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 25:13-15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시 50:1-2
바른 자세의 삶은 예수의 의의 옷을 덧입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 오늘 말씀은 이에 그 생활의 모습을 간추린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 25:13-15).” 두 개의 저울추로 공정하지 못하고, 두 종류의 되로 기준을 삼을 수는 없다. 이 모순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대변하는 무기가 된다.
우리에게 부여되는 책임과 의무는 막중하다.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1-22).”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가 이 일의 책무를 갖는다. 우리 스스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모든 상황과 사건 앞에서 자신을 우선하는 것이 우리의 본색이다. 본능적인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 대해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것은 저마다의 그럴 수밖에 없는 바탕 때문이다. 생각이 그렇게밖에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그 정도밖에 닿지를 않는다.
우리의 사랑도 그 한계가 점점 좁아져서 이혼은 다반사고 상대를 증오하는 일은 자신을 방어하는데 최소한의 기제가 되었다. 결국 우리가 말씀에 따라 의로운 생활을 지키려면 의의 옷을 입는 수밖에는 없다. 이때에 그의 말은 입의 열매로 그 영혼의 결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찬송은 자랑이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 은혜를 자주 언급하는 일이다. 사랑을 시작하면 누가 묻지 않아도 저에 대해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진다. 찬송은 밖으로 감출 수 없는 기쁨이고, 기도는 안으로 아뢸 수밖에 없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기도로 감싸고 찬송으로 덮어야 한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저들의 상태도 이해된다. 그 집에 두 종류의 되가 있다. 저들은 각각 자신들의 되로 서로를 담아 깎아내리거나 모자람을 탓한다. 두 개의 추로 서로를 달아보고 담아내어야 하는 그 사랑의 양은 야박하고 무게는 한없이 가볍기만하다. 서로가 그만큼 다르다. 또는 그 주머니에 두 개의 추가 있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그때마다 서로를 달리 해석하느라 자기 주장으로만 그 마음에 가득하다. 이는 원망과 불평으로 변질된다. 고마움은 형식이고 불만이 늘 주된 요인이다. 서로를 생각하는 무게를 달리하는 것이다. 같은 사연을 두고 그래서 서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말한다. 말은 곧 혈기를 일으켜 싸움이 되고 한쪽은 무시당하고 한쪽은 무시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한쪽은 폭압적이고 한쪽은 비굴해진다. 싸움과 시비가 그치지 않는다. 남들이 들으면 별 것도 아닌 일을 두고 저들 각자의 마음에는 시빗거리로 남겨두는 산다. 언제든 꼬투리가 된다.
아침 일찍 누구의 전화를 받고 전날에 서로 싸웠던 내용을 들으면서 나는 저들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진저리쳤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누구도 저들의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다. 서로는 서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서로는 서로의 아픔을 달래줄 여유가 없다. 서운함을 말하면 억울함으로 치대고, 억울함으로 응수하면 저주와 폭압적인 말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눈물로 호소한다는 것인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니 우리의 새로운 살 길은 한 길 뿐이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열린 길인데, 주 앞에 자신들의 모든 사연을 내려놓고 주께 맡기지 않으면 그 짊어진 무게에 눌려 스스로 질식할 지경이다. 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나의 이야기로 반추된다. 모두는 각자의 유년이 있었고 그 시절의 여러 감정이 어른이 되어서도 현실에서 발현되는 것인데, 그 위력은 엄청나다. 다하지 못한 감정해소는 고스란히 묵은 누룩과 같이 부풀려져 농도 짙은 형질이 되었다. 수시로 열고 닫힐 때면 바람이 들어가 이를 더욱 가중시킨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가정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그래서도 귀하다. 단순히 자기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인생 이야기로도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그래서 자주 혼이 났다. 매를 심하게 맞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야 늘 잘잘못을 떠나 아버지의 매질과 폭압적인 언사가 억울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늘 우리 아버지는 그 끝에 '기도하자' 하고 기도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기껏 때리고 야단치고 욕까지 퍼붓고는, 그러했던 혼찌검과 기도는 그때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니까 기껏 매를 맞고 혼난 뒤에 기도를 들어야 하는 게 더 고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에게 더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었겠나 확신한다. 나는 그것이 놀라운 방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래 야단을 친다는 것은 싫든 좋든 감정이 실리게 돼 있다. 냉정한 훈계란 없다. 사람의 감정은 불안정하고 욱, 하는 치미는 것에는 장사없다. 이를 기도로 마무리할 때, 자신의 허물과 죄도 고하게 된다. 처한 상황을 아뢰게 되고 그 한계를 고한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 나는 놀라운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싸우고 다툰 후에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생경한 일이겠으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얼른 감싸 안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한다면 어떨까? 싸움으로 번졌다 해도 그 끝이 기도로 마무리될 때 주의 성령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실 텐데…. 어제는 문득 누구의 사연을 듣다 나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저들 부부는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다. 더는 뭐라 끼어들 자리가 없다. 누구의 잘못으로만 몰아갈 수도 없다. 서로의 되가 다르고 서로의 추의 무게가 다른 것이다. 이는 결코 성경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사람은 그 둘을 챙겨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지만 그것으로 자기 유리한 선택만 할 뿐이다. 서로 얼마나 면구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어릴 때를 아버지의 '기도하자' 하는 뜬금없는 결말은 항상 적응이 안 됐다. 맞은 데가 아프고 들었던 말이 속상한데, 아버지는 또 그 앞에서 울며 기도하고는 하신 것이다. 그럼 맞았던 자리도 들었던 말의 깊이도 모두가 거짓말처럼 없던 게 된다. 그와 같은 상반된 모습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위로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면 너무 아이러니한 일일까?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나는 어릴 때의 이런저런 아픈 기억이 지금에서는 전혀 아무런 감정도 동요도 없다. 물론 기억은 생생하고 어떤 일에서는 아직도 눈물을 글썽일 때도 있지만 그것을 원망으로 마음에 담고 살지는 않는다. 하긴 어느 늙은 친구의 누이는 돌아가시는 모친에게 왜 어릴 때 자신에게 그처럼 모질게 대했냐며 묻고 또 물었는데 결국은 대답없이 숨을 거두셨다면서 내 앞에서 한탄한 적이 있다. 그때 저이 나이 환갑을 지나 곧 칠순이 낼모레인 사람인데도 말이다. 감정의 앙금이란 이만큼 질기고 독하다. 저절로 없어지는 감정은 없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감정, 격한 분노, 서러움, 수치심 따위는 성인이 되어서 생겨난 게 아니다. 나는 저들 부부의 오늘 이야기가 저들 두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각자의 유년이 항상 그 속에 작동하는 것이고, 이는 주 앞에 풀어내야 할 문제이다. 각자의 회개 없이는 해답이 없다. 저들 문제는 거기가 한계다. 누구도 이를 해결할 수가 없다.
평소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툭, 하고 건드리면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의 다른 되와 추의 무게나 크기로 관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진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한쪽이 윽박지르고 한쪽은 주눅이 든다. 이 또한 그 해결방식이 어릴 때부터 고착된 성격으로다. 해결 방식이 다른 것이다. 이쪽은 찌르고 저쪽은 견딘다. 그 싸움은 일대일의 문제가 아니라 다자간의 문제이다. 그들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 때부터 이어 내려온 방식으로다. 그러다보니 쾌쾌 묵은 옛날 일을 끄집어내고 다 지나간 이야기를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면서 지칠 줄도 모른다. 결국 우리의 눈물은 주가 닦아주셔야 할 터, 달리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6-17).
결국 우리의 눈물은 주 앞에서 흘려야 한다. 사람에게 쏟아봐야 가망이 없다. 서로의 사랑도 서로의 저울추와 되와 같아서 달라도 너무 다른 무게와 크기다. 서로 다른 무게와 양을 가지고 겨루려니, 승자 독식이라! 한쪽이 늘 유리하다. 하나님은 이를 금하시는 것이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른 시각, 새벽예배를 다녀오면서 누가 전화를 하여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데 나는 들으면서도 어쩔 수 없음 앞에 몸서리를 쳤다. 서로 되받고 치댄들 해결될 게 아니었다. 주 앞에 무릎 꿇고 서로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아뢰고 지금의 상황을 고하며 주의 도우심을 합심하여 바라는 수밖에! 서로 어쩔 수 없이 또 싸우고 씨름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도하자고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어떨까? 스스로도 민망하고 어색한 일이겠으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외면하실 이가 아니시다. 은혜의 강물은 기적 같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나는 종종 누구에게라도 자신하며 간증하는 것이, 나 역시 어릴 적 그 숱한 서러움이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어떤 우울감이나 의기소침함이 나를 휘두르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한데 그것으로 기도한다면! 곧 우리의 노여움이 찬송이 된다면?!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이 놀라운 약속을 붙들고, 은혜의 강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할 때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로마에서다. 그 압제와 서러움 속에서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게 성도이다. 바울은 모든 서신서 앞에 이와 같은 축복을 먼저 전하였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이는 자신이 경험하고 뛰어든 은혜의 강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3).”
나는 저이의 가정에, 저들 두 사람의 문제에도 이와 같은 주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2).” 설령 그것이 지금 로마에 있든지, 가난으로 궁지에 몰렸든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몬 1:3).” 우리가 서로에게 빌어줄 복의 근원이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2).” 우리는 서로에게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이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은 예수님의 증거로 성립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죽은 것 같은 우리 영혼을 살리실 수 있는 것은 주의 은혜뿐이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3).” 이는 우리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야단하고 매를 때리고는 기도로 마무리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이고 은혜였다. 그때 아버지는 자주 기도 중에 울음을 터뜨렸는데, 어릴 때 나는 여태 맞았던 매보다 아버지의 눈물이 더 싫었다. 그런데 지금에서는 그것이 우리를 살렸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이제는 그것을 흉내라도 내듯 따라한다. 전에 딸아이와 그 사귀는 누구를 두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내가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 그때 서로는 감정이 격해져서 할 말 못할 말을 퍼부으며 싸움 아닌 싸움으로 이어져 언성을 높였는데, 만약에 그대로 서로가 주고 받은 말로 끝났다면 지금까지 그 감정은 앙금이 되어 원망과 불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때 나도 모르게 딸애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중간에 서로 너무 격하게 충돌하니까 아내가 말리러 들어왔다가 같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였다. 기도는 참 희한한 게 내가 옳다고 주장하며 핏대를 세우던 것을 회개하게 한다. 지금의 모든 상황을 주께 고하다보면 주의 도우심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고 구하게 된다. 용서를 구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서로 울면서 기도를 했다. 그 뒤로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서로의 감정은 상하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딸애는 딸애대로 주 앞에 감사하고 서로에게 사과하며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 예수님의 엄연한 약속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 다 죽은 것 같고 더는 가망이 없는 영혼 같지만 이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은 기도다. 미친 척하고 혈기부리는 저를 붙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로 냅다 뛰어들면 어떨까? 설마 기도하는 품을 내치기야 하겠나? 그러할 때 그 은혜의 강물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6-27).” 그 놀라운 효능은 반드시 발휘된다.
예수님도 이를 장담하시는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우리 안에 영생이 있다면 주의 은혜의 샘물도 솟아날 것이다. 주의 강권하심이 없이는 어찌 해결이 안 될 사이라, 나는 뭐라 일러줄 말이 없다. 오직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밖에,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 47:9-10).” 주의 놀라운 역사는 아주 먼 이야기가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우리 삶에도 실현하시려고….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시 50:1-2).
그 빛이 닿으면 산다. 한 번 비췸으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한 번 빛을 받으면 더는 어두움에 종노릇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타락한다면 더는 가망이 없다는 역설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그 심령의 변화는 일찍이 요엘의 예언으로 전하여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고로 오늘의 말씀도 그 핵심이 스스로 겸비하여 행실을 바르게 하라 이르시는 말씀으로,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왜 그런가? 이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 25:13-15).”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 일,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
(시 50:5-6).
고로,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