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전봉석 2022. 3. 25. 05:16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수 3:17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1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간다.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4).” 우리 앞에 요단이 흐른다. 약속의 땅이 저 앞에 있다. 하필 지금은 물이 범람하는 때이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15).”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우리의 갈등은 여기서 시작하여 여기를 맴돈다. 우린 먼저 요단을 멈추고 마른 땅을 내게 해달라고 한다. 하나님은 먼저 물을 딛고 들어가라고 하신다. 앞서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긴다. 이 순간의 찰나에 우리는 주저하다 돌아서기 일쑤다.

 

주의 길을 가는 것도 그와 같다. 마치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 같다. 먼저 딛고 건너라고 하시고, 눈에 보이는 찰랑거리는 물가에 서서 우린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기 마련이다. 믿고 먼저 물을 딛고 들어서느냐, 못 믿겠으니 물이 마른 후에 마른 땅을 내어주실 때까지 물가에 서서 망설이느냐. ‘어떤 어려움’을 두고 어두운 생각을 먼저 심어주는 게 사탄의 일이다. 건너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마른 땅을 내어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충동한다. 우리의 상식은 후자를 택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앞서 언약궤를 메고 물로 들어서라고 하신다. 자, 어쩔 것인가? 이래도 계속 나아갈래? 하고 사탄은 속삭이는 것 같다. 어두운 생각을 우리 안에 밀어 넣는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 51:3, 9).

 

어두운 생각은 빛을 몰아내게 돼 있다. 천하의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는 죄가 순식간이었다. 순간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도록 충동하는 것이 어둠이다. 이를 물리치는 길은 주를 생각하는 수밖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하던 일을 멈추고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의심과 믿음이 같이 가고, 염려와 의지가 나란히 서곤 한다. 이 길은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이라. 하여 우리는 말씀을 받아야 한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수 3:3).” 아니면 세상에 여러 갈래의 길이 동시에 나란히 뻗어 있다. 많은 사람이 넓고 고른 길로 간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4).”

 

예수님은 일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문, 좁고 협착한 길로 가려는 자는 적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을 것이라 하신다. 곧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 그러한 날이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26).” 자기 나름 수고하고 애썼던 것을 내세워 주장한들,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27).”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좀 더 강도 높게 외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저는 다 구원 받은 줄 알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자부할 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 단지 우리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원의 끝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왜 말씀 붙들고 묵상과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는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죄가 늘 문 앞에 엎드렸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선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죄가 틈을 타게 돼 있다. 빛을 가리기 시작하면 어둠이 모든 것을 잠식하게 돼 있다. 부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이다. 아이가 다쳤다. 전날에 둘이 같이 오려고 마음먹었다. 사탄은 가려던 길을 가로막으며, 이래도 갈래? 하고 우리 앞에 근심과 걱정을 풀어놓는다. 결국은 큰 대학병원까지 가서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썼으나 별 일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돌아왔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가는 길은 처음이라, 낯설고 두려운 게 당연하다. 묵상과 기도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염려와 근심이 자리잡게 돼 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7:31).

 

우리를 향해 성경은 예수 승리를 외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의구심이 떠날 날이 없다. 이미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갈라놓으신 휘장이다. 그 길은 막힌 길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아무도 스스로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한데 이제는 그 가리었던 막이 찢어지고 우리는 누구라도 주의 이름으로 그리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익숙한 죄의 결과는 염려와 근심으로 우선 발목을 잡는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하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결국은 먼저 딛고 서야 한다. 찰랑거리는 두려운 물가이다. 언덕으로까지 물이 범람하는 시기이다. 이성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미련한 일이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얼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세상 그 어떤 권세도 우리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우리가 아무리 계획하고 철저히 준비하며 산다 해도 모든 결국은 하나님의 것임을.

 

하여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9-10).” 나에게 이루셨던 주의 놀라우시고 기이한 역사를 말씀을 통해 묵상한다. 그리하여 두 손 들고 주 앞에 돌아서면 해결될 줄 알았다. 신대원으로 들어서자 오히려 더 사탄의 극성은 극에 달했다. 생활이 어려울 정도여서 아이 둘을 건사하기 어려워서 둘째를 필리핀에 있는 동생에게로 보냈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도미도처럼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동안에 내가 의지하였던 것들의 허무함 앞에서 나는 공황이 왔다. 도저히 이 길을 더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물러설 곳이 없다. 더는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자주 언급하지만 나는 그때 날마다 울면서 학교로 갔다.

 

나의 기도는 어린아이 같이 안 가면 안 되나? 안 하면 안 되나? 하고 떼쓰는 것뿐. 운전하며 하도 울어서 운전을 못할 정도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신대원 3년, 6학기 동안의 사투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때가 가장 은혜의 때였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12).” 주의 강권하심이 그땐 그렇게 서럽고 억울하기만 했는데 지금에서 돌아보면 그때가 축복이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애 3:37).” 오늘도 우리 앞의 상황은 여전하다.

 

현실적으로 이런저런 부담과 어려움과 불가능한 일이 산적해 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다보면 우물쭈물하게 돼 있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제사장들의 발목이 물에 잠겼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지엄하시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 3:8).” 이 난감함을 우린 신앙이라 한다. 믿음은 누구나 쉽다. 저마다의 믿음으로 믿는다고 믿는다. 저도 주를 사랑하고 잘 안다고 외친다. 그러니 그날에 믿음을 보시겠는가? 아, 하나님의 약속은 말도 안 되고 황당하기만 하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13).” 그저 말씀은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주의 주권을 믿고 나아갈 것인지,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 앞을 서성거리기만 할 것인지! 아놔,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15).”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자, 어쩔 것인가?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하나님의 전능하심만을 붙들고 들어설 것인지, 주저하며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쪽 길로 자리를 옮길 것인지!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수 3:16).” 앞만 보고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가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7).”

 

이는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도식적이고 막연한 말씀에 불과하다. 누구의 신앙 간증이 대체 뭐람? 그것이 정작 나의 일상을 위협하고 범람하여 숨통을 쥐고 있는데,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그 모든 일은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음을 확신하지 않고는 단 한 발짝도 뗄 수가 없다. 우리 의지? 우리의 결단? 하물며 우리의 믿음? 실은 개도 안 물어간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인정하면서였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 62:9).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는 안 믿는 자들도 더 잘 안다. 알면서도 악착같은 것은 사는 날 동안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 그 목적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특수교육학과 대학원을 전공하고 있다며 논문이나 글을 수정, 첨삭해주실 수 있는가 하고 문의를 하였다. 나는 저의 특별한 공부에 관심을 두고 내 능력으로 어쩔지는 모르겠으나 주 앞에서 유익하겠다, 하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저가 바라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결국은 정중하게 사양을 하였다. 여러 학원을 문의한 뒤라 돈벌이로 생각하면 것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였었다. 그러나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10-11).

 

내가 하려 하면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선할 수 없고 의로움을 향한다 해도 도달할 수 없다. 나란히 놓인 길이라 해도 이쪽과 저쪽은 엄연히 달려가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에 오늘 여호수아의 선도 아래 제사장들의 투철한 믿음의 앞섬이 없었다면 어찌 범람한 요단을 딛고 들어갈 엄두가 났겠나? 때를 봐서 물이 좀 줄기를 기다리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백성들이 따르고 있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도 수두룩하다. 저들 사이에서 어찌 술렁거림이 없었을까? 오늘 시편은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 유일한 길을 하나 제시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1).

 

다른 무엇으로 의지할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2).

 

다른 데 기웃거려봐야 시간만 흐르고 세월만 축난다. 망설이는 동안 의기소침하고 자기합리화로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갈등만 쌓인다. 오늘 시인은 단호하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2).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주만 믿고 범람하는 물을 딛고 내려설 것인지, 좀 더 추이를 보고 결정해야 할지 망설이기만 할 것인지.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3).

 

우리 안의 의심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내 안에, 우리 가운데서 속살거린다. 애들도 키워야 하고, 돈 나갈 데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당장 그럴 수 없는 상황으로만 가득하다. 이것들 좀 우선 정리하고…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문이 닫힌 후에야 부랴부랴 ‘주여 주여’ 한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