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 17:19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하나님께 드림에 있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신 17:1).” 이에 온전히 하나님만 섬긴다(2-4). 악을 제하라는 것이 중요하다(5-7). 악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일을 하나님께 구하라(8-13). 혼자 어려운 일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니다.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8).”
이에 또 왕을 세우려거든 반드시 하나님이 택한 자여야 한다.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15).” 왕이 지켜야 할 것은 첫째,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16), 이는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부인을 많이 두지 말 것(17), 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 생활의 모범과 문란한 성적인 관계를 금하시는 것이다. 셋째,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고 이를 묵상하는 겸손한 자여야 한다(18-20). 곧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9). 이에 따른 결론은 자명하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20).” 이를 오늘 시편으로 함축하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이와 같이 낙심과 불안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불순종에서 온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을 지향한다.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다. 말씀 묵상과 기도하기는 이를 붙들어 그릇 행함을 방지한다. 가령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저들은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길은 묻고 대답하시는 기도에서다. 이를 위하여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누구와의 대화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뒤로 하고 주의 뜻을 따르려는 저에게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였다.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에 의미가 있다. 저는 어떻게 이 말을 받았을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습소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이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다. 작고 조용하게 요란하지 않으며 무던함으로. 이를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지도 모른다.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라, 기도는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 119:25).
누가 알려오기를 저가 섬기는 교회에 두 위급한 가정이 있다. 하나는 백혈병을 앓는 경우와 췌장암 4기로 항암치료를 하는 경우였다. 저들 가정을 두고 온 성도가 돌아가며 릴레이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췌장암 4기 판정으로 더는 소생할 가망이 없던 이가 세 번째 항암치료에 암이 사라졌다. 병원에서도 기이한 일로 여겨 몇 차례 더 항암을 하면 모든 게 깨끗이 완치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온 교회가 기뻐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백혈병으로 이식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나 거부반응을 일으켜 점점 위독한 성도의 가정과 대비되어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에 힘쓰는데… 그와 같은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8).
여기서 하나 분명한 것은,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서 해야 한다. 누가 낫고 안 낫고, 응답 받고 못 받고 하는 일로 주의 뜻을 임의로 판단하거나 서로의 삶을 두고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실지 알 수 없으나 자칫 교회가 큰 시험에 빠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도가 우리의 소원을 지향할 때 그 결과에 따라 마치 승패가 갈리듯 시험에 든다. 그렇게 아주 교회를 떠난 이도 여럿 보았다. 저의 입으로 공공연하게 하나님은 없다! 하고 부정하며 산다. 특히 누구는 첫 아이가 전신마비를 안고 태어났을 때 이를 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도(?)를 다했다. 죽어라 하고 소원을 빌었으나 저의 기도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 묻혔고, 저는 이내 교회를 등지고 떠났다. 모두가 기도 때문이다. 설령 누구는 낫고 누구는 죽는다 해도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일 텐데, 사람으로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생을 두고 기도할 때 소망을 잃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에 소망을 두고 하지 않는 기도는 모두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음을 알린다. 곧 기도와 말씀은 하나다. 설령 기도 응답이 더디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49).
모처럼 친구의 연락이 왔다. 모친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다소 위급하시다는 것이다. 요양원에서 생활하신지 오래되었다. 구토와 설사가 멈추지 않아 조만간 응급실로 옮겨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확진이 되어 고생이다. 세 가정은 동시에 확진이 되어, 그 가운데 평소 기저질환이 있는 자모는 그렇잖아도 자주 병원에 입원을 하는데, 현재 양성이라 고통 중에도 집에서 격리 상태인가보다. 이런저런 소식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저마다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기도를 한다. 목사가 되고 나는 기도부탁을 자주 듣는다. 오죽하니 이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두고 저의 건강을, 또는 그 일가의 어떤 다급한 일을, 또는 집을 이사하는 문제에서 아이의 미숙함을 두고… 나는 온갖 기도의 사연을 적어두고, 이를 마음에 새겨 생각날 때마다 기도 약속을 지키려 한다. 그런데 주께 아뢰기는 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염두에 두게 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 26:53-54).” 기도하여 이루어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곧 말씀이 기도의 중심이어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다. 때론 나의 뜻과 상치된다. 하나님은 때로 내 마음을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 답답하다. 골도 난다.
그런데 병이 낫고 안 낫고, 일이 풀리고 안 풀리고 하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하나님이어야 할까? 그 기도의 대상이 말이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면서도 굿을 하고 점술을 의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무렴, 자기 소원만 이루어지는 게 기도의 목적이니까 말이다. 한데 그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하는 바울의 증언은 모범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상식, 지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영으로 해야 한다. 영으로 한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서 주도하시는 대로 하는 일이다. 이에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소원만 집중하면 하나님은 없고 문제만 남는다. 자기 의지대로 구하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도, 하다못해 생일케이크 촛불을 끄면서도 소원을 빈다. 설령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 해도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배치된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이것이 바울이 외친 우리 믿는 자의 구호가 아닐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 앞에 무릎 꿇고 기도 응답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친구는 목사의 ‘영빨’로 기도 부탁한다고 했다. 마음이 어떨지를 아니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비속어 ‘영빨’ 또는 ‘기도빨’이란 용어는 우리의 경건함을 상쇄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향기다. 병에 담긴 눈물이다. 거룩한 언어로 채워지는 진정한 마음이다. 물론 가까운 친구이고 평소 저의 말투다보니 그러려니 하였으나, 목적만을 위한 기도는 불경하다. 말씀을 버린 기도는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의미가 없다. 기도 응답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그리 이해한다. 죽음을 앞두고 주께 기도하여 생명을 연장하게 되면서, 더 사는 날 동안 오히려 저의 노년에 남긴 죄의 얼룩과 그때 낳은 므낫세의 악독을 우리는 잘 안다. 성경은 일러,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결국 우리의 기도는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는 데 있다. 즉 기도는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광대하신 계획 하에서 이루어지는 전우주적인 역사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를 위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특별한 세상을 살게 하신 것이다.
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나도 또한 바울의 증언의 말씀을 통해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기도를 부탁 받을 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위해 아뢴다.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도하노라.’ 곧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위하여서다. 단지 모친의 위급한 지경과 일이 생겨 이런저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게 전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1).” 하는 게 핵심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나 역시 사소한 것들을 두고도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 나야말로 늘 어디가 불편하거나 아프다. 어제그제는 늘 사용하는 팔 등짝으로 담이 결렸는지 조금만 몸을 뒤틀고 숙여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고통이 따랐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주여’ 하는 신음이 울려나오는데 두려움도 동시에 엄습한다. 그러니 누가 물으면 나의 묵상과 기도는 필연적이고 필사적이다. 구차하지만 구체적이고 면구스럽지만 민망하지는 않다. 내가 아뢰고 고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아내나 가족들은 이제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을 두고 서운해 하거나 노여워할 일도 아니다. ‘긴 병에 장사 없다’고, 난들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나? 한데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람이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주가 행하시는 일이란, 주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하는 모든 것을 들으신다. 이에 우리의 소원대로 들어주실지, 더 나은 뜻이 있으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머리를 맴돌고 마음을 어지럽게도 하는 누구누구의 사연을 두고 주께 아뢸 때, 어이없게도 나의 고통이 더욱 간절하게 기도를 주도한다. 가령 내가 어느 목사의 몰지각한 삶을 두고 그 사모의 일이 남 일 같지 않은 것은 그 목사의 이런저런 행태가 다 나의 모습이었다. 이로 인해 혼자 쓸쓸하고 힘들었을 아내를 생각하면 매주 오는 사모와 중첩된다. 그뿐인가? 누가 느닷없이 우울증으로 집 근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인데, 나는 저가 나에게 연락조차 하지 못하는 심정까지도 이해한다.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 누구를 두고도 나는 무심히 저를 위해 기도한다. 저들의 외면과 침묵을 안다. 내가 자꾸 나서서 충동질하듯 거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을, 내가 그럴 때 누구의 선한 말도 아프고 공격적으로 다가왔었으니까… 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 놀라운 진리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이런저런 약함이 어렵고 답답한데 주님은 내게 자꾸 족하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시니, 아주 어릴 때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자주 들려주었던 말씀이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젊을 때는 이 말이 참 싫었고 아팠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다. 그것으로 당한 나의 슬픔에 대해서는 평생을 말로 다 열거해도 모자랄 것이다. 한데 이제는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이를 통해서 주의 사랑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실질적으로 느끼고 누리고 산다. 때론 아주 단순하게 어린아이 같이, 징징거리며 주를 부른다. 막무가내로 나의 요구만 읊조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든지, 말씀이 뭐라 하시는지 상관할 바 없이 나의 요구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때도 많다. 그럴 때에도 나의 주님은 적당하시다. 끙, 하고 일어나 나는 평소처럼 말씀을 끌어당기고 자판을 치면서 묵상글로 하루를 연다.
하여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제는 누가 물으면 개의치 않고 다 알려준다. 전에 같으면 행여 나를 무시하나? 동정하나? 하고 핏대를 세우고 자존심을 우선하였을 텐데, 기꺼이 이제는 나의 나 됨이 면구스러워도, 민망해도, 이를 먼저 밝힘으로 주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알릴 수만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능력은 무슨 초능력이 아니다. 나의 아픈 데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으로 주의 뜻을 살핀다. 누구의 억눌린 심령을 이해한다. 내 일 같으니까 주께 더 고한다. 어느 목사의 이런저런 저의 삶의 모습은 역겨울 정도로, 듣기만 해도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를 오늘에 주의 은혜로 삼으신 것이니, 내가 저였다. 저가 나이다. 사모의 이런저런 고충이 안타까운 것은 내가 나의 아내를 그리 대하였구나, 하고 회개하게 한다. 이 놀라운 은혜의 역설의 미학이 나의 약함에서다.
그러니 누가 알겠나?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우리가 남들과 다른 점은 이것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가 더하시는 은혜가 나의 약함에서 온전하여진다는 데 나는 동감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곧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지금에 와서야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말씀에 공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 이는 이제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임을 안다. 저마다의 우여곡절을 두고 우리는 무엇으로 주께 바랄 것인가? 성령이 이러한 나를 위해 탄식하신다는 것을 알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전 8:26).” 이로써 이제는 ‘나 같은 죄인’도 주께 나아간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곧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오늘도 성령이 날 위해 간구하심으로 나의 이 날이 허락되었다. 고로 남은 모든 생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주께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누구의 기도 제목 앞에서 나는 말씀을 붙든다. 하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늘 낙심과 불안이 한 발 앞서 오지만,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6).
우리로 주를 기억하게 하시려고,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하여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