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 31:6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라
시 56:3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두른다. 앞으로의 일이 문제다. 알지 못하니 더하다. 내심 어찌 염려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예수님도 이를 아시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주님은 분명히 알게 하신다.
목숨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하늘을 나는 새들도 하나님이 기르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염려한다고 되는 일은 없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신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오늘 모세는 곧 들어가 차지할 가나안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른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막상 닥치고 나면 또한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주신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와 같은 말씀은 언제나 나를 붙드신다. 병적으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고 고착된 불안은 나를 길들여버렸으나…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3).
이를 삼단논법으로 다시 되새기면, 나는 두렵다. 나는 주를 의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우나 주를 의지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문이 열렸다. 처음 사람이 쫓겨나고 화염검으로 지키시던 곳이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하지만 이제 우리는 누구라도 믿음으로 그리로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그 휘장을 찢으셨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그러니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 돌아가자! 하고 우리 손을 이끄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때론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징계도 하시지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그러니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어찌 나만 알고 있을 수 있겠나?
안타까움으로 누구에게 전하면 저는 아직 먼 곳에 서서 듣지를 못한다. 한 아이와의 대화에서도 그러했다. 기껏 마음먹고 일주일에 한 번이나마 성경공부도 오고, 지난 가을에는 학습도 받으려고 하고, 아직 젊을 때에 다시 공부도 시작하면서 늘 들어앉아 우울증으로 시름시름 앓느니, 한 번 다시 해보자! 하고 인천까지 오는가 싶었는데… 우리 의지로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떤 어려움이 스치듯 지나가니까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이제 모든 게 잘될 거라 여겼는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어려웠던 모양이다. 며칠 전 좀 어찌 지내는가 하고 오랜만에 연락을 했더니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간 셈이다. 날품팔이로 일이 있어 누가 불러주면 하고 없으면 그처럼 한나절이고 잠만 잔다. 그러니 뭐라 한들, 녀석은 또 만사가 귀찮다는 듯 예전처럼 대꾸하다 전화를 끊었다.
말씀이 아니면 당최 당해낼 수가 없다. 어제 묵상했던 말씀처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입에 두어야 하고 마음에 있어야 한다. 그럼 이를 행할 수 있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기도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4).
결과적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은 사람으로다.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의기소침한 것이고, 어려서 부모에게 다 채우지 못한 애정으로 평생 결핍상태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억눌린 자아는 언제든지 우리 영혼을 점령군처럼 짓밟는다. 단지 어느 아이의 이런저런 사연을 두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다르지 않으니 저마다 돈으로, 학식으로, 권세로 위장한다고 하고 사나 그 속은 늘 허기진 채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저는 낯선 이에게 무엇을 묻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며 살았던 일인데, 그건 그때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여서였다. 왜 그러고 사나, 하는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까?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듯 용한 상담가의 조언을 듣는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우리의 그 모든 허물을 위해 이미 값을 치르신 이가 있었으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7-8).”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1-12).”
예수의 피로 단번에 그 길이 열렸다. 우린 다만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살릴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하나님께 나아가자!’ 누구와의 대화에서 먼저 주 앞에 묻고 기도하고 확신으로 담대히 하며 권하지만, 감정이 격앙되었을 땐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일을 꾸미듯 서슴없이 치를 것 같다가도 정작은 ‘도로아마타불’이다. 되레 아무런 연락도 없는 것은 다시, 다시 또 안주하고 만 것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사람은 모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안타까움으로 일깨우신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3-4).” 이는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이는 우리 믿는 자의 숙명이다.
이를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은혜이다. 아멘, 하고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총이다. 아무나 그러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우린 이미 성령 안에서 씻음을 받았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다. 성령 안에서 의롭다. 주는 나를 그리 여기시는데 우린 스스로를 여전히 죄에 주눅 들어 사는 꼴로 죄에 얼빠져 있으니…. 그래서 성경은 다시 또 다시 외치시고 외치시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다윗은 이를 알았고 들었고 믿었으므로,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시 56:9).
아, 이 놀라운 은혜와 진리!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38:9).
곧 주께 아룀이다. 기도다. 누구에게 하소연을 한들. 누구로, 무엇으로 위로함을 얻은들. 그러느라 자신은 점점 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도 두려워 떨고 어쩔 수 없음을 호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서도, 여전하였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 나는 다짜고짜 어떻게 지내니? 하고 물었을 때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되돌아온 말. 똑같죠, 뭐! 아, 이런…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우리의 이 고질적인 미련함을 어쩌면 좋을까?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주 앞에 아뢰지 않으면 듣지도 못한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고할 수도 없다. 이 두 상관관계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신앙도 믿음도 모두 사는 데 따른 위안 정도로 족할 뿐이다.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가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기도란 게 그저 단순히 원한을 풀어주는 정도로 그친다면, 옛날에 어느 아이엄마의 말처럼 살면서 종교 하나쯤 갖고 사는 게 좋지요! 하는 식으로 아이가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그리 말하였던 기억이 난다. 실제 목사로 살면서 누구의 사연을 듣고 어떤 일을 곁에서 볼 때 그저 원한- 그 마음의 소원들을 풀어가는 정도에서 족한 믿음들도 수두룩하였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때로 보름달을 가리시고 구름을 그 위에 펴시기도 하신다.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욥 26:9-10).” 결국 죽음이 임박해서야 자신의 온전한 믿음을 점검하고 실제 천국에를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평생을 믿는 자로 산다고 살았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그 영혼이 얼마나 황폐하고 건조했을까? 욥은 비통하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23:3).” 나름의 확고한 신앙고백으로,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1:21).” 멋지게 잘 견뎌왔다 했는데.
결국 마음이 경건하지 못하면 분노만 쌓으며 살뿐이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36:13).” 그러니 우리가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드려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더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신 31:23).”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를 붙들고 산다는 게 그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 울어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밖에 없다는 새찬송가 544장의 가사와 같다. 찬송을 지은 가브리엘(1852-1932)은 1916년 영장 소집을 받고 프랑스 전선으로 떠나는 저의 아들이 남긴 말, ‘아버지.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문이 밖으로 나오게 열리지 않는 곳에서 우리 만날 것입니다.’ 하는 말을 되뇌다 찬송을 지었던 것이다. ‘문이 밖으로 나오게 열리지 않는 곳’ 거기는 어디일까? 오늘 그 답을 다윗의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3-4).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어찌 두려움이 없고 염려가 그칠 수 있겠나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9).
바로 거기, 벌써 여기이면서 이미 거기,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0-11).
이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