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 1:6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2
미닫이문을 닫다가 새끼손가락이 끼었다. 순간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고작 새끼손가락 손톱부분일 뿐인데, 온몸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부르르 떨며 고통을 온몸으로 느낀 것 같다. 저녁께 돼서 손톱이 까맣게 멍이 들고 건드리기만 해도 온몸에 얼얼한 기운이 감돌았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12).” 우리가 한 몸 이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서로를 위하고 섬기는 데 있겠다. 고작 새끼손가락 하나가 온몸을 꼼짝 못하게 하는 몇 분 동안의 고통은 엄청났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26).”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 하물며 가정을 이뤄 부부 사이로 살아간다는 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우리 속에 소금을 두라는 말, 소금의 맛을 잃지 말라하시는 것. 흔히 양심이라 할 때 인디언 속담에 양심을 ‘동그라미 속의 세모’라고 하였다. 그 끝이 뾰족하여 찔림을 느껴야 정상인데 세모가 무뎌지거나 동그라미가 일그러지면 뭉뚝하여 그 끝에 닿아도 별로 느낌이 없다. 비루먹은 양심으로는 주 앞에 온전할 수 없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시 16:7).
양성 판정을 받고 유난히 고통 중에 있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루이스의 생애와 그의 말을 들려주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본 슬픔>과 <고통의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 하였다. 평소 하나님은 우리 일상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누구 일을 통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보면서 주가 이르시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복되다. 이는 괜한 느낌이나 감각으로가 아니라,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주의 뜻에 주목하고 살 때에 가능하다. 나는 친구에게 저가 당하는 어떤 고통으로 내가 겁을 먹거나 뉘우쳐 돌이켰던 순간들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또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크게 들리고 잘 보인다. 친구는 묵묵히 나의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26:2).
양심은 연마가 돼야 한다. 나는 평소 연필을 쓰는데 하루하루 연필을 깎고 연필심을 다듬어야 한다. 이것저것 쓰다보면 금세 그 끝은 뭉뚝해져서 글자는 납작하다 뭉개진다. 오늘에 두시는 일련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통해 믿음의 양심은 단련돼야 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모두가 이를 강조한다. 특히 팔복으로 알려진 여덟 가지의 복 있는 자의 특징은 우리 삶이 뭉뚝해서야 발견할 수 없는 진리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애통하며 산다는 것, 온유한 자가 된다는 것, 이는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닌 것이다. 직접적인 나의 일에서나 누구의 이런저런 일을 통해서 마음은 연마되고 단련돼야 한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73:21).“
그럼 이런 우리의 마음을 뭉뚝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점점 더 악은 교묘하고 애매해져서 옳은 듯 하고 맞는 듯하다. 죄란 그런 것이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매일 보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것이 어느 날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으로 느껴진다. 앞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 뱀의 꾐은 그럴듯하여 옳은 것 같다.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울분을 토하며 저의 농락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하고 격분할 때에 그의 큰형 엘리압이 듣고 말한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는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엘리압 신드롬’ 같다. ‘옳은 말이 옳은 길을 주저하게 한다.’ 저의 말이 틀리지 않다. 아직 어린 막냇동생을 꾸짖는 형의 말이 옳다. 뭘 안다고, 맡겨진 양이나 치지 어찌 교만하여 어린것이 뭘 하겠다고 전쟁터로 왔단 말인가? ‘구경하러 왔도다.’ 하는 저의 정죄하는 말이 옳다. 상대는 거인만한 골리앗 장수다.
어제 문득 누구의 일에 나는 주춤하였다. 더 뭐라 이르며 끼어드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주제 넘는 일로 나 또한 별 볼일 없으면서 참견하는 게 맞는 일인가 싶어졌다. 이는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그래서 어찌 됐나? 하고 연락을 기다리던 차에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둥 게임은 시간을 정해서 하라 했다는 둥 하는 말에 더는 뭐라 나서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옳은 말이다.’ 너무 몰아붙이듯 그럴 게 아니라, 시간을 갖고 생각하게 해야지! 여태 해오던 게임인데 시간을 정해서 조금씩 하게 하는 것도 옳겠지! 나는 저의 미적거림에 다그치듯 뭐라 좀 더 이를까 하다 멈칫하였다. 그렇듯 우린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을 좀 두면 되고, 조금만 고치고 줄이면 될 줄 안다. 한참 담배를 필 때 몇 번을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줄인다고 줄였다. 하루에 한 개비만, 하다보면 열 개비. 열 개비만, 하다보면 도로 한 갑씩 옛생활로 돌아갔다. 우리 의지로는 어림없다. 나에게 금연은 성령으로 단번에 끊어졌다.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이는 마땅한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세상은 온통 옳은 말들이다. 저마다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그런데 엄연한 사실은 이와 같은 ‘엘리압 신드롬’은 옳을 뿐 옳은 길을 가로 막기도 한다. 다들 자신을 너무 믿기 때문이다. 술 한 잔 정도야! 이번 주일예배 한 번인데… 이 정도면 됐지! 하는 허용이 기도를 없애고 헌금을 좀먹고 찬송이 사라지게 한다. 감사는 점점 희귀한 게 되어 간다. 자신이 허용한 만큼 도로 순식간에 자신을 범하는 것은 자신이다. 남 탓 할 것 없다. 엘리압 신드롬은 그런 것이다. 말 그대로 신드롬은 삽시간에 옳다 여겨지는 무엇이다. 그게 왜 나빠! 하는 저항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속을 자기가 알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늘 우리를 속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시 7:9, 16:7).
우리 믿음은 그리 강인하지 못하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매일매일 깎아줘야 하는 연필 같다.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직 미숙한 사탄인 조카 웜우드가 편지를 썼다. 어떤 이가 점점 환자(신자)가 돼 간다. 성경을 읽고 매일묵상을 하는 것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삼촌인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웜우드의 편지를 받고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가볍게 조언하기를 ‘살짝, 다른 일을 먼저 하게 하면 돼.’ 곧 밥 먹고 와서 하자고 속삭이기만 하면 돼! 하는 것이다. 그럼 저는 성경에서 눈을 떼고 거리로 나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일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겠지. 잠깐 취했던 성경은 그것으로 끝이야.
곧 우리의 약점은 그리 대단한 게 오점이 아니다. 얼마든지 말씀 보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에도 나가게 한다. 그러다 웜우드는 밀린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애들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잠깐 친구하고 통화 좀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말씀 볼 시간, 기도할 시간을 짬이 안 난다. 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가서 성경보고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 밀린 숙제처럼 마음을 짓누르게 된다. 아주 탁월한 심리조작이다. ‘엘리압 신드롬’이란 그런 것이다. ‘그게 왜 나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데!’ 하고 옳은 생각이 든다. 옳은 말이다. 우리의 옳은 생각과 옳은 말이 옳은 일을 가로막는다. 이때 어린 다윗이 형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양을 치고 자기 본연의 일에 충실했다면 어찌 됐을까? 성경은 그리 전개되지 않는다.
이를 마주하게 한다. 직면이다. 상대가 되지도 않을 골리앗 앞에 서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삼상 17:32).”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다. 어린것이 나서는 꼴이라니! 누군 종종 나 같은 게 뭘 할 수 있겠어요? 하고 주춤한다. 이 길이 맞나? 하고 누구는 몇 해를 똑같은 자리에서 맴돈다. 직면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직면을 했으면 선포해야 한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이때는 무슨 용기로 하는 게 아니다. 무모하다. 하지만 ‘여호와의 구원하심’으로 외쳐야 한다. 큰형 엘리압이 보고 있다면 환장할 노릇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46).”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포는 행동이 아니다. 선포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순간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 안에 드는 수만가지 생각들을 짓밟고 내달려야 한다. 왜 그 속에 주저함이나 여러 생각이 없었겠나? 행동을 미루는 동안 생각하기는 활발하게 운동하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8-49).” 선포만 하고 계획을 세우느라, 생각 좀 해보느라 미적거렸다면 물러섰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주지 않는 것, 시간을 갖겠다고 손을 내저었으면 저는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돌을 가지고 물매를 만들어 던졌다!
행동은 무모하고 실천은 가소로울 때가 있다. 여기서도 돌을 만지작거리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선포만 하고 행동으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오직 주만 믿고 진격이다. 무모하면 어떻고 가소로운들 어쩌겠나?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저는 죽으나 사나 뛰어들었다.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 한 가지 확신만으로 갑옷도, 형의 옳은 말도 모두 뒤로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냅다 돌멩이를 던졌다. 동네 아이들 전쟁놀이도 아니고, 돌멩이로 거인 골리앗을 상대하니! 때로 주의 길은 미친 짓 같다. 애들 공부도 시켜야 하고, 집안에 이런저런 일이 산적해 있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우리 속의 엘리압이 주춤하게 한다. 우리 밖의 엘리압이 옳은 말로 가로 막는다.
옳은 소리에 주저해서는 옳은 길을 갈 수 없다. 직면하고 그 앞에 서야 한다. 서서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선포만 하고 가만있으면 항상 그 자리를 맴돌 따름이다. 그리고 달려가야 한다. 그 힘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믿고 내달리는 것이다. 칼과 창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된 게 없이 고작 주머니 속의 돌멩이가 전부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것도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하다가는 때를 놓친다. 힘껏 던져야 한다.
그런데 늘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옳은 소리, 옳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지금 그럴 때야? 하는 소리에 주춤하게 된다. 밥 먹고 와서 해! 하는 말에 시간을 둔다. 차도 한 잔 마시면서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그러면 큰형 엘리압의 말이 다 옳다. 저의 꾸지람과 훈계를 듣고 뒤로 물러나 조용히 집으로 갔어야 한다. 그게 왜 나빠? 하고 누가 대들듯 말한 것도 그런 내용이었다. 병 고침을 받고자, 가난을 모면하고자, 압제와 서러움에서 위로 받고자 예수 앞에 나오는 게 왜 나빠? 집에 돌아가 맡은 바 자신의 책임을 다하라는 엘리압의 옳은 말처럼, 옳은 판단이 옳은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어제는 누구에게 그런 말을 더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나도 미룬 것이다. 내가 뭘 더 나서서 뭐라 할 수 있을까? 하고 내친걸음을 동시에 멈추었다.
오늘 여호수아는 모세 없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그리고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이런저런 고려해야 할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다. 그 뒤를 자신이 맡아야 한다. 곁에서 온갖 이런저런 옳은 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의 생각도 보다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쪽으로 흐를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6).” 저는 선택해야 한다. 아, 이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용기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이에 오늘 시편은 뒷받침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2).
내가 하려 할 때 주눅부터 든다. 주저하는 건 당연하다. 겁도 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숨 돌릴 틈도 줘야 할 것 같다. ‘밥 먹고 와서 하자.’고 해! 사탄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조카 악마를 안심시킨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시는 것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믿음에서 파선하는 일은 한끝 차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여전히 목사로 교사로 교회도 섬기고 할 일은 다 한다. 다만 적당히 ‘밥 먹고 와서’ 말이다. 그게 왜 나빠?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4:2).” 우린 우리를 속이는 우리 자신의 옳은 말에 옳은 일을 미룬다. 옳은 생각이 옳은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스스로에게 소금을 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국 확성기를 들고 큰 소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수밖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정신 차리지 않으면, 새끼손가락 한 마디의 고통이 온몸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심지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저이의 말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던 누구에게 이 글이 전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당연히 우린 우리 안의 작은 소리에도 번번이 당할 수밖에 없다. 만지작거리는 돌멩이로는 소용이 없다. 냅다, 주의 이름으로 던져야 한다. 선포만 해서도 소용없다. 냅다, 내달리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격해야 한다. 그때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이룰 것을 말씀하셨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5-6).”
주저하고 망설이는 영혼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 60:12).
다른 더 좋은 수를 나는 모르겠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