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2. 2. 12. 05:23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민 32:1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 21:13

 

 

모세에게 있어 미디안과의 전투로 마지막 전쟁이 끝났다. 저는 요단 동편에 머물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였던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오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요단을 건너지 않고 동편에 남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곳이 목초지로 좋았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민 32:1).” 아무리 그래도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발상이다.

 

모세가 예전 일을 상기시키며 저들을 만류한다(8-9). 저들은 요단을 건너 전투에는 참여하겠으나 식속들과 가축들은 이편에 남겨둔 채 그리함으로 후에 전쟁이 끝나고 자신들의 몫을 이쪽으로 요구한다. 먼저는 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낙심이 될 것이란 생각은 못한 것이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7).” 다른 백성들도 어찌 아니 생각이 없을까? 한데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약속의 땅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 모세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두 번째로 저들의 선택은 조상들의 과오를 되풀이 하는 결과일 뿐이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11).” 곧 저들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순종’이 아니다. 그 불순종의 결과를 저들도 안다(13-15). 알면서도 그리 선택하는 것은 그곳이 좋고 자신들만 우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순종’이란 아무리 훌륭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훗날 사울 왕이 아말렉을 진멸할 때의 일이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3).” 그런데 저는 그 일이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 없애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든 것이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9).” 그때에 사무엘의 유명한 설교가 나온다. “사무엘이 이르되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고로 진정한 순종이란 내 생각과 판단, 나의 선택은 배제한 하나님의 뜻으로만이다.

 

셋째로 저들의 선택의 문제는 모두를 생각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공통체를 위한 게 아니었다.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14).” 우려 섞인 모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15).” 앞서 광야 40년이 시작되게 된 계기도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불안을 조성하였고 끝내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이를 상시시키자 자신들은 다르다며 저들은 가나안에 앞서 들어가 전쟁을 치르겠다고 한다(16-19). 하지만 가나안 정복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전쟁이 목적이 아니다. 한민족을 이루어 함께 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다. 공동체에 적합하지 못할 때,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23).” 저들은 명령대로 행하겠다고 한다(25). 말씀대로 나가 싸우겠다고 한다(27). 그런 뒤에 돌아와 이쪽에 남겠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는 저들의 뜻을 거두지 못한다(33-42). 서로의 결속이 와해된 것이다. 저들 자손은 ‘건너가지 않았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29).”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요단 동편이 아닌 서쪽으로, 요단을 건너가서이다. 저기서 여기의 차이다. 우리의 결국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소유해야 한다. 그렇게 싸울 때 저들에게도 요단 서쪽의 땅을 분배하겠다는 것이다. 모세는 저들의 뜻대로 두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땅을 저들이 싸운다면 그대로 분배하겠다는 것이다. 

 

그 땅은 무장하고 취하여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30).” 우리의 무장에 대하여는 오늘도 유효하여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천국을 소유하고 차지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전쟁이며, 오늘 날 이 시대정신과의 싸움이고, 세상에 권세 잡은 것들과의 전투다. 이에 허리에는 진리로 띠를 띠고, 하나님의 의로 호심경으로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맞서야 한다. 건너가서, 싸워야 하는 가나안 서쪽 약속의 땅은 앞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쉽고 신앙은 어려운 게 그 때문이다.

 

오히려 광야 40년의 세월이 편안하고 나았을지 모른다. 그때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따랐다. 한데 이제는 스스로 싸워 이겨서 차지해야 하는 땅이다. 고난은 실제다. 이를 잘만 타면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위해 풍랑을 만나게도 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급히 배에 태우시고 강 건너편으로 보내셨다(마 14:22-33). 그때에 저들은 풍랑을 만나 모진 고생을 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 그때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 유령인가 하고 모두가 놀라 기겁을 한다. 그때에 베드로만 주를 확신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8).” 그와 같은 담대함이 앞서 당한 모진 고난에서 얻은 용기이다. 모두가 겪었으나 저만이 이를 얻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 비록 금세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0).” 우리의 나약함에 주는 나무라시지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저와 같은 신앙은 고난의 풍랑으로 얻은 값진 것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이러한 신앙 고백이 아무나의 것이겠나? 때론 괴로움으로 책임을 하나님께로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20).” 또는 도망쳐서 모든 것을 회피하고 조용히 혼자 없던 일로 살고 싶을 때도 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 55:4-7).

 

누가 고난을 자처하고 마다하지 않겠나? 오늘 본문의 후손들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에 이해는 간다. 앞서 광야 40년의 세월이 모질고 길었다. 더는 자손들에게도 그와 같은 고난을 남겨주지 않기를 바란다. 마침 요단 동편의 목초지가 자신들이 기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뒤로 하였다. 함께 했던 공동체의 수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가나안에 들어가면 어떠할 것을 모두가 아는데… 그래서 그저 그 정도의 믿음에서 머물기를 바라는 경우들도 많다. 얼마든지 값없이 거저 주신 믿음의 정도로도 족하다고 여길 수 있다. 아내와의 성경공부에서 아내도 종종 그런 소릴 하였다. '그래도 천국에는 들어갔잖아!' 가령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모면한 롯의 이야기를 나누다 '어쨌든 멸망은 피했네!' 하는 그런 소리. 믿음으로 천국에만 가는 것으로 족한 정도의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족속들을 연상하게 한다. 이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

 

설령 어린 아이의 수준으로, ‘간신히’라도 천국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행이라 여긴다면 이는 어쩌면 천국을 모르는 자의 소리다.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작 천국을 알고 사모한다면 이를 더욱 얻고자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것이다. 천국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때, 그 믿음이란 정작 발동하지 않고 멈춘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변론하면서까지 주의 일에 투신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 그저 안이하게 그러려니 하는 믿음으로는 죽은 것이거나 다름 없다. 미처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다. 하다못해 아이도 배가 고프면 울고, 괴로우면 보챈다. 하물며 미동도 없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주하려는 성도를 주님은 강제로 이끄신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그와 같은 황홀경에 빠져 자기 혼자 안주하면 좋으련만,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로 근심하게 하신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22-23).” 신앙이 믿음보다 어려운 것은 무장을 하고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차지하는 자의 것이다. 

 

어제는 아이들이 안 왔다. 둘은 아프고 둘은 덩달아 안 오고, 하나는 늦잠을 잤거나 잊은 듯하였다. 그 시간이 그냥 붕 떴다. 아내는 아이들 오기 전에 일찍 나와 성경공부를 했으면 했는데 늦잠을 잤다. 말이 쉽지 오전 7시에 나와 그러기가 쉬운 게 아니다. 한 아이라도 기다리느라, 늦게라도 아내를 부르지 못했다. ‘이래서 공짜는 보람이 없어!’ 내 안에는 불쑥 불만이 터졌다. 희한하지? 돈을 내고 하는 수업이면 기를 쓰고 할 것이다. 이 생리를 잘 안다. 언제 보충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한데 공짜라…. 그래서 전에는 글방을 비싸게 운영했다. 혼자 하는 경우는 주 4회로 한정하여 그 값도 배로 비쌌다. 이상한 것은 비싸면 귀한 줄 안다! 후배 하나가 옷 가게를 차렸다. 강남 인근 서초 어디라는데, 처음엔 저렴한 중중저가의 가게였다. 개업을 하고 일 년 넘게 고전을 면치 못하다,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그리고 가격을 두세 배로 올렸다. 순식간에 매상은 올랐다. 글방도 그런 식이었다.

 

애나 어른이나 공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너무 은혜가 싸구려가 되었다. 거저 주신 데 따른 값은 헐값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태도다. 믿음도 그와 같아서 신앙이 자라지 않는 믿음은 싸구려 은혜에 머문다. 은혜로는 은혜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당연한 줄 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안주하려 든다. 만일 예수님도 그러자 하셨으면 어쩔 뻔했나? 그래서 양떼들 사이에는 개나 염소를 풀고, 물고기들 사이에는 메기 한두 마리는 풀어 둬야 한다. 고난 없이 믿음의 성장도 없다. 값을 치르듯 배움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기를 쓰고 살지 않는데 그 신앙이 온전하겠나? 다른 족속과 달리 요단 이편에서 식속들과 목축들을 남겨두고 치르는 전쟁이 과연 온전하였겠나? 죽기 살기로 한다는 말,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는 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 고백이 결코 아무나 하투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풍랑을 만나 밤새 시달렸는데 누구는 예수를 알아보고 물 위로 뛰어들어 걸어 들어가고, 누구는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그 차이는 무엇일까? 안이함은 은혜의 난적이다. 우리가 주를 섬긴다는 것은 멈춤이 없다는 것이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때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다. 해야 할 것을 할 뿐이다. 잘하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내 안에 드는 회의나 갈등을 묵살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딱지가 나서도 못하겠다. 아니면 돈이라도 벌던가?! 어제도 마음이 좋지 않아, 아이들을 그만할까? 하는 생각으로 시달렸다. 그러다 깨달은 것은, 우리가 주를 섬기는 일에 멈춤이 없기 위해서는 오직 주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애들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저 한 영혼, 저 아이 하나? 그게 뭐? 숱한 게 아이고, 좋은 사이도 지나면 그만이다. 수십년을 해온 일이다. 수백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런데 뭐? 다 그때뿐이다. 주를 보지 않으면 이 일도 못한다. 

 

어느 누구의 어떤 변화를 바라고? 무엇에서 보람을 바라면서? 모두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혼란스러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저들을 바라보다 미끄러지고 넘어질 뻔하였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 73:2-3).

 

그러니 어쩔 것인가? 저들이 어떠하다 한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6-17).

 

누가 요단 동편에 남기로 했든, 누구는 어찌저찌 해서 일이 어떻게 잘 풀렸다 해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맡기신 일을 완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푯대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늙고 병든 바울이 것도 감옥에 앉아서 할 소리는 아닌 듯한데, 저를 끝까지 붙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만 바라고 나아가는 것. 요단 이편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게 훨씬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고 타당하다 해도, 그러든가 말든가!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21:5-6).

 

약속 붙들고 말씀 의지하며, 오직 주만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