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전봉석 2022. 2. 8. 05:17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민 28:31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4

 

 

출애굽을 기념하여 주께 감사드리는 민족 해방의 날로서의 유월절(16-25). 처음 익은 열매로 주께 감사하는 칠칠절(26-31). 이와 같이 날마다 감사로 번제물을 드리고(1-8), 안식일을 반드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며(9-10), 초하루를 엄숙히 여겨 이를 기념하는 것(11-15) 등. 율법의 말씀을 받고 이를 기념하는 날로 죄의 덫에서 놓여나 천국생활을 누리는 기쁨을 기념하는 맥추절과 광야 40년의 생활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들판에 움막을 짓고 일주일씩 머물며 이를 상기하는 초막절이 있다.

 

이는 약속의 땅에서 드려질 예배의 종류이고 절차이다. 정한 시기에 드리며(1-2),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며(2, 6, 8, 13, 24, 27), ‘향기로운 화제’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의미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곧 우리가 드리는 선교헌금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또한 오늘 말씀에서는 거룩한 곳에서 드려져야 할 예배를 알게 한다.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민 28:7).” 한데 어쩌면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영상이나 TV 등 줌으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과연 자신이 집에서 핸드폰이나 TV로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얼마나 정결한 마음으로 임할지. 일련의 사태로 우리로 우리의 예배와 드려지는 삶의 자세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과연,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5).

 

하는 시인의 고백과 같은 삶이 가능한지. 특히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사람들이 갈리고 정치가 진영논리에 휩싸여 요동을 치는 이때에, 전염병의 창궐함과 사람들의 자기 판단이 서로 맞물려 주 앞에 온전한 자세로의 삶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경은 엄히 일러 주권자를 하나님이 내시고 이를 치리하고 다스리게 하심을 바로하신다. 그러나 절대 재판장,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누구를 세우시든 저를 사람들은 민심이라 하나 우리 믿는 자들은 주의 섭리로 안다. 할 때 불의한 모든 정치와 권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응징하신다.

 

며칠 나의 마음은 어려움으로 질식하는 줄 알았다. 명절에 모였던 가족들이 모두 오미크론 양성 판정을 받았다. 현재까지 위중하거나 중증환자로 신음하지는 않으나 그 고통이 독한 몸살감기를 앓는 듯하다고 하니, 이래저래 감사한 것과 우려하는 마음이 동시에 인다. 남의 이야기로만 듣다 실제 우리 모두의 일이 되면서 그 해석은 전혀 다른 의미로 새롭다. 우리 가족은 이번 설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줌으로나 그 만남을 대신한 터라, 한편으론 다행이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더 어렵기도 하다. 한데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 그 의미의 새삼스러움에 놀랐다.

 

우선은 아내가 겁을 먹고(?) 이번 한 주간 친정에 올라가지 않으면서 오전마다 성경공부를 시켜달라고 한 것이다. 성경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며 그 맥을 잡고 싶다는 것인데, 설 연휴 때 집에서 본 영화 <천로역정>에서 행여 자신이 그 집에 남겨진 채 천성으로 향하여 간 크리스천과 달리 남겨진 가족으로 자신이 중첩됐던 모양이다. 여태 살면서 먼저 성경을 알려달라고 하고 하니 것도 신기하고, 맞춤하니 또 이번 주간은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목요일에 오는 이가 오지 못하여 시간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 혹은 우리 안의 두려움이 우리로 성령의 역사를 알게 한다. ‘어찌할꼬?!’ 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더욱 간절함으로 주 앞에 나아오게 된 것 같이 말이다. 이에,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 82:1).

 

여기서 신들은 이 땅의 주권자들이며 권세 잡은 자들의 총칭이다. 이에 대해 성경의 기본자세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특히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대선구도의 정국에서 누가 누구를, 어느 정당을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어떤 이든지 하나님이 세우실 것임을 분별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한 표를 행사할 때 그 기준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1).” 하는 말씀과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저 당사자나 그 정당의 정책을 보고 판단하되, 하나님의 마음을 우선으로 읽어야 한다. 늘 그렇지만 나서는 자들은 하나 같이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친 놈’들 같아서 환멸과 우려가 먼저 일지만 그럼에도 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중에 덜 나쁜 놈, 덜 이상한 놈, 덜 미친 놈을 찾아야 한다. 특히 무속적인 미신 따위에 휘둘리거나 주체성 없이 자기 잘난 맛에 나서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시 82:2).

 

더욱이 사회적인 약자, 어려운 처지의 입장을 대변하고 돌보는 일에 우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중심 사명이기도 하다. 더 나은 사람, 훌륭하여, 일명 고생이라고는 하고 자라지 않은 이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알 리 없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자신이 어두운 가운데서 자랐는가를 아는 사람이 그 처지를 또한 이해한다. 이를 명심하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3-4).

 

이는 사명 맡은 자의 기본이다. 우리의 사명도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마음이 가는 곳이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교적이고 높은 위신과 체면으로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역자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의 옷 값으로 그를 우선 판단하는 편이다. 목사가, 사회 지도층의 인사가 수십 수백만 원짜리 옷을 걸치고 있다면. 글쎄, 나는 그것이 선히 여겨지지 않는다. 타고 다니는 차나 경호인력 등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개인적인 씀씀이로 그 사람의 됨됨이는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어느 유명한 상담가의 옷 값으로 더 이상 그녀를 좋게 보지 못하겠다. 물론 능력껏 자기 기준에 맞게 사는 게 자본주의의 생리라지만 한 벌에 수백, 수천 하는 것을 입고 아픔을 토로하는 아이의 또는 누구의 마음을 어르고 위로한다는 게 나는 왠지. 주를 사랑한다면서 권력과 사회적 위신을 우선한다면 그런 목사는, 글쎄. 저의 기호나 취향으로 저가 얼마나 저에게 맡기신 이의 뜻을 바로 아는가 하는 가늠쇠가 된다. 분명히 성경은,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 146:9).

 

하물며 주의 일을 맡은 자로서, 이는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예로써도 알 수 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러니 우리가 지도자를 뽑을 때 저의 가진 정도, 축척한 부의 정도로도 대충 감이 온다. 저가 누리며 사는 세상이랑 저가 다스리겠다고 하는 세상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선거철마다 쏟아지는 온갖 공약이 왜 빈말로 그치는가 알 수 있다. 저들로서는 정작 가난을 알지 못한다. 어둡고 소외된 자의 삶을 알지 못한다. 탁상공론으로는 누군들 성인이 못될까? 가난하게 살라는 소리가 아니다. 재산이 많다고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의 씀씀이다. 그 대표적인 게 저의 옷차림이나 시계, 신발 정도면 충분하게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복지나 의료 체계는 소위 좌파니 빨갱이니 하고 매도하는 자들의 피와 눈물의 결실이다. 실제 그 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이 권력의 총 칼에 맞서, 압제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길에서 일구어낸 결실이다. 가령 내가 오늘 받는 장애인 편의도 실제 그들이 길거리에서 뒹굴고 싸워서 얻어낸 결실의 혜택이다. 이를 모두 자신들의 공로로 치부하지만 정작 공공의료기관을 없애고,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돈 있는 자들과의 결탁으로 민간의료를 이루려던 자들이 이번 코로나 대유행 때 그 부끄러움을 좀 알기는 했을까? 그 잘난 미국도 수천 수만 명이 피씨알 검사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들이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에 돌며 서민의 삶을 운운하며 뉴스에 나오는 게 나는 역겹다. 저러다 또 선거가 끝나면 선진국 어디, 미국이나 캐나다로 떠나 자신들의 세상에서 살 것 아닌가? 대체 우리가 신앙적으로 무엇을 기준을 판단해야 할까?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맡은 자는 누구도 자신을 기쁘게 하려 살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 82:5.).

 

고로 하나님은 그때에 적합한 인간을 세워 공의를 실현하신다. 때론 저가 애굽의 바로일 수 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일 수 있고, 고레스일 때도 있다. 저들은 필요에 따라 쓰임을 다할 뿐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6-7).

 

사람은 사람이라, 그가 어떠하든지 사람이다. 누가 누구더러 성자라 하고 성인으로 추대하고 저를 떠받들고, 심지어는 그 앞에 절을 하며 우상화하는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이다. 우상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우선하는 무엇이다. 존경과 존엄은 다르다. 아무리 훌륭해도 바울은 바울이고 베드로는 베드로다. 저들이 나의 구주는 아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신 16:18).” 그와 같이 저들도 우리를 위해 주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여 이를 기록하게 하신 이들이나 그리하여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는 아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곧 우리의 상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반드시 이 땅의 권력에 대하여는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이를 알면서도 대통령이 되고 무슨 장관이 된다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 그 어떤 죄악과도 결탁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렵다. 대표적으로 지혜의 왕 솔로몬의 경우가 그렇다. 저의 통치는 훌륭했다. 주변국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다. 가장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절이다. 한데 이를 위해 저가 결탁했던 죄악은 결국 자신의 나라를 분열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우상을 끌어들였고, 이를 허용하였다. 그러니 세상 그 누군들 사람이 다르리는 나라는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주의 일을 맡은 사역자로 산다는 일에서 ‘오직 복음’을 위한 삶으로는 더더욱 자신을 드려 맡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생뚱맞은 ‘아내의 부탁’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였다. 그리고 어제는 그 첫째 날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저들의 순종과 불신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였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누가 누굴 가르치고 다스리고 이를 통치한다는 일은 다 같이 겁나는 일이다. 단지 이 일은 일이 아니다. 직업이 아니다. 지식으로도 아니다. 우리가 주의 마음으로라 함은 ‘종말론적 심판의 공의’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삶으로다. 사고하고 판단하고 이를 실현하는 일은 성경으로다. 기준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린다. 시편은 이를 큰 소리로 외치는 것 같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 82:8).

 

단지 이 땅에서 유한한 삶의 정도로도 저처럼 치열한데, 그 고작 임기 5년을 위해서, 그 인생 고작 강건하면 70이요, 80인 것을 두고 그처럼 기를 쓰고 사는데,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오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하루가 더 하루 허락됨은 주의 긍휼하심으로의 정의를 위해서이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이를 두려워할 때, 순수한 나의 아내의 두려움처럼 우리 안에는 '이를 어쩌면 좋지?' 하는 경건한 두려움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다. 어제는 아들이 저녁을 알아서 먹고 공부를 더하겠다고 하여, 아내와 둘이서만 식사를 하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러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나눈 이야기는 우리의 날들을 두고 주가 베푸신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였다. 오늘 본문에서도 저들이 유월절을 기억하고 초막절을 통해 광야 40년의 생활을 자자손손에게 상기시키며 이를 기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은혜가 더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은혜가 멀면 남의 고개를 누른다. 주의 사랑을 알면 입을 다문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복이다. 부모님과 누나네와 동생네를 수시로 통화하며 좀 어떤가 하고 물을 때마다 다들 이래서 감사하고 저래서 감사하다는 소리들뿐이었다. 덜떨어진 나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내가 더 숨을 못 쉴 정도로 불안에 흔들렸다가 그것이 위로가 되어 감사가 되었다. 어쩌면 오늘 시인도 이를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는 게 아닌가?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17:2-3).

 

시쳇말로 재수 없게 걸렸고, 누군 운 좋게 안 걸린 게 아니다. 이 모두는 주가 더하시는 날들로 “내가 결심하여, 입으로 법죄하지 아니리이다.” 이에 할 수 있는 방법은 감사뿐이다. 재수나 운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같이 어울려 접촉했던 ‘아픈 아이’의 가정이 가족들 모두 음성이라 다들 얼마나 감사하는지…. 본인들은 확진되어 힘들어하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으로도 선을 이루신다. 비록 고통 가운데 있으나 저마다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 그의 돌보심에 감사한다. 덧붙여 아내의 뜬금없는 성경공부는 새삼스러운 기쁨이다. 한 마디로, 웃겼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4-5).

 

그럴 수 있게 붙드시고 새 힘을 더하신다. 이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8-9).

 

주의 놀라우신 손길이 어둠 가운데서도, 더욱 찬란하게 빛을 내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그러나)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