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전봉석 2022. 2. 24. 04:4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 33:18-19

 

 

지난 시간을 살피며 어려웠던 것을 감사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차마 눈물겨웠던 날들도 돌이켜보면 모두가 은혜 위에서였다. 오늘 바울의 구술은 이를 일깨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곧 그때는 힘들고 가혹했던 시간이 이제는 감사와 찬송이 되게 하셨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 33:18-19).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시편은 모든 배경이 하나로 이어진다.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위협하나 이제 시작이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시대마다 적그리스도는 존재하였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을 미혹하여 종교화시켰다. 그뿐인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두려운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그 모든 일의 주인 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항상 아이들과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수업을 한다. 요즘은 자발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활동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10시까지 오라하는 것은 1차적으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게 하려 하기 위해서다. 결국 한 아이가 또 그만두겠다고 알려왔다. 굳이 잡거나 설득하지 않았다. 다섯이었다가 셋이 되었다. 올 사람은 오고 갈 사람은 가는 것인데, 주가 이끄시는 대로 할 뿐이다. 우선은 이달 28일까지로 정하고 시작한 일인데 그 사이 둘이 낙오했디.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글쓰기는 전전인 자기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나는 일깨울 뿐, 하고 안 하고는 아이의 몫이다. 이때 나의 확실한 의지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하실 것이란 사실이다. 아이들이라고는 하나 나는 저들의 눈높이나 수준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다. 알아들을 자는 초등학생이라도 알고, 못 알아들을 사람은 환갑 진갑을 넘겨도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다만 한 영혼이라, 그에 따른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찾아보았다.

 

첫째, 하나님은 남은 자를 위하신다. 저를 두고 ‘하나님의 허리띠’라고 표현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3:11).” 그들이 듣지 않는다 해도 허리띠가 그에게 속한 것처럼 나와야 할 자로 오게 하시고, 남게 할 자로 남기신다. 함께 할 자로 하게 하게 하시고, 이의 분명한 뜻이 계심으로 '나와 너'를 위하여가 아니라 주가 주의 이름을 위해서이시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를 대할 때 인정으로 사람을 가까이 하는 일에 주의한다. 늘 속이는 것은 사람이라서 감정 따위로는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나조차 그런데 하물며 저를 '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면 무슨 용기로 마주할 수 있을까!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 함께 할 수 있고, 없고는 모두 주께 속한 것이라, 나는 이제 그리 확신한다.

 

둘째, 누구보다 다윗이 이를 증언한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삼하 7:23-24).” 곧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해도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행여 오늘 이 한 시간 우리의 만남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때의 기억이 우리 영혼을 뒤집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 가정은 2년만에 교회로 나아가 주일을 지킨다. 서둘지만 아이들은 묵상글을 쓴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빼앗기지 않으심을 나타낸다. 

 

셋째, 나를 세상(!)에서 나오게 하신, 출애굽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오늘 본문이 이를 가리켜 일깨우려는 모세의 설교가 아닌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 고로 광야는 거칠고 괴로우나 유익하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의 동일한 고백은,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4).” 나도 늘 신기하지? 분명히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면 모든 게 적당하였다.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우리를 돌보셨다. 이를 지금은 모른다! 당하는 때에는 고달플 뿐이라 행여 떠나가고 낙오하나 곧 알게 하신다. 우리로 세상을 떠나게 하신 이유를 말이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7-18).” 아, 이 놀라운 자부심 또는 확신. 어떤 분명한 감사,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로 반드시 하신다! 나는 이를 묵상할 때면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돈다. 날 위해서도, 내가 무얼 기어이 이루어서도, 그 노력이 가상하여 주가 주신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이 말이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시는 일이다. 이게 참 다행이다. 행여 내 기도로 또는 어떤 헌신으로라면 나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최소한 내가 아는 나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하물며 누구에게 무얼 보여주겠나? 우리의 만남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은 기필코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고 인도하신다! 할렐루야!!

 

넷째, 이사야 선지자도 이를 증언한다.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사 63:12-14).” 우리는 피치 못할 주의 백성 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싫다고 끊을 수 있는 인연이 아니고 좋다고 이을 수 있는 인연도 아니다. 애써 나는 새삼 이으려고도 끊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그때마다 주의 뜻하신 바,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을 내게로 연결하셨다. 전에는 나 좋은 사람을 찾아 내가 마음을 기울여 저를 찾고 위하고 사랑하였는데, 결국은 남이고 어느 순간 '친절한 타인' 수준의 관계로 족하게 되었다. 그러할 때 점점 더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를 이루신다. 이는 주의 영광이 된다. 우리가 같이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신다. 

 

다섯째, 모든 시편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하나, 시편 106편 7절에서 8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보다 더 엄연하고 분명한 사실은 없다. 오늘도 나로 하여금 주와 함께 하게 하시려고 내게 사람을 붙이신다. 그렇듯 세상을  굴리시더니 알게 하신 것은 덧없음 뿐이다. 세상과는 나눌 게 없다. 참 자유와 기쁨을 찾을 수 없다. 간쓸개 다 빼줄 사이처럼 굴다 돌연 원수보다 못한 남이 되는 관계가 허다하다. 이는 사람에게 자기 마음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사랑도 자기 감정을 그대로 사랑인 줄 알고 몸도 마음도 허문다. 결코 처음 같은 사람은 없다. 정에 이끌리는 경우는 있지만 사랑에 이끌려 영원한 사람은 허상일 뿐이다. 가히 친절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누굴 참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고, 꽤 오랜 시간을 그리워하고 사랑하였는데.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성경이 일깨움으로 알았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사람과 사람 사이보다 소모적인 것도 없다. 그리하여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4-7).

 

여섯째, 여호수아의 기도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수 7:8-10).” 우리가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주의 이름으로 아뢰고 고함은 그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아이들과도 수업 전에 앞서 기도를 한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거북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대표로 기도하기도 한다. 주의 이름으로 말이다. 주가 이루신다는 것, 이를 억지로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겠나?

 

일곱째, 포로시절 에스겔의 증언으로도 알게 한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겔 36:20).”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여김을 당하는 것을 그냥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21).” 곧 세상이 더럽히는 하나님을 거룩한 이름을 하나님이 아끼신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저들로 알게 하시려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주의 이름을 바로 세우시려고 오늘도 나처럼 어줍고 모자란 사람도 들어 쓰시는 것이다.

 

유명한 재담가이며 토크자로 알려진 오프라 ㅇ는 ‘하나님은 질투의 신’이라 하며 주의 이름을 버렸다. 유명한 배우 브레드피트는 ‘자신을 최고’라고 말하게 하는 하나님을 자아도취에 빠진 신이라 여겨서 그 이름을 버렸다. C. S. 루이스도 회심하기 전에 알기를, 하나님을 ‘칭찬과 허영심이 강한 여자 같다.’고 하며 그의 이름을 경멸했다. 우리가 주를 바로 안다는 것은 성령이 하실 일이다. 내가 아이들을 어찌할까? 또는 누구와의 만남에서 저를 어찌 강제한다고 해서 주의 이름을 바로 알게 할까? 저마다 자신들이 좋을 대로 부르는 이름이 되어서, 뭐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앎으로 나는 이제 굳이 그만두겠다고 하거나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저를 붙들지 않는다. 내가 못해서도 잘해서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이미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아직 내 곁에 남겨두신 저 한 영혼, 저를 위하여 나를 사용하심을 안다. ‘광야의 소리’로 족할 뿐이다.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무방하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이를 알면 알수록 연연해해야 할 것과 의연해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물론 아쉽다. 서운하기도 하고, 그게 아이라 해도 속상하기도 하다. 뭐라 좀 더 달래볼까, 설득해볼까?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들?! 영혼을 다루는 일에는 내가 없고 주의 이름만이 남아야 한다. 때론 나의 감정도 무시당하는 게 마땅하다. 기껏 잘해주었던 마음이 괘씸함으로 서운하기도 한데, 그럴 문제가 아니다. 늘 이럴 때 나를 붙들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하는 말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것이 아이여서 그렇겠나?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다 똑같다. 다만 어른은 ‘친절한 타인’의 얼굴로 서로를 속일 뿐이다.

 

누가 누구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것, 이는 결코 자유롭지만은 않은 ‘친밀함’으로다. 서로 친밀한 영혼은 저로 인하여 내가 고통스럽다.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이별보다 더 괴로운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왜냐하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그래서 오늘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

 

어쩌면 우리로 주를 사랑하게 하심의 역설은 이런 것이다. 내가 힘든데 힘든 게 싫지 않다. 저 아이로 인해 마음이 쓰이고 신경이 쓰여 그것이 신경증을 유발하고 불안까지 가중시켜 병적으로 나를 몰아가는데도… 주의 사랑을 나의 이 좁은 심정으로는 알 길이 없어, 나의 모난 성격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앓는 사람으로라도 알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곧 내가 주를 사랑함은, 오늘 모세가 들려주는 말씀에서도 답이 나온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5-6).” 베드로도 이를 들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걸어가는 길 같으나 실은 살 길이고, 살겠다, 살겠다 하며 걸어가는 길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마땅히 요구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 33:1).

 

어찌 이런 가운데서 즐거워할 수 있겠나 싶은데, 돌아보면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주께서 나의 허물까지도 유용한 쓰임으로 바꾸셨다. 나를 잘 아는 누가 말하길, ‘그 성격에 오죽하겠어!’ 하며 ‘그렇게라도 주의 길 가게 하시려는 것이지 뭐!’ 하는 저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결국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0).

 

그리고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1).

 

이를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거룩히 여기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도,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

 

이를 하나님은 증명하실 것이다. 결코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7).

 

오직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19).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0).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