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민 31:8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 20:4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험은 귀하다. 21장에서 아랏, 아모리, 바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은 31장에서는 미디안을 무찌른다. 곧 들어갈 가나안은 전쟁으로 처지할 땅이다. 몰아내고 취하여야 할 약속의 땅이다. 전쟁의 승리는 소망을 갖게 한다. 오늘 3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무장시키고, 미디안을 치러 보내어 여호와의 원수를 갚되” 곧 미디안은 여호와의 원수였다. 앞서 2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2).” 곧 이스라엘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다.
이는 물리적인 전쟁 그 자체로 이해하는 이상의 의미다. 주의 백성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다. 모압과 미디안의 유혹으로 이스라엘은 음행하였고, 우상숭배에 빠졌다(25장).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25:17).” 이는 대적하고 무찔러야 할 적이다. 이로써 발람도 꾀를 따라 처단되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31:16).” 유혹의 근원으로 발람을 꼽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저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감사헌금으로 바쳤다.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50).” 이는 승리를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고 그에 화답하는 일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우리가 감사를 마음으로가 아닌 물질이나 시간으로 드리는 것은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하다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감사는 현물로 오가고 그것의 정성과 가치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듯 주께 바치는 데 인색하면 그 마음도 그 정도일 뿐이다. 동전 두 닢도 비둘기 한 토막도 하나님은 저의 정성을 보신다. 그러할 때 우리의 승리는 주의 것이며 우리 삶에 실현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늘 시편도 이를 찬송한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5, 7).
성경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려 하면 많은 부분에서 마음에 걸린다. 전리품은 그렇다 치고 모두 죽이는데 처녀는 살려 서로에게 나누어준다거나, 건장한 이를 살려 종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고대 근동의 전쟁뿐 아니라 모든 전쟁의 특성이기도 하다. 요는 이와 같은 전쟁이 오늘에도 계속 되며 오늘 하루 우리 삶 속에서도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은 패한다. 패한 전쟁은 참혹하다. 발람은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여자와 우상으로 그 영혼을 갉아먹었다. 곧 우리가 흔히 넘어지기 쉬운 유혹들, 이를 알고 방책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는 자존심이 강한데 이는 열등감이 배면에 있고, 누구는 자기 우월적인 교만이 강한데 이는 상대적으로 남을 헤아리는 마음이 약하다. 이를 쥐고 흔드는 것이 사탄의 본분이다.
이에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거론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는 선천적일 수도 후천적일 수도 있다. 본래 그의 품성이 그러하여 생기는 문제들일 수 있고, 환경에 의해 생성된 성품일 수도 있다. 흔히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에 남다른 자부심을 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스스로의 보상이다. 억압된 자아는 누린 풍선 같이 다른 곳으로 부풀려지게 돼 있다. 유난히 친절한 사람은 냉정하기 십상이고,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 끝내 앙갚음을 하는 경우도 그래서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이길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수면 위로 운행하실 때’ 그 모든 게 평정되었던 ‘그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곧 우리 안의 평안은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심으로다. 스스로 어찌 인격을 갖추고 소양을 쌓는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다. 자기 문제, 자기 십자가는 자기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다. 이때 우리의 걸림돌은 미련이다. ‘이것만은’ 하는 어떤 도리에 의한 것으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 9:60-61).” 그래서 늘 우리를 주저앉히는 것이 먼저와 나중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전쟁을 연상케 한다. 곧 자신의 권리, 주장 소위 말하는 자유의지를 모두 주께 내어 맡기는 일이다. 이는 그냥 그래야지, 하고 작심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이를 물리쳐야 한다. 비워내고 채워줘야 한다.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채움으로 자기를 비운 자리에 채웠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얼까? 우리는 종종 사람 예수를 강조하며 저의 선행이나 비폭력, 자비와 인자하심으로만 강조하여 마하트마 간디를 높이 평가한다거나 ‘국경없는 의사회의 선행’을 기린다. 물론 훌륭하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아니다. 엄연히 간디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부정하였고, 국경없는 의사회는 신앙적인 부분을 배재한 채 사람들의 선을 우선으로 한다.
이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훌륭하고 선하고 의롭다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엄연히 다른 의미의 고난에 동참한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우리의 약함과 그릇될 소지의 문제를 아셨다. 그러면서 분명히 하신 것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진리는 엄연한 진리인 것이다. 착하고 의롭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역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내 곁의 사람들이나 주변을 보면 온화고 인자하여 착한 일에 늘 열심인 사람들은 주로 천주교인들이 많다. 너그럽고 다소 느긋하며 부유한 사람들은 불교인이 많다. 그리고 성경에 열심이고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단들이 많다. 왜냐하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인위적으로 이루려 한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타종교야 그렇다쳐도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복음주의 정통 교회인데도 이를 휘두르듯 성도들을 닦달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그게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예전에 천국행 티켓을 사고 팔던 로마가톨릭처럼. 대체 왜들 그럴까? 사람들의 심리란 본래 안 보는 것보다 보이는, 손에 쥔 것을, 당장의 것을 우선하고 선호하기 때문이다. 한데 성경은 오늘도 가상의 땅, 약속의 땅, 아직 들어가지도 않은 가나안을 두고 전쟁을 훈련하신다.
이는 때로 불쾌한 만남으로 나타나 이를 감수하는 훈련과정이다.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마 15:12).” 하며 저들의 눈치를 살핀다. 말씀을 전할 때 상대의 신앙이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소릴 곧잘 하는데, 버젓이 저의 말이 성경에서 위배되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유야무야 그를 인정하는 경우가 그래서다. 이는 엄연히 배교다. 무언의 동조는 불신앙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이를 문화로 둔갑시켜 그들과 같이 그 앞에 절하고 숭배하는 것까지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일 때도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세상에 사는데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사회 생활을 하려면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오바댜도 다니엘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그랬던가? 저들은 타협하지 않았다. '뜻을 정하여' 느브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아 불이익이 오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들은 굴하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저들의 신앙으로 얼마든지 요직에서 맡은 바 자신의 책무를 다할 수 있다. 결코 세상에 타협해야 세상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불쾌한 만남을 두고 예수님은 일러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8).” 곧 우리의 무심한 동조의 말, 묵인, 암묵적인 동참 등이 우리로 저들과 같게 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저들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하나님이 저들을 우리 곁에 두심은 저의 영혼을 얻고자 하심이고, 우리로 이 땅에 살게 하심은 구원을 아직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8).” 곧 저들에게 미움 당하는 일이 우리의 전리품이 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 우리가 비록 세상에 속하여 사나 세상에 숙이고 살지는 않는 이유다.
이는 엄연히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으로 우리 믿음의 훈장이 된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은 우리의 존재감이 실제의 삶과 부딪칠 때, 곧 그 전쟁에서 승리로 나타날 때 알 수 있다. 반드시 우리의 반대세력은 있다. 그래서도 더욱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가 우리 삶에 충실한 이유가 된다.
누가 자신의 이런저런 일을 두고 자주 기도를 부탁한다. 나는 기꺼이 생각날 때마다 저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메모판에 붙여두기도 한다. 한데 전혀 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가령 억울하게 죽은 누구의 원혼을 위한 기도라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남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 같은 것에 대하여는 정중히 거절한다. 우리 기독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남을 해를 마땅히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늘 기도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게 대부분이라, 그것까지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께 나는 저의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서 주의 뜻을 온전히 바라고 분별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극기의 종교가 아니다.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시는 주님의 요구는 되레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세상에 누군들 그 속에 말 못할 사연이나 앙금이 없이 살 수 있겠나? 상처 없이 어찌 자식을 키우겠으며, 서러움이나 원망 없이 어찌 부모 밑에서 자라났겠나?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처음이라, 자식 노릇도 부모 역할도, 이 나이의 이 한 날의 수고도 모두가 생소하고 낯선 처음의 것이다. 퇴직을 하고 중년의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이도 그 인생에 오늘은 처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성경의 인물들이 앞서 살며 주 앞에 순종하고 또는 배반하였던 일을 두고 배운다.
요즘 아내는 오전에 일찍 나와서 성경공부를 한다. 오늘과 내일은 아이들 수업이 10시라 못하겠다고 했더니, 평소 친정에 올라가듯 7시에 나오겠다고 한다! 나는 저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부디 이번 기회를 통해 성경의 즐거움과 그 유익을 자기도 알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앞서 우리는 극기의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은 극기는 위선을 낳는다. 자기희생은 자기 과신으로 이어진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누구보다 옹고집인 경우가 많은 것은 자신들이 이룬 삶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열등감으로 그보다 골치 아픈 열패감이다. 성경의 인물들 하나하나 그 면면을 보면 결국은 그와 같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못하고의 문제로 귀결된다.
주님은 엄히 강조하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 곧 자기가 알아서 하려 할 때 이미 끝난 싸움이다. 주께 맡김으로 자신을 내어드리게 되고, 자신을 내어드림이 거룩이다. 곧 우리의 거룩한 전쟁은 내어드림으로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결국 발람이 죽는 대목과 저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전리품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리는 데서, 드려지는 삶의 중심이 무엇이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단단히 마음 먹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바울은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 이는 우리의 엄연한 처지다. 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우리는 이겨도 아주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십자가가 있다. 나는 이 시점으로 오늘 시편을 묵상하였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시 20:1-3).
이는 우리 믿는 자의 마땅한 권리이면서 또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당당하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4).
이는 어떤 자격이나 그 기준을 통과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승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주의 영광이 된다. 곧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이 귀한 사실 앞에 당당히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 그러할 수 있기를 구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서 말이다. 어떻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7).
우리에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고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6).
이는 오늘의 일로 그침이 아니다. 하여,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