

 

DNA=DNA`+DNA`+DNA`+……

 

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들어보면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였는데 결국 엄마처럼 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아빠처럼 되지 않을 거야!’ 하는데도 우리 성향과 기질 속에서 아빠와 다를 게 없는 성품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는 죄의 유전과도 같다. 그래서 주님은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하고 말씀하셨다. 이는 죄의 연속인 불변의 법칙과 같아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눅 6:43).” 그러니 오늘의 누구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내 안에는 내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죄의 굴레를 끊는 길은 하나뿐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런 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의 유전이 해당되지 않는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1-3).

 

이를 인정하고 주 앞에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 스스로도 스스로를 어찌할 길이 없다. 그럼 주께 자신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굳이 그러기 싫은 것은 죄의 쾌락이 달콤해서다. ‘훔쳐 먹는 사과가 맛있다.’ 세상은 그러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저들 가정이 더욱 궁핍하고 가난하여지기를.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귀히 여기던 것을 모두 내다 팔아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차마 그리 말하지는 못했으나, 우리의 적당함과 넉넉함이 우리 영혼을 그리 손상시켰다. 우유부단함은 싫은 감정의 또 다른 얼굴이다. 미적거리는 것도 싫다는 의사표시의 하나다. 가령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늦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가기 싫은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약속시간을 엄수하고 이를 철저히 요구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이는 무찌르고 이겨내야 할 일이지 자연스럽게 나아질 문제가 아니다. 보면 꼭 늦는 아이가 늦는다. 할 말이 많은 아이가 늘 핑계도 많다. 저를 나무라면 그 마음은 억울할 뿐이다.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저는 모른다.

 

앞서 시편의 말씀처럼 전능자의 그늘에 머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처음 누굴 만나고 같이 공부를 하든지, 대화를 하든지, 꾸준한 우리의 만남을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요구한다. 안 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마치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소릴 들을 때 나는 그냥 입을 다문다. 뭐라 일러줘도 들을 리 없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생긴 대로 산다.’고 어쩌겠나? 내가 주의 일을 하고 내가 주께로 간다고 여기는 한 이 일은 묘연하기만 하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어떤 감정이나 느낌, 심지어는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 이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내어드린다는 의미다. 맡겨둔 것을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맡기는 이는 곧 좀이 쑤셔 본전 생각이 날 뿐이다. 맡겨서 아예 드리면, 내가 아주 잊고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일일이 다 기억하신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27).” 하고 기억도 없는데,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가끔은 아이들을 대하면서 어른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이란 할 말이 참 많은 사람들이다. 스스로 한 게 많다. 문제는 그게 아닌데, 그러한 기억을 가져다가 자신을 억울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드시 끝은 있고, 그 결국은 엄연하여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7-18).”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귀를 울리는 듯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19).

 

다시 말해 우리가 어렵게, 억지로 하는데 하물며 안 믿는 자들의 처지가 어떠하겠나?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보장이 있다. 즉 모든 게 괜찮다는 음성이다. 누구의 어떤 처지를 두고 한참 힘들어하듯 어쩌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주를 생각함으로 모든 게 나을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5).

 

나는 누구의 어려운 소식에서 희망을 본다. 살림이 더 궁벽해지면 살 길이 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좀 더 아프고 고달파야 할 필요다. 말로 안 되는 것은 꾸지람과 징계뿐이다. 별 수 없다. 고집들 참 세다. 그러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잠 26:3).

 

이를 알고 베드로는 담대히 고백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그러니 오늘 내게 두신 이런저런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게 한다. 내가 나를 잘 안다. 누구도 말하였다. 자신이 어떨지, 그렇게 되면 어떠할지, 저도 잘 알고 있었다. 고로 그 안에서 나오는 감사가 진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나는 이제 이를 ‘고난이라 쓰고 복이라고 읽는다.’ 그러니 누굴 위해 기도해준다는 말, 그저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발람의 기도’밖에 안 된다. 결국 저가 꾀를 낸 것이 음행이었다! 기도로는 안 되니까 사람들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 든 것이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 31:16).” 즉 모든 게 주의 사역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 가운데, 그만두란 소린데… 목사를 그만두라고 해야 한다. 주의 사역을 그만두라고도 해줘야 한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5).”

 

이번 발람의 이야기에서 우린 우리 안의 참으로 교묘한 타협과 합리적인 술수를 보았다. 마치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스스로들 판단하지만, 할 게 없어 그 짓인 경우들도 많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가는 길도 아니고 안 가는 길도 아닌…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사명은,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누구 일로 내가 씨름하는 것이다. 답이 없다. 뭐라 해서 될 것도 아니다. 한데 저를 내 안에 두시고 나로 하여금 씨름하게 하시는 까닭은 그럼에도 권면하라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 내가 알리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 9:10).

 

결국 시인의 표현처럼,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하신 말씀이 응하여질 것이다. 누구는 필사적으로 새벽예배에 나간다. 목사가 못하고 있는 것을 두고 자신이 주 앞에 엎드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때도 저이는 게임을 하고 앉았다고 하니 속이 터질 만도 하겠다. 그러든가 말든가, 저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시라, 그리 이르고는 내내 덩달아 마음이 어려웠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안 되니까 주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니겠나? 사람들과 떠들고 누구에게 드러내어 눈물콧물 짠들 다 소용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고작 안타까워할 뿐, 정작은 나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덩달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부디 저 영혼을 주가 부르시고 세우신 게 맞다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6).

 

어제는 아이들과 글을 쓰면서, ‘세뱃돈’이란 주제로 십일조와 감사헌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뜨악한 아이들의 표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돈과 여자 앞에서는 장사 없다. 거기에 게임과 도박까지도 포함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미국 대통령이 된 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는 너무 가난하여 주일학교에서 늘 헌금시간이 제일 괴로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여 늘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아이가 어느 날은 날름 헌금바구니 위에 올라 앉아버렸다. 예배 후에 담임목사가 아이의 짓궂은 장난으로 알고 꾸짖으려는데 아이가 울며 말하였다. 자신은 너무 가난하여 드릴 돈이 없어서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라고 말이다. 뜨악했던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난 듯, 그럼 십일조를 어디에 드려요? 하고 누가 물었다. 나는 섬기는 교회를 말해주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세뱃돈을 많이 받은 아이는 그 금액이 많아서, 적게 많은 아이는 그 금액이 또 상대적으로 적어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온전한 십일조, 감사헌금으로 저의 신앙을 측정할 수 있다.

 

부득불 우리의 할 일은 무언가? 감사다. 감사가 없으면 죽은 영혼이라. 감사한다면서 빈손으로,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그 마음은 빈 마음이다. 마음만은… 보다 헛된 말도 없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게 감사였구나! 하는 것을 새삼 내가 공부하였다. 다음은 아이들이 어찌 행할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별 수 없다. 나 하나 바로 서는 게 중요한 시절이 되었다. 점점 말세가 가까워진다는 증거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 17:34).” 나중에 놀라 후회하고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35).” 우리가 누굴 위하나 이는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시 14:4-5).

 

당장은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