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민 27:5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아직 현실이 아닌, 들어가 차지하지도 않은 땅을 두고 므낫세자손 슬라브핫의 딸들은 자신들 몫의 땅을 요구한다. 이는 모두 장차 약속한 것만을 믿고 서로 나누고, 주고받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문제로 당장 취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씨름하는 셈이다. 이를 또 모세는 모두 하나님께 고한다. 거기에 하나님은 그에 따른 답을 주신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약속을 두고 이를 요구하고 답을 얻는 모습에서 새삼 우리 믿음의 실제를 알겠다. “모세가 그들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다.”
개미에게는 미래를 보고 느끼는 눈과 감각이 있다고 한다.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는 현실에 만족한다. 개미는 미래를 준비한다. 꽃중에도 아비요나라 하는 꽃이 있는데 저녁에 피어나서 아침에 해가 뜨면 진다. 꽃도 한 번 피우고 다른 날에는 다른 꽃을 피운다. 꽃이 피는 시기도 모든 꽃들이 피어나는 우기철에는 시들었다가 모든 대지가 타들어가는 건기에 흰 꽃을 피운다. 건조하고 메마른 4월에서 10월의 사막에 아비요나가 핀다. 아비요나의 히브리어로는 정욕(desire)으로 해석되어,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전 12:5).” 정욕이 그치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아비요나는 질긴 생명력과 단단한 뿌리로 히브리어 이름 ‘짤라프’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슬라브핫의 슬로브(짤라프)+핫(하드)의 합성어로 ‘날카로운 가시’ 짤라브(가시)+하드(날카로운)의 합성어 짤라프하드라고도 부른다.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라 그 딸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니(민 26:33).” 곧 “마길은 훕빔과 숩빔의 누이 마아가라 하는 이에게 장가 들었더라 므낫세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슬로브핫이니 슬로브핫은 딸들만 낳았으며(대상 7:15).” 오늘 본문에서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민 27:3).” 여기서 자기 죄는 안식일을 범한 사건이다(15장). 그때 나무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자기 죄로 죽은’ 슬라브핫을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2).” 이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5).”
그럼에도 아비요나 꽃과 같이 그들의 딸이 장차 받을 가나안 땅의 몫의 요구하고,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여기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저들의 몫을 정하여 주시는 본문이 매우 인상적이다. 현재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가나안 땅을 두고 오가는 이야기이다. 가장 질긴 민족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생명력 있는 동물로는 염소, 새로는 비둘기, 식물로는 아비요나를 꼽는데 이들은 모두 바위틈 낭떠러지에서도 굳건하게 그 몫의 생을 다한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2:14).
현실은 암울하다. 당장의 일로 모두가 고통 중에 두려워한다. 그런데 우리를 붙드는 것은 장래의 일, 택정하심을 받은 자로서의 생명력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바울은 누구보다 이를 악착같이 붙들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복음의 생명력은 숱한 세파에도 오늘까지 건재하다. 곧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3-4).” 곧 우리가 붙드는 복음은 바로 이것,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시 7:1-2).
우리가 주께 아뢰고 고하며 붙들려 있는, 마치 아비요나의 뿌리처럼 강인하다. 그 꽃과 줄기가 다 뜯겨나간다 해도 뿌리만큼은 깊숙이 박혀 어느 일정 시간이 되면 다시 줄기가 자라고 건기에 되레 꽃을 피우며 생명력을 나타낸다. 곧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마치 저들이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상상 속의 약속의 땅을 두고 자기 몫의 땅을 요구하는 슬라브핫의 딸들처럼,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민 27:4).” 저들의 그와 같은 ‘당연한 요구’에서 새삼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강인한 뿌리의 끝을 보는 것 같다. 이에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5).” 그리고 주는 응답하신다.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7).”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돼도 않을 말처럼 복음을 전하였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도래였다. 저가 곧 이 땅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실 것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로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실 것을 누차 예언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곧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 아비요나 꽃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에 사울이던 자가 보내심을 받음으로 바울이 되어 그 사명을 다하는 데 있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곧 오늘 우리의 생명력은 이 땅에서의 살고 죽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베짱이의 하루와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미련하고 억척스러운 개미와 같아서 그 뜨거운 땡볕에서도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생명력처럼,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땅 약속의 가상 가나안 땅의 몫의 요구하는 슬라브핫의 딸들처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민 27:12).” 반드시 있다. 그날은 온다.
모세를 대신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8).”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게 하신다. 이에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22-23).” 때론 이와 같은 이야기에서 상대하기 어려운 여백을 느낀다. 이는 채워진 내용보다 빈자리로 남겨두시는 묵상의 공간이다. 정작 모세는 들어가지 못할 땅이다. 그러니 그 땅은 장차 얻을 눈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들어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다. 이에 모세는 미래 너머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봄으로 깊이 박힌 뿌리만으로도 그 생명력은 여전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 스스로의 목회를 꿈꾸거나 이를 실천하려는 베짱이 같은 이가 있고, 당장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 같이 수고만 있으나 장차 예비하신 날들을 두고 묵묵히 주신 바 한 날의 생을 그 이상으로 일구어가는 목회도 있다. 때론 아무런 성과도 없다.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강권하심이 부담스럽다. 고통스럽고 회피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조용한 목회를 꿈꾸기도 하고, 뭔가 이상적인-자기만족을 우선으로 하는 목회를 지향하기도 한다. 하나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나는 이 말씀으로 오늘의 나의 나 됨을 이해한다.
나도 바울과 같이 세 번, 그 이상을 구하고 바라며 건강을 또는 담대함을 바라였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도 동일하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내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라! 그것이 무얼까? 하고 생각하다 상한 심령들이 찾아온다. 누구에게 말 못할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겉으로는 멀쩡한 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성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안고 혼자 씨름한다. 남들이 차마 알까봐서 자신의 병명을 숨기고 산다. 이를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래서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이다. 이는 그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다. 아내의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은 여느 아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아, 이 또한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의 형편을 허용하신다. 때론 어려움도 쪼들리는 생활도 그리 두신다. 이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하는 바울의 이해를 나도 이제 이해할 것 같다(고전 9:22-23). 이게 만일 내가 임의로 하는 일이라면, 이런 목회를 꿈꾸었겠나? 겉으로는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 같으나, 나는 나의 어쩔 수 없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한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 먼저 주 앞에 온전하게 하시려고,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4).” 묵묵히 또한 무던히 주신 바 나의 나 되 것으로 주의 일을 수행하게 하심이었다. 내가 나인 것은 나로 하여금 주의 일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었으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한 걸음, 한 발짝 때론 그 보폭으로도 족한 일이 있다. 누구에게는 한두 개의 층계가 낭떠러지보다 위협적인데, 저들의 아픔을 알아줄 이가 없으니 때론 나에게… 그리하여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확신이 우리의 깊숙한 뿌리가 아니겠나? 때론 죽은 듯 시들어 모든 게 끝장난 것 같은 때에도,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이 놀라운 확신으로 아비요나는 다들 잠든 어둠 가운데 꽃을 피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마을을 비추는 등불이다. 오늘 나는 오늘만 보는가? 오늘 그 너머 내일을 보는가? 아니, 그 너머 너머의 영원한 나라를 보는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그것으로 우리는 꽃을 피우는 아비요나의 흰 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5:14).” 하여 저 한 영혼이 주 앞에 인도되는 것이겠으니,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 16:1-2).
다른 무엇으로 붙들까?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3).
그러므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6,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