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 11:1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오직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보장 받는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신 11:1).” 모세는 일러 우리를 일깨운다. 이제 들어가 차지할 땅,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세는 결론처럼 당부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29).”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선언해야 할 복과 저주는 28장에서 나온다(12-26). 단순한 논리로는 지킬 때 복을 그렇지 않을 때 저주를 받는다는 것. 오늘 우리의 은혜 정신이 이 모든 원칙을 희석시켜버린 듯하지만 엄연히 변할 수 없는 진리다.
그리심 산에서 복을, 에발 산에서 저주를. 그리심 산은 물이 흐르고 에발 산은 물줄기가 없다. 그리심 산은 풀이 있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지만 에발 산은 황량하다. 이 두 산은 세겜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이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6-7).
우리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모세는 반복하듯 설교한다. 교훈하고, 경고하고, 명령하고, 훈계한다.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이 복이다. 그러할 때,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1-12).” 우리의 삶은 주의 통치 아래에 있다. 곧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전은 보장된다. 바울의 설교는 이를 축약한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21).” 이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7).
하는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이 모든 의미를 흡수하는 것 같다. 그럼에서 앞서 말했듯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은혜를 받아들인다. 마치 모든 것에 예외조항을 두고 ‘그럴 수 있지’ 하며 자신을 놓아두려는 것 같다. 이에 하나님이 어찌 행하셨는가를 돌아보아 우리 한 세대 앞의 삶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갖 미신적인 요소들이 나라를 흔들고 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농담으로나 진담으로나 운(運) 타령을 하며 어쩔 수 없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에 자기 인생을 건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목청껏 외친다.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신 11:7).”
이 모든 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인 것을, 그러므로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11).” 주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이다. 나는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사는 아이에게 자주 이른다. 그 삶이 때론 척박하고 어려운 난관이 닥칠지라도 네가 너의 가정의 물꼬를 터야 한다. 이는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는 통로이다. 그러할 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12).”
예수님도 우리에게 일러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하필 그 배는 온갖 죄와 탐욕이 가득하던 곳이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여기서 남의 말, 곧 ‘탓’을 의미하며 시쳇말로는 ‘뒷담’으로 이러니저러니 남을 비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이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하여 오늘의 모든 정세를 그대로 비추시는 것 같다. 그야말로 요즘은 말질하는 방송들이 너무 많다. 개인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이든 이들의 선호도가 유튜브에 쏠리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찾아다니며 듣는다. 생각은 고착되고 판단은 외골수 같다. 말질로 밥벌이를 하는 자들의 경고에 대해서는,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스스로 취한 멸망’이라 하면 할 말이 없다. 모세는 일갈한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 11:26).” 스스로 취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27-28).” 이는 은혜의 시대와 상관없고 신약 시대라 해서도 상관없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당부로 1장부터 꾸준히 외친 설교의 결론에 해당한다. 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13-14).” 이는 오늘에도 동일한 명령이고 원리다. 이에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16-17).”
곧 저마다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한다. 구원의 생수, 축복의 물줄기가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한 마음 깊숙이 내재된 원망과 불평 곧 ‘남의 말’이 우리의 뱃속 깊이 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데 무슨 일로 건드리기만 해도 성난 종기처럼 화들짝 사람을 놀라게 한다. 내 안에 이런 악의 근원이 있었다. 내 안에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억누르는 감정이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상대를 마주하기도 하고 자신을 옳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가 복이란 것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근간이다.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의 감정에 우선하여,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려 드는 모든 것에는 이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이는 구약, 신약이 따로 없고 은혜 시대를 운운할 문제가 아님을 알린다. 모세는 오늘 이를 일깨우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18-20).” 그리하면… 하고 이어지는 오늘 설교의 강해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면’은 접속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21).” 이와 같은 복이 그때에만 필요했을까? 오늘에는 적용이 안 되는 말씀일까? 은혜가 우리로 안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누구와의 대화에서 속상했던 사실 하나는 애써 시작되었던 가정예배가 중단된 것이다. 나도 그 위기를 안다. 그래서도 아내와 말다툼을 삼간다. 화를 삭인다. 감정을 누른다. 아니, 억지로라도 그 시간을 정하여 그 자리에 둘러앉는다. 설령 서로 뚱하여 감정이 나쁘다 해도, 그런 가운데서 찬송과 기도와 말씀 읽기가 민망할 뿐이지만 그래도 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또 당위적으로 의무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실은 우리의 가정예배가 주말이나 공휴일은 쉰다. 의무감에 의한 방어적인 자세로는 억지뿐이다.
이를 손목에 매고 미간에 표로 삼고 문설주에도 붙여 들어가며 나오며, 일상은 그 자체가 말씀으로 통치를 받아야 한다. 마치 추울 때는 옷을 챙겨 입고, 주머니에는 기갑과 휴대폰과 차 키를 챙겨들고 다니듯이 말씀은 항상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으로 자신을 살펴 시험할 필요도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가벼이 놓아두면 영락없다. 그래서도 선포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9).”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두셨다. 택일해야 한다. 이는 구원의 문제와 별개일 수는 있다. 분명한 것은 사는 날 동안 이 땅에서의 질고는 그 이유가 있었다.
종종 누가 연락을 하여 기도를 부탁하는데, 늘 보면 이런저런 사연으로 문제에 문제가 엎치고 겹친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거기에 거주하는 일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31).” 그때에 저주 아래에 있을지 축복의 역사로 나아갈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28:6).” 이는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5-6).” 이와 같은 약속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1).” 말씀으로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축복의 비결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8-9).” 온갖 투자와 소비의 시대다. 젊은이들은 주식이니 비트코인에, 늙은이들은 부동산에 투자하여 이익을 남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서울의 집 한 칸을 장만한다고 하니, 그 열심이 눈물겹다. 그러느라 아침에 눈 뜨면 말씀보다 주식을, 기도보다 장의 판세를 기원한다. 인간의 존엄을 말살하는 전쟁이 발발했는데도 그로 인해 주식에는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그 앞에서 투자할 주식의 종목을 고르느라 눈이 벌겋다. 졸지에 어느 제약회사는 일확천금을 얻고 덩달아 투자한 이들은 자신들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왜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일까? 구원이 단지 죽어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도 없다. 말씀은 앞에 ‘항상’이라며 부사어를 붙였다. 어쩔 때, 어려움이 닥치고 위기가 왔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 우리 삶을 통틀어서 언제나 변함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그것이 몸에 밴 습관이나 기질이나 성격 같이 돼야 하는데, 기도도 은사라는 말. 말씀 묵상도 하게 하셔야 한다는 말. 곧 우리 의지로는 지속가능한 게 아니라는 데서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어야 한다.
어디서 잃었는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곧 맡기신 사명을 거두실 수도 있다. 내가 전하여야 할 말씀을 길가의 돌멩이가 입을 열어 전하게 하실 수도 있다.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가 교훈이고 충고고 경고다. ‘에이, 설마’ 하다가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남방으로 옮겨가다 애굽으로 들어가기 십상이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오늘의 내가 어찌 복음의 일꾼이 되었는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1-23).”
오늘 모세의 설교가 더욱 각별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들어가 사는 하루하루의 내일이 천국에 이르기까지의 가나안이다. 이는 모형으로 전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고 살던 수동적인 삶과는 다른 것이다. 반드시 우린 믿음이 성장하면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언제까지 젖을 먹을 텐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어제는 다 늦게 아내가 성경공부를 한다고 나왔다. 곧 정리하고 들어가야 할 시간에 온 것도 그렇고 그 와중에 커피니 주전부리를 챙기면서 하자는 소리에 뭐라 일렀다. 하다못해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가 이처럼 오면 뭐라 나무라고 야단칠 일을 버젓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 너무 수동적이라, 자기가 다 알아서 해주지 않느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신앙과 구원은 개별적이다. 귀한 걸 알 때 공을 들인다. 어디 신도시 분양이나 무슨 보험에 대해서는 그리도 적극적이면서… 결국 우리의 복은 그 관심의 정도와 비례한다. 갈망하지 않는 자는 얻는 것도 없다. 아쉬울 게 없으면 절박할 것도 없다. 것도 복이라면 복일 테지만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 11:26).” 자,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1:15-16).” 성경의 당부는 구약과 신약이 따로 없고 은혜와 은혜 아닌 것의 구분이 없다. 말씀 앞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있을 때 그 안에서만 우리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 안의 두려움이 주를 경외하게 한다. 우리로 안이하게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는 것들은 늘어간다. 어느덧 그것은 우리 영혼을 잠식할 것이다. 둔해진 영혼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신경증환자처럼 주를 바라야 한다. 이를 손목에 매고 미간에 표로 삼아야 한다. 문설주에 발라 들어오며 상기하고 나가면서 상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시 36:1-2).
우리의 교만은 순식간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곧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3-4).” 그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5-6).
주 앞에 고하고 주의 도우심으로만 사는 것이 복의 근원이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우리가 구할 것은 충성뿐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