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신 23:23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 48:9
그것도 못하냐고 다그치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도 있다. 누구에게는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 누구에게는 오금이 저리는 일로 죽을 것처럼 힘들다. 너는 왜 그것도 못하냐고 나무라는 것은 그리 두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생각하고 판단하기 일색이나 그런 중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스스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남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하는 판단은 하나님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일과 같다.
어제는 누구와의 만남에서 내가 하는 말이나 지적이 모두 내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왜 그것도 못하냐고 나무라다 보면 슬그머니 나 역시 어려워 회피하고 있는 것들이 속에 볶인다. 그러니 사람은 모두의 손금이 다르듯 모두의 성향도 기질도 다른 것이지만 우리의 다름으로 주 앞으로 나아간다.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안 하는 것은 죄다. 우리가 타락하는 것은 그것으로 주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 구원 받고 믿음으로 산다면서도 죄에서 자유롭지를 못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고 자기 몸을 주께 바쳐야 한다. 바울은 그리 설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주신 이가 주신 것을 주께 내어드린다는 것은 거기에 약하고 강하고, 잘하고 못하고는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한탄하는 것은 그래서 죄다. 주신 이에 대한 모독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의 전에 드는 일이 순종이다. 하여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3).” 우리가 주께 기도하고 이를 행하는데 있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 다윗은 다윗으로 베드로는 베드로로 드려지면 되었다. 우리의 행함은 누구와 같이 누구처럼의 평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런데 늘 우리로 주저하게 하는 것은 남의 시선이다. 남들처럼, 남을 의식하기 때문이고 이는 어릴 때부터 생겨난 ‘몸에 밴 어린아이’의 특성이다.
내가 누구의 일에 뭐라 하는 것을 두고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하시기 위하여 내게도 동일한 문제를 기억나게 하신다. 가령 누구의 말도 안 되는 행실을 두고 뭐라 할 때 늘 아무도 모르게 내 안의 말씀은 나를 꾸짖으며, 나의 말이 나에게로 향하게 하신다. 너는 왜 그것도 못하냐? 하고 다그칠 때 그 자리에 나를 세우시는 것이다. 어제는 마치 내가 한 말이 나를 한 대 후려갈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들 그러고 있나… 하고 답답하게 여기며 한심해하던 것이 고스란히 나의 허물을 들추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는 모두의 일로 동일하다. 서로 다른 것은 그것으로 주를 부르는 자가 있고, 그것으로 자신을 지배하도록 놓아두는 자도 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 43:22-23).”
괜히 저 힘든 것도 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저 스스로 잘하려고 너무 애쓰는 것인데, “나는 제물로 말미암아 너를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말미암아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23-24).” 지레 어떤 기준을 세워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다그치기도 한다. 우리 안에 내재된 정신과적인 문제는 바로 그런 ‘자기만족’의 허기다. 굳이 못해도 돼, 하고 말씀하시는데도 자신이 못하는 자신을 허용하지 못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미루게 된다.
이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회복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말씀을 경솔하게 다룰 때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것도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귀한 것을 아이 적에는 알지 못한다. 하여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곧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 그대로 있다. ‘어른아이’로 그대로 있는 자신을 보고도 끔찍하게 여기지 못하면 문제다. 이에 오늘 시인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9, 14).
주의 전에서나 이를 생각한다! 지나다 아무 때나 잠자리에 들면서 불쑥 떠올리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릇에 담아야 음식을 나누고 먹을 수 있듯이 우리 몸을 주의 전에 세워야 한다. 말씀 앞에 앉혀야 하고, 눈 감고 손 모으고 주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릴 때 반항하듯 기도 시간에 눈을 뜨고 있다가 교회 선생님이 뭐라 야단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린 것이 마음이 중요하다는 소릴 해댔고 선생은 알아듣기 쉽게, 그 마음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곧 자세를 일컫는 말로 마음이 있다면 행동도 따른다. 생각이 나면 행동도 이룬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에 따른 행함도 당연하다는 게 야고보 사도의 설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저는 2장에서 무려 네 번이나 이와 같이 강한 어조로 강조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 행실은 그렇지 못하고 말은 번드르르하니 저는 허탄한 사람이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 결국 이는 영혼의 문제로까지 끌고 간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고로 어제는 우리가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안 하면서 못한다고 하는 일은 죄다. 스스로를 못한다고 내버려두는 일이 할 수 있다고 하고 못하여서 남에게 비난을 듣는 일보다 쉽다. 그러니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는 앞서 비난 들을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러다 못하면…?’ 하고 자신을 다그치며 주눅 들게 하기 일쑤다. 그런데 이게 또 엄청난 고집이라, 마치 오랜 세파에 바위가 깎이고 돌이 갈리는 거처럼 거듭되는 비난과 존중 받지 못한 기억은 ‘안 하는 것으로 못하는 것이 되게 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결국 믿음의 문제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이를 알려 우리가 어찌 정결하며 말에나 행실에서 온전해야 하는가를 이르신다.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게 둬서는 안 된다. 의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란 이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것. 이는 마치 자식이 어떠하든지 그 부모의 눈에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것과 같다. 저가 잘하면 잘해서 기특하고 못하면 못하는데도 수고하고 열심을 다하는 것이 기특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완전하고 온전한 결과를 기대하시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는 주 앞에 서면서 완전하였다. 온전한 자가 되었다. 아무리 내가 애쓰고 수고한다고 하여 우리 힘으로 천국이 임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은 이 모든 허물과 죄를 능가하시는 사랑으로다. 한데 스스로 우물쭈물하며 못한다고 하는 말의 대부분은 하기 싫어 안 하는 것이지 실제 못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신다.
나는 누구에게 저보다 천 배는 더 고약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듣고 이런저런 말을 권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아서가 아니다. 사탄은 나로 말리게 하는데, 내 안에 꼬인 죄의식으로다. 나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더러 이런 말을 하고 있나? 하고 찌른다. 말문을 막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도록 한다. 누구와의 만남에서 내가 앞서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만남을 주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시작한다. 내가 저보다 나아서도 뭔가 얻을 수 있는, 줄 게 있는 어떤 경지에 오른 어른으로가 아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3-5).”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7-8).” 하지만 이젠 다르다.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를 가리고 있던 휘장은 갈라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7-38).” 이는 엄청난 값을 치른 것이다.
더는 우리가 모를 리 없다. 못할 것도 없다. 못하는 것을 두고 씨름할 이유도 없다. 속이 다 보인다. 그리로 왕래한다. 담대함으로 주의 성소로 들어간다. 이는 믿는 모두의 특권이고 은혜이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말씀은,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더 이상 죄의 주장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우리를 억누르는 것, 여전히 나를 조정하고 갈취하여 미루고 뭉개게 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그럴 수 있지’ 하는 일과 ‘그래도 되는 일’과의 차이만큼 난해하다. 흔히 누구는 그럴 수 있죠! 하고 항변한다. 맞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무단횡단을 할 수 있다. 성질에 못 이겨 혈기를 부릴 수도 있다. 때론 거짓을 말할 수도 있고, 이를 은폐하려 조작할 수도 있다. 어쩌다 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일은 아니다. 약속 시간보다 늦을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럴 수 있다고 자신을 허용하고 나면 점점 더 용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굴해진다. 막무가내가 된다. 아이의 고집도 자라나는 것과 같아서 고스란히 어른이 되어서도 짊어지고 산다.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각자의 은혜대로 한다.
분에 넘치는 열심도 죄다. 이를 교만이라 한다.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세상은 이를 부추긴다. 성경은 우리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는 기정사실이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1-12).” 누구도 자신을 죄로부터 되돌릴 수 없다. 자신이 못하는 일이다. 이에 주께 나아간다. 주께 맡김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믿음의 분량대로다. 지혜자는 이를 위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한데 아이를 점점 가르치고 다스릴 능력을 잃었다. 상실하는 것이 책임감만은 아니다. 자신마다 주신 자신감도 잃어간다. 아이가 무시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거기서 오는 충격은 어릴 때 상대할 수 없었던 부모에게 느끼는 벽과 같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 48:14).
나나 내 자식이나,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나 이 모두를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 지식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말 그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주께 맡기라는 신호다. 이를 거역하고 자신이 어찌 감당하려 기를 쓰는데, 그게 생각 같지 않으니 스스로에게서 주눅이 든다. 즉 자신마저 벽이 된다. 스스로 쌓은 벽에 갇힌 영혼으로, 사는 게 지옥 같다. 지옥도 살만만 곳으로 여기려면 지옥에서처럼 살면 된다. 방치하고 방기하고 내버려둠으로 자신을 허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항변이 된다. 현대사회는 이를 주권으로 개성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권세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 또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 또는 ‘사생자’ 또는 ‘창기나 남창’도 모두 허용하며, ‘소수자의 인권’을 외치기도 한다. 이에 말씀은 이 모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고 명시하였다(신 23:1).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누구에게 그리 힘주어 강조하였다. 우리에게는 모든 게 가하나 모두는 아니다. 자유란 내 멋대로 사는 게 아니다. 운전을 자유롭게 하려면 최소한의 교통법규를 따라야 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하나님으로 회복되고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예배와 기도가 살아야 한다. 말씀이 없이는 허울뿐이다. 나는 때로 목사로 사는 게 어렵다. 누구의 말을 듣거나 말해줄 때 행여 아닌 것을 그럴 수 있다고 말할까봐 두렵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래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안 되는 게 죄다. 그 죄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를 안다면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살았다고 하면서 숨을 안 쉬고 움직임이 없다면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시체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지상의 집 한 칸과 바꾸었다.’ 주께 맡기지 못하면 고스란히 제 몫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나는 오늘도 엎드린다. 엄살 같고 징징거리는 것 같으나 주 앞에 엎드려 주께 아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 48:1).
내가 기웃거리는 궁정에서 하나님은 알리셨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
(3).
얼마나 허튼 시간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도움을 얻은 곳을 찾아 헤맸던가?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7).” 주께서는 내가 그릇 행하여 멀리 도망가는 배를 깨뜨리셨다. 그리고 여기다. 하면 주의 계획은 분명하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9).
몸은 다른 일을 하고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으면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한들 허사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5:3).
이처럼 우리로 주 앞에 세우시려고 오늘도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굴리시기도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우리로 알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48: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