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전봉석 2022. 3. 20. 04:55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신 32:39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2

 

 

모세가 마지막 설교를 하고 호르 산에 오른다. 곧 죽음이 저에게 임할 것이다. 그럼에도 저는 주의 말씀을 전한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하신 이 엄위하심 앞에 우리를 불러 세운다. 말씀은 나를 멈추게 하고 돌아보아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일깨운다. 나는 모세의 고백을 마음을 새긴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30:14).

 

말씀이 멀고 마음이 온통 다른 데 가 있을 때는 사는 게 지옥이라. 이에 말씀으로 모세는 손을 내밀었다.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8).” 우리에게 가장 슬기로운 일이며 잘한 선택이 될 것이다. 곧 다윗의 찬송처럼,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2).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모시고 말씀을 항상 그 입에 가까이 하고 삶이 복이었다.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 올 줄 알았다. 같이 시작하였던 아이들은 모두 그만두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대화는 이 모든 일의 결국에 대해 안다. 과정은 지난하여 때론 우리를 속일지라도 개의치 않는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어쩌면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아이에게도 그런 뜻을 전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7).

 

어린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할 것을 결심하였던 것처럼,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하는 것도, 어떤 꿈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길도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귀히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기를 당부하였다. 아이는 나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고, 나는 이 아이 하나도 남은 날 동안에는 주가 보내신 것이라 여겼다. 언제까지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항상 그러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8).

 

우리가 주께 향한 마음으로 하나가 될 것을 믿는다. 나 또한 어릴 적, 이제는 저들의 이름도 기억에 없지만, 어쩜 그 나이 때에 하나님은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내게 붙이셨다.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간질을 앓았던 어느 전도사이다. 특히 그의 ‘기이한 감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주일학교 보조선생으로 고등학교 1학년, 바로 지금 이 아이 나이였다. 우리는 그때 곧 있을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느라 며칠째 잠을 설치며 교회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저는 갑자기 쓰러졌다. 그때 입이 허연 거품을 물고 몸을 바동거리는 저의 모습은 기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모두들 놀라 뒤로 물러서있었다. 저것이 간질병이란 것은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저의 목을 뒤로 하고 입에 수건을 물리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 저의 경직된 몸이 진정될 때까지 우리더러 저의 팔 다리를 주무르게 하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는 그 해 여름 성경학교를 끝으로 교회를 떠났다.

 

감사하게도 저와 나의 만남은 그 뒤로도 몇 차례 이어졌다. 가끔 교회에서 잘 때면 유난히 이런저런 말을 많이 나눈 사이이기고 하였다. 그 뒤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은 인천 41번 버스 종점, 율도의 어느 언덕 위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처음 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간질로 아버지는 일찍 집을 나갔고, 모친과 단둘이 유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로 서로가 갈 곳은 교회였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집 근처 교회에서 이래저래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간질과 가난으로 점철된 저의 기억은 덤덤하였다. 그것이 저로 신학을 가게 했고 주의 종이 되게 하는, 은혜였다. 어린 나는 저의 말이 반은 이해가 되고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은 멀어서 석양을 붉은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지는 것 같았다. 한데도 저는 혼잣말처럼 지난 시간을 말해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교회의 여러 시선들 때문에 더는 그 교회에 있지 못하고, 스스로 사임을 한 뒤 다른 교회로 옮긴다고도 하였다. 그때는 간질약이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아직 어린 나의 눈과 귀로는 저의 슬픈 이야기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았고, 저가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이할 뿐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저의 충혈된 눈처럼 유난히 붉었던 저녁 하늘이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감사를 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의 말이 너무 멀어서 내 눈이 눈물이 흐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11).

 

어쩌면 우리의 감사는 이 땅에서의 평안과 무관하다. 나는 아이와 잠언을 읽고, 어느 한 구절을 설명하다 그때 그 전도사를 떠올렸던가? 어제는 유난히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이 복이 많다는 말을 아이에게 여러 번 되뇌이듯 하였다.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묵상하기를. 그 맛을 알기까지 어쩌면 이 아이도 한참을 더 겪으며 느끼며 괴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땅의 무난함이 우리를 훼방할 수 없듯이 땅이 슬픔이 또한 우리의 길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습관을 좇아 하다보면 감사도 인격이 되고 묵상도 생활이 되어 숨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우리에게 이 땅의 기구함은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오늘 모세는 이를 일깨우며 일갈한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의 풍요가 또는 세상으로부터의 만족함이 하나님께 아둔하게 한다.

 

나는 아이에게 어쩌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앞서간 하나님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흉내내듯 감사한다. 그리고 내 앞에 세우셨던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을 생각한다. 때론 왜 저런 이야기를 아직 어린 나에게 들려주나, 싶었던 것들까지. 지금에 와서는 그들이 어려운 고백이 내 안에 축적된 감사의 퇴비가 된 것을 인정한다. 비옥한 땅을 위해 농부는 숱하게 밭을 고르고 돌뿌리를 걷어내고 엉겅퀴 잡풀을 뽑나낸다. 그리고 악취가 나는 퇴비를 고루 뿌려준다. 농부의 얼굴은 그 더러운 냄새에도 인상을 찌푸리는 법이 없다. 오히려 코를 디밀고 냄새를 맡으며 고루 썩어 적합한 냄새가 나는지 끙끙거리며 그 고약한 냄새를 맡고 또 맡아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어릴 적 나의 조부네는 변소가 덩그러니 한데 그 옆에 썩은 볏단이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들고 날 때면 똥바가지를 그 위에 한 번씩 뿌리고 뒤적이곤 하였다.

 

나는 우리의 어떤 슬픔이 또는 노여움이 결코 헛되지 않음은 그것들이 고루 삭아서 그 어떤 비료보다 귀한 퇴비가 된다는 것을 안다. 하여 나는 이제와 나의 어린 날,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하여 감사한다. 누구에게라도 거침없이 들려주고 고백할 수도 있다. 더는 그것이 악취나는 더러운 오물이 아니다. 수치나 부끄러움으로 치우고만 싶은 과거가 아니다. 그와 같은 노여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찬송하게 하신다! 하여 누구의 슬픈 이야기를 나는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아내는 자꾸 청승맞다고 하는데, 버려질 쾌락은 있어도 버려질 노여움은 없다. 허투루 버릴 고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으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오늘 죽음을 앞두고 모세는 곧 가나안에 들어가 맞닥뜨려야 할 낯선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고한다. 때론 죽음처럼 고단하고 힘든 일이 우리를 쥐고 흔든다 해도, 우리의 슬픈 이야기는 주를 찬송하게 하는 길로 이끌 것이다. 거침없이 어린 나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소중한 믿음의 만남들을 감사한다. 어느 소경 장로의 끔찍하였을 나병과의 사투나 술주정꾼 아버지 밑에서 자란 교회 형의 훗날 목사가 된 것이나 간질병으로 교회마다 전전긍긍하던 그때 그 전도사의 ‘기이한 감사’를 나는 사랑한다. 그 외에도 숱하게 듣고 들었던 누군가의 노여움이 어느 찬송이 되었던 것에 대하여, 기이한 감사들을 소중히 간직한다. 오늘은 모세의 감사도 그러하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신 32:1-2).

 

자신들의 비애가 ‘연한 풀 위의 가는 비’처럼 감사였다니!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3).” 하고, 나의 많은 모세들도 그때마다 나의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누구는 그렇게 한 생을 사는 동안 자신들의 노여움을 찬송으로 바꾸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4).” 아,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이 금하신다. 나는 이 약속을 알았다. 언제부턴가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내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에서 확신하곤 한다. 참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고백의 능력이다. 이제나 되어 내 인생에 곁에 두셨던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놀라운 축복이었다는 것을 아는 게 원통할 뿐이다.

 

문득문득 어느 전도사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때도 있다. 가령 저는 나와 같이 목사의 아들이었고 참 잘 생기고 멋진 몸과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 뒤 편 어느 허름한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 저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아마 내가 신학을 미루고 문예창작과를 다니고 있던 때였을까? 슬그머니 곁에 오더니 저도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서로 다른 허공을 향해 내뿜었던 게 첫 개인적인 만남이 된 것 같다. 그 뒤에 저가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우연히 다시 만난 건 어느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는 저였고, 그리고 한참 뒤 또한 우연히 만났던 것은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저였다. 그때마다 한동안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별로 인상적인 기억이 없다. 저도 나도 서로의 가는 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신기하게도 아주 가끔은 저가 기억난다. 나와 같이 저 또한 돌이켜 주의 길을 가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다른 길을 배회하고 있을까? 어제도 아이와의 두 시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제쯤 뒤에 저는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일에 주의 쓰임을 받고 있을까? 하는 섣부른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별로 말이 없는 저 애는 저 애로 인해 가족들이 다시 주일에 예배를 다니게 되었다는 것, 가장 먼저 안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남아서 오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 놀라움에 대해서는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항상 나의 생각을 초월하시는가 하다가보면 성경에 이미 기록된 이야기들이라!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7).” 곧 오늘의 이 모든 일이 새로운 게 없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3-4).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늘 하나시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9).” 놀라운 것은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10).” 그것이 내가 만난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오늘의 나이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11-12).” 이 놀라운 고백은 모세의 남은 고백이면서 동시에 내가 만났던 믿음의 사람들의 동일한 찬송이었다. 바울은 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아름답게 진술하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곧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찬송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승복한다. 그리고 내가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아이를 만나고 가르칠 때 늘 이를 상기한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그런데 어떤가? 야곱이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을 받아 이스라엘이 되고 주의 선택된 이들로 민족을 이뤄 살게 하셨음에도,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15).” 그러한 우리 자신을 돌이켜 주 앞에 나아가야 한다.

 

아이에게도 말해주고 싶었던 것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도 이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때 그 가치가 새롭다. 일찍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저 아이는 일찍이 ‘뜻을 정하여’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은혜의 축복 위에서 자라기를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1).

 

곧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오직 주를 바라며 주께 쓰임 받는 것으로 그 어떤 노여움도 찬송이 되는, '기이한 감사'가 차고 넘치기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