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 26:64-65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출애굽 40년 되는 해에 두 번째 대대적인 인구조사가 이루어진다. 앞서 싯딤에서의 음행과 불순종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뒤였다. 51절에 보면 계수된 숫자는,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된 자가 육십만 천칠백삼십 명이었더라.” 첫 번째 인구조사 때,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1:46).” 천팔백이십 명이 감소하였다. 400여년의 애굽생활에서 어머어마한 인구 증가를 보였던 것에 비하면 40년의 광야생활에서의 감소는 의아하다.
이번에 이루어진 인구조사는 곧 들어갈 가나안의 땅의 분배와 그 땅을 차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54-55).” 이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앞서 그 준비와 계획에 따른 정리정돈이 얼마나 분명한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저 기업의 땅은 싸워서 각 지파가 차지해야 한다. 믿음으로 얻는데 있어 수고도 길쌈도 없이 얻는 곳이 아니다. 이 원리는 고스란히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도 적용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그러므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심음과 거둠의 원리와 같아서 우리가 주의 일을 맡은 자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사역이다. 곧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알지 못하고 순종하는 평신도보다 나름 소명을 받고 많이 배우고 익혀 안다고 하는 자의 경우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곧 오늘 본문에서 계수한 자들은 광야에서 새로 나고 자란 세대들로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 고라의 자손에 대한 말씀을 주목하게 된다. 당시 “엘리압의 아들은 느무엘과 다단과 아비람이라 이 다단과 아비람은 회중 가운데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니 고라의 무리에 들어가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여호와께 반역할 때에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9-10).” 모두 죽임을 당한 것 같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11).”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세워 성전에서 찬송 맡는 자들로 삼으셨다. 시편에도 고라의 시, 그 자손의 마스길이 여러 편 있다(41, 44-49, 84-85, 87). 그 가운데 46편의 시는 주옥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1-3).
앞서 그 조상과 함께 주께 반역하여 당한 일을 저들은 상기하였다. 실은 우리 안의 두려움이 우리로 곧은 자세를 잃지 않게 한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며 살았던 것과 노아가 120년을 묵묵히 방주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므두셀라가 죽을 때에 세상이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알아기 때문이다. 그의 라멕의 악명은 익히 유명하다. 저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 5:29).” 곧 므두셀라가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는데(969세), 그의 아들 라멕이 먼저 죽고(777세), 그의 손자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는 것을 보았고, 결국은 저가 죽는 날에 방주 문이 닫히고, 홍수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곧 ‘에녹의 동행’과 ‘노아의 순종’과 ‘아브라함의 떠남’은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이를 듣고 두려워할 줄 알고 준행한 것으로 그 연관이 이어졌다. 오늘 일련의 사태를 보며,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현실의 이런저런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복되고 볼 수 있는 눈이 귀하다. 롯의 사위들과 같이 농담으로나 듣는 것에 대하여는 뭐라 이를 말이 없다.
이와 같은 주의 권하심, 말씀은 우리로 부담을 준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그럴까?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결국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 알아야 하고, 앎으로 행할 것을 행한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운데서 행하는 일이겠으나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부담과 회의, 어떤 갈등에도 굴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고대의 에녹이나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주의 말씀에 순종한 게 아니다. 아들이며 조부이고, 증조부가 되는 므두셀라를 기점으로 서로는 연결된다. 아브라함이 우루를 떠날 때 노아는 죽었다. 서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앎으로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겁 없이 살던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부담이 된다. 때론 부당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어쩌면 이를 두고 비난할 수 있다. 너무 광적으로 그러는 게 아닌가싶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 목회를 꿈꾸고 목사를 직업군의 하나로 선택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이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으로만 일하신다. 하여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2-23).”
이와 같은 바울의 고백이 그 표본이다. 하나님의 일은 매번 그럼 성공하는가?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행 17:32-33).” 모두에게 환영 받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대놓고 이를 알게 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곧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에녹의 동행과 노아의 수고와 아브라함의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남은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는 어리석고 이상하고 미친 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기껏 잘 살며 이제 벌써 노인이 된 75세의 나이에 말씀만 듣고 갈 곳도 모르면서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다니?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햇살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 때에 홍수가 올 것이라고 매일 같이 방주를 짓느라 애쓰고 수고하는 노인 노아의 모습이라니! 묵묵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에녹의 삶은 또 어떠했을까? 당시에도 오늘에도 세상은 참으로 즐겁기만 한 것 같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이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홀가분한 삶인가? 요즘은 ‘꼰대’란 소리가 뒤지고 모자라 현대 감각이 없는 잔소리꾼으로 취급당하는데, 언제부턴가 나무라고 야단쳐줄 어른이 사라지는 시대다. 격식과 관습은 고리타분해졌다. 결혼이니 순결이니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절은 비틀어지고 변형되어, 부대자루를 가져가 명품 로고를 붙이면 이게 유행이 된다. 동거는 자연스럽고 서너명이 같이 즐기는 난교(亂交)는 예사가 되었다. 민망한 옷차림과 서로 엉겨 막말을 일삼는 일은 친분을 과시하고 자유로운 삶을 표방한다. 이것이 오늘 날의 현상이 아니었다는 것,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였다. 나름의 여러 문화가 이뤄지고,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이는 음녀로 지칭되는 사교와 문명을 뜻한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을 대로 살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두려워할 줄 모를 때 복음도 의미가 없다. 복음을 복음으로 받지 못할 때, 실패는 낙오와 도태의 표상이 된다. 그러나 말씀은 일러, 실패가 끝은 아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3, 24-25).”
견디지 못하면 타협한다. 타협한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6:24-25).” 이를 보면서 우리의 이해와 받아들임은 지식으로도 경륜으로도 아니라 주의 영으로다. 성령으로밖에는 우리로 옳은 길을 가게 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이상과 명분으로, 자기 확신으로는 어림없는 길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
곧 우리의 목적은 복음이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 구원을 주도하신 말씀으로다. 엄연히 사역자라면 그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4).
오늘 이를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인구조사를 하며 새로이 그 구성원과 역할을 점검하는 것으로도 보면 알 수 있다. 영적으로 가나안은 천국이면서 동시에 성도로서 사는 삶의 실제다. 날마다 전쟁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다. 차지하는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마 5:21-22).” 그리고는 뒤에 이어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안이함에 대한 결과로는,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28).” 하시며 이르신 말씀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9).
이 의미가 어쩌면 오늘 본문은 물론 모든 성경을 관통하는 복의 핵심구조가 아닐까? 늘어져 안이하고, 뭉그적거리며 나른한 종의 것을 빼앗아, 할 의욕이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원리다. 그러니 나는 가끔 나의 어린 동기들의 나른함과 뭉그적거림을 보면 내가 두렵다. 나처럼 나이 들어 뒤늦게 후회하며 주의 길을 갈까봐서 말이다. 아니면 저러다 영영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길까 하여… 공교롭게도 내가 아는 몇몇은 이 길에서 벗어났다. 목사로 교회를 일구어가던 이가 현실의 어려움에 결국 자식들 먼저 건사하느라, 친구 정육점에서 일을 하면서 목회를 하려다 목회를 접고 장사꾼이 되었다. 누구는 살 궁리와 선교를 합쳐 사업자 같은 선교사로 중국을 드나들더니 목회는 접고 보따리상이 되었다. 누구는 이상적으로 목사라는 사명을 직업으로 꿈꾸며 다시 시작하였다가 이내 현실과 다른 것을 피부로 느끼고는 도로 평신도로 살아간다. 저는 결국 사역을 그만두고 다른 교회(자신을 모르는)에서 평신도로 교회만 출석하는 성도가 되었다. 저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런저런 사정이야, 이해를 못하겠나만!
분명히 주의 부르심은 부담스럽고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닌 이 일을 두고, 바울이 강하게 붙들었던 것은 실제 저가 두려워할 줄 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2, 3).” 우리는 사람이라, 당장의 현실에서 왜 흔들림이 없겠나? 에녹이라고 그저 의연하기만 했을까? 노아는 120년 동안 한 번도 회의하고 갈등하지 않고 방주를 지었을까? 아브라함은 갈 곳도 모르고 가는 길에 과연 두려움이 없었을까? 성경의 어느 인물도 의연하고 의젓하게 흠과 티도 없이 주의 사명을 붙들고 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저들이 결국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것은, 약속으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결국 이 길을 오늘 우리만 걷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1:39-40)." 그러니 우리의 일은 죽어라 하고 믿고 맡기는 것이다. 맡김은 드림이고 드려짐은 결국 거룩이 된다. 사람은 사람이라, 수시로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 어려움 앞에서 돌이켜 갈등하겠으나, 그럼에도 주를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고라의 자손은 저들의 조상의 비참한 결국으로 큰 교훈을 얻었으니, '마스길' 즉 저들의 교훈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시 44:1-2).
저들은 들었고, 알았고, 이를 묵상하였고, 신뢰함으로 잊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되새겼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
(45:1-2).
이에 오늘 시편도 묻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1, 4,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