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전봉석 2022. 2. 25. 05:17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 9:6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시 34:12-13

 

 

때로는 삼가 입을 다무는 게 복이다. 화가 오르고 분이 끓어넘칠 때 가만히 오늘 시편 앞에 서면 우리 안의 갈등은 무색해진다. 먼저 표제로 설명을 더한 것을 보면,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다. 그런 그가 첫 행을 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34:1).

 

말이 쉽지 그 심정은 오죽하였을까? 우리 안의 갈등은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평소에는 가라앉았다가 조금만 긁으면 뿌옇게 부유물이 일어 악취를 낸다. 누가 또(!) 상을 엎었고, 것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막말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말투를 놓고 잔소리를 한다. 언제부턴가 아이의 말투는 누구에게든 명령조이다. 이를 두고 나무라면 아이로서 보고 들은 바 대로 행하는 것인데… 나는 저의 안에 쌓였을 여러 감정의 잔해를 생각한다. 그것이 악순환처럼 아이에게 전가되는 것도 우려한다. 이러한 때에 성경은 손을 내민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2).

 

마치 오늘을 살며 이 모든 살림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모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렇지 않음을 알린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주의 은총은 주의 약속 때문이다. 나의 공로나 나의 마음이 정직하여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나아서도 아니다.

 

또한 사역지가 구해지지 않고 개척을 하자니 돈이 없고 그래서 임시변통으로라도 여느 일을 찾을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를 충고하였다. 주의 종이 주의 길을 벗어나면 더는 그 의미가 없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하시는 것인데, 그럼 평소 못하던 말씀으로, 기도로 주 앞에 더 납작 엎드려야 할 텐데… 저는 게임에 빠져 있다. 집안에서 군림하는 왕이다. 아이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자기감정을 폭발한다. 부르심의 소명이 없다면 차라리 목회를 접든가… 나는 조심스러우나 그 말까지 하였다. 속상하고 안쓰럽다. 아이는 자라 그 아버지의 마음과 행실로 세상을 살아갈 텐데… 안 믿는 사람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나는 누구와의 대화 후에는 자꾸 할 말을 흐리곤 한다. 주께서 어찌 이끄실지 알 수 없으나, 남 얘기 같지 않아 속상하고 답답할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믿는다 하나 그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이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성경은 일러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한데 자신의 것을 손에 쥔 채 이럴까 저럴까 궁리만 하는 시늉은 신앙이랄 수 없다. 회심이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이를 얻으려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그러려하니 혈기 그 속의 감정이 툭, 하고 건드리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폭언은 물론 밥상을 엎으면서…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화다. 분노다. 하나님 앞에 토설치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카펫 밑에 깔려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순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모세도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6).” 바울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우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우린 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 자신의 억울하고 분한 것만 속상하다. 곁의 가까운 이가 당하는 것에 대해서조차 돌아보고 배려할 마음이 없다. 오늘의 그 모든 환경은 자신이 이룬 게 아님을 모세는 강조한다. 바울은 이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독려한다. ‘영생을 취하라’ 이른다. 거저 얻은 바 저절로 목사로 사는 줄 아는 모양이다. 저들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경계하게 된다. 두려움이 내 몫이다. 대화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겁도 없어!’ 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자신이 어찌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믿음의 싸움이 없다면 죄와의 결탁과 타협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안이할 따름이니, 세월만 축내고 있는 셈이다. 들으면 기분 상할 소리지만 ‘등 비빌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또한 축복인 것은 사실이나 저주가 되게 만든다. 적당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어려운 일인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처럼 이루기 힘든 꿈도 없다. 믿음의 싸움이 없다면 그 영혼은 뇌사상태라고 봐야 한다. 살았으나 산 게 아니다. 오죽하니 나는 저희에게 차라리 목사 그만 두고 여느 일을 해보라고 말하였다. 개척할 돈이 없는 게 당연하지! 이를 하나님의 일로 확신한다면 하나님이 하실 일인데, 그 이유로 어디 학원 차라도 운전하라며 일자리를 찾으라고 하니… 교회를 이뤄 말씀 전하는 자로 살면서 ‘천막 짓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최 나는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겁도 없이 사는가 모르겠다.

 

자신의 악함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목이 곧은 자라! 이를 알고 사투를 다하지 않으면, 목사가 벼슬도 아니고… 날로 먹는 일거리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주의 길을 이탈하여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자들을 여럿 보았다. 안 하면 안 했지, 할 거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야지 어쩌려고 저러는 것일까? 다시 말하지만 악과 싸우지 않으면 타협이나 편승뿐이다. 점점 더 무기력과 악함이 악순환처럼 아이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런데 악이 참 별 게 아니다!

 

예레미야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무슨 소린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개척자금을 운운하며 실은 돈벌이를 먼저 염두에 둔다. ‘생수의 근원’을 버려두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겠다는 소린데, 성경은 이를 뭐라 하시나? 악이라고 한다. 세상은 이를 뭐라 하나? 열심히 산다고 한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더러 열심히 행복하게 살다오라고 우릴 이 세상에 보내셨나? 것도 사명자로? 맡은 사명이 그 정도라 여겨, 싸우지 않으면 굴종뿐이다.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욱, 하면 밥상을 엎는다고 하니… 하다못해 안 믿는 자들도 ‘밥상’의 의미를 찾아다닌다. 작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에 대해 역설하였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이도 하다못해 밥상 앞에서는 모두가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다.

 

결국은 그 속에 응어리 때문이다. 맺힌 게 많으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삐져나와 찌르게 돼 있다. 팽창한 감정은 어떻게든 폭발하게 돼 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르시는 것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그런데 그게 어려운 것은 안도감 때문이다. 자기 명의의 아파트와 집과 사지육신을 움직여 살만한 건강이니까 저런다. 그러니 병들고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저들의 안이함에 내가 다 몸서리를 치게 된다. 우리의 안도감이 우리로 주와 교제하는 것을 훼방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는 사탕발림의 위로가 얼마나 큰 해가 되는지를. 내가 잘못할 게 아니야! 하는 식의 자기 위안이 얼마나 끔찍한지, 넌 안 그래! 하며 종주먹을 휘두르며 세상을 향해 불평과 불안뿐이다.

 

나는 두려운 것이 이제 다 커서 이를 보고 듣고 자라는 아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다. 똑같이 엄마에게 막말과 명령조로 말한다. 누구에게든 그런다. 이를 아버지가 나무란다고 꾸짖는데, 당장이야 아이니까 뚱해서 듣는 시늉은 하겠지. 하지만 그 속은 같잖은 것이다. 전에 글방 아이 중에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는데 뇌물을 받고 쫓겨났다. 그 아버지가 뭐라 훈계할 때마다 같잖아서 죽이고 싶다고 하였다. 속에들 화를 키운다. 괴물이 되어간다. 미국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었고 전형적인 미국주의로 자기 자긍심에 똘똘 뭉친 자였다. 어머니는 늘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성이었으나 실은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 길들여진 것을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다. 큰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 남자라면! 하고 그의 아버지는 권총을 선물했다. 상대적으로 유약한 아들은 아버지의 선물이 무서웠다. 여느 때처럼 부모의 다툼이 폭력이 될 때 이층에서 총성이 울리고, 큰 아들은 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한동안 집안은 침울했다. 아버지의 특유한 성격은 툴툴 털고 둘째아들에게 집착했다. 큰 아들과 달리 둘째는 눈치 빠르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편이었다. 둘째 아들이 성인이 되던 날, 저의 아버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권총을 선물했다. 한데 그 총은 큰 아들이 자살한 총이었다.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하여 새 것처럼 주었으나 둘째 아들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신더러도 죽으란 소릴까? 그리고 어느 날 또 저들 부모의 다툼이 벌어졌고 이내 아버지의 폭력이 가해졌다. 이층에서 내려온 둘째 아들은 거침없이 아버지를 먼저 쏘고, 식탁 밑에 쓰러져 울고 있는 어머니를 총으로 쐈다. 후에 저는 심리과정에서, 나는 형처럼 내가 죽고 싶지 않았다고 엉뚱한 답변을 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자기부인이 치열하지 않으면 그 영혼은 안이하여 곪아간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린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19).

 

왜 의인인데 고난이 많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 말로 해서는 안 된다.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잠 26:3).” 스스로 깨달아 우리의 공로나 정직함으로 얻을 천국은 없다. 말과 같이 채찍이, 나귀 같이 재갈을 물려야 한다. 하여 바울은 자기 육신의 질병을 두고 주께 여러 번 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나아짐이 없는 것을 두고 응답을 듣는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성경의 놀라운 역설을 아는 자, 저의 목회가 깊어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8).

 

차라리 상한 마음을 허용하지 않으시면 될 텐데,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신다니!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저들 문제도 실은 다 돈이다. 고상한 척 다들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걱정이 태산인 것도 돈 때문이고, 불안과 주저함도 실은 돈 때문이다. 그놈의 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돈 문제에서 해결되는 길은 돈 없이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가령 나의 아내는 단순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 같다. 공부를 오던 아이의 가정 가운데 하나가 양성 판정으로 확진이 되었다. 그 시간대에 왔던 아이들과 같이 어울렸던 아이들의 수업이 또 다시 일시 중단되었다. 이번 달 아파트 임대료도 낼 형편이 안 된다면서 걱정이 태산이다. 전에 같으면 나가서 뭐라도 돈벌이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텐데, 며칠 또 아이들 수업도 줄고 혹시 몰라 친정엄마한테도 못 가게 됐으니… 아내는 자신의 성경책부터 내 가방에 구겨 넣었다. 그럴 때면 오전에 나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다. 처음엔 우습더니 이제는 가장 멋진 방어인 것 같다. 아주 훌륭한 판단이 되었다. 오늘 시편의 노래는 그것이다. 우리의 최대 방어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이다. 주의 긍휼하심은 약속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분명히 성경은 이를 명시하였다. 하면 우리가 할 일은 답이 하나다.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로 사는 것. 이에 구원이 있다. 

 

이를 아내는 본능적으로 눈치를 채고 이제는 교회로 달려온다.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하면서도 성경공부를 해달란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함인데, 실은 이를 기뻐하시는 줄을 알았다. 눈치 챈 것이다.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노느니 장독 깬다’고, 아내는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평소와 달리 기도해달라고 한다. 무슨 일만 있으면 기도제목을 내놓는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주의 종으로 알고 주 앞에 고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렇듯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다. 참 이상한 분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모든 창조의 원리가 이 안에 있다. 죄의 원인과 결과도 이 안에 답이 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핵심도 이게 답이다. 곧 주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시는 것. 이로써 주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것. 충심으로 우리가 통회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기뻐하시고 기꺼이 구원하신다.

 

나는 아내가 그러는 것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 신앙은 얼마나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료한가? 걱정이야 어찌 없겠나? 이번 달 교회 임대료도 처음으로 며칠 밀려야 하나싶게 교회 통장에 잔고가 비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후원헌금이 30만원 입금이 되었고, 오히려 아내의 감사헌금과 5천원, 만원, 주정헌금이 모여져, 기가 막힐 노릇이다. 딱 그 금액의 돈이 교회 통장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저 기이하고 마땅할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이다. 나는 주의 것이다. 그렇다면? 주가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쓸모를 다하면 목사를 그만두게 하시던가, 교회가 할 일을 다하면 스르르 그만 접게 하신던가? 그 결정은 내 몫이 아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말씀이 나는 너무 좋다. 결국 알아서 하시라, 하면서 나자빠지면 그만인데!

 

누구에게도 이를 말해주고 싶었다. 개척을 염두고 두고 있다면, 그럼 기도로 말씀으로 주의 뜻을 묻고 싸워야지! 세상과 싸울 게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야지. 덤벼야지! 주의 일을 맡은 자인데, 주가 하시는 교회라면 주가 알아서 하셔야지요? 하고 따져야지? 게임에나 빠져 자기 멋대로 살면서 기분 내키면 어디 휘익, 펜션에라도 나갔다 올 여유가 있으면서 말씀은? 기도는? 하나님 뜻은? 도대체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으면 목회는 무슨 얼어죽을 목회랍시고, 지나가는 개한테 물어봐라. 내가 목산데, 사역지도 없고 개척을 하자니 자금도 없고, 그래서 게임이나 하면서 성질나면 밥상이나 엎고, 애고 아내고  인격 모독은 물론 인격 살인도 거침이 없으니 어쩌면 좋으니? 하고 물으면 똥개라도 그 답을 알 것이다. 

 

나는 저들 가정을 보면 내가 오금이 저린다. 모세는 목청 높여 외친다.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신 9:3).” 참 겁대가리 없이 산다. 저의 가장 큰 저주는 여유로움이다. 자신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하지만 내 아주 좁은 소견으로는 개가 웃을 소리다. 모세는 뭐라 하나?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13).” 부디 정신 차리시라!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주의 약속이 있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29).” 이 확신이 없다면, 그만둬야지! 차라리 세상 사람들처럼이라도 살아야지. 가정 잘 꾸리고 애 새끼 건사하면서 나 하나 행복하게라도 살다 가야지. 어휴!

 

다시 보지만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34:1).

 

정말 미친 게 아닌가? 그래도 왕이고, 기름부은 자로 세우심을 받아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산다고 사는 자인데, 하나님이 어찌 이러시는가? 이 무슨 요지경이람?! 총구를 입에 물고 당겨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내 입술로' 주를 찬송하겠다고?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2).

 

굳이 오늘 다윗의 시를 정의하라면, <환장 시>가 아닐까? 마음도 행동도 정상이 아닐 때 헛소리 하듯 지은 시 말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하고, 더욱이 목회를 한다면 최소한 하나님 앞에 두려워할 줄은 알아야지? 그게 응어리진 어린시절 때문이고 정신과적인 문제라면 정신병원에라도 입원을 하든가! 너무 등 비빌 데가 많아서 그런다. 사지육신이 너무 멀쩡해서 그런다. 아직 아이가 덜 자라서 저런다. 자신을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 얼마나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봐야 한다. 지금이 그럴 땐가? 기분따라 늘어져 자고, 밤새 게임하고? 아무도 더는 혼내는 사람이 없어서, 매를 들지 않어서 그렇다. 막대기가 필요하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도무지 글렀다.

 

오늘 다윗은 우리에게 남다른 비결을 알려준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7).

 

어떤 경우라도 주의 천사가 우리를 둘러 진 치고 지킨다! 부디 지금은 기회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특별히 오늘이라 일컫는 날 동안은 부디 회개하시라. 주를 바라시라. 말씀 앞에 코박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께 아뢰시라. 그럴 때 다윗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었는지, 이걸 좀 맛보라고 알리고 호소한다. 금방 미친 척 하고 나와서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치를 떨면서도 말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8-9).

 

세상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같이 미쳐서야 되겠나? 아무리 요지경인 세상이라 해도 우리까지 요지경으로 살며 목회도 직업이라고 밥벌이를 염두에 두고 해서야 쓰겠나? 세상은 본래부터 요지경이었다. 홍수 심판이 언제였다고 다들 모여서 바벨탑을 쌓않다… 멸망하는 소돔 성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게 언제였다고 술 취해 자신의 딸들과 통간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목이 곧은 주의 백성들이다. 부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4).

 

그러려면 싸워야 한다. 번번이 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해도 또 다시 싸워야 한다. 야곱과 같이 절름발이가 되어서라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선민답게 살아야 한다. 환도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말씀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충심을 보신다. 이를 기뻐하시고, 이로써 영광을 받으신다. 이를 위해 특별히 우리를 선택하셨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8).

 

그러므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19).

 

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