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9
저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할례를 행한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 5:9).” 광야 생활이 끝이 났다. 그 땅의 소산물을 일궈 먹은 날 만나가 그쳤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2).” 그리고 여리고 앞에 설 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앞서 마중하였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5).” 이는 세 가지 크게 달라진 삶이다.
먼저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별됨이다. 또 하나는 정착의 의미로 소산물을 먹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부터는 실전이다. 앞서 내가 의지하였던 신을 벗고, 만나가 아닌 소출을 얻으며, 구별된 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약속의 땅 가나안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는 우리가 받은 시초의 명령이며 의무였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 이를 상실하게 살던 때는 죄로 인한 광야의 배회 때였다. 할례도 없고 그 땅은 소산물을 내지 않았다. 전적인 하나님 의존의 훈련시기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행함으로 감당하고 이와 같은 주의 권능, 주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고로 우리가 주를 의지한다. 한데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을 저버렸다. 이에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사 50:3).” 일련의 이런저런 사회현상이나 국제정세로도 이를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안타까움으로 되뇌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2).” 하나님께 향한 신뢰는 점점 희박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점점 강퍅해져 간다. 그러할 때 우리의 기도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4).” 곧 우리의 길을 지도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곧 오늘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데 있어 주를 신뢰하고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내 발의 신을 벗어야 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9-10).
우리가 의지하고 의뢰할 수 있는 것, 그 유일한 소망은 말씀이 역사하심으로 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나는 어제 더욱 주 앞에 나와 내 가족은 물론 우리 교회와 하나하나 그 영혼들이 오직 주만 바라고 주께 향하는 마음으로 올곧게 그 길을 가게 해주시기를 새삼 간구하였다. 아들은 시험공부가 길어질수록 말 수가 줄었고 자기와의 싸움이 깊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에서의 그와 같은 사투가 달갑지 않으나 그 또한 주의 인도하심으로 그 길을 선택하게 하신 것임을 인정한다. 다행히도 글방에서 교회로 오랜 시간을 같이 동행하는 믿음의 아들이 있는데 녀석도 같은 공부를 준비 중이다. 가끔씩 아이를 통해 그 공부가 어떤 구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있는가를 듣는다.
시험은 1, 2차로 나뉘는데 올해 응시는 만6천명 정도였고 그 가운데 3천명으로 1차에서 추려졌다. 한데 그 3천명 가운데 작년, 재작년에 1, 2차를 치르고 오롯이 2차만 준비한 천2백 명 정도가 포함된 숫자라 실제 1차로 걸러지는 숫자는 미미하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2차는 오는 6월에 치러지는데, 과목은 다섯 과목으로 한 번에 다 합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여 그 가운데 세 과목 이상만 우선 합격하는 것으로 다들 가닥을 잡고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전년도 전전년도까지 포함하는 숫자여서 실제 3천명은 온전하게 이번 년도에 합격한 숫자가 아닌 것이다. 아이도 작년에 1차를 낙방하고 이번에 1차를 통과하여 합격을 한 셈이고, 2차 과목 중 하나는 우선 남겨둔 채 네 과목만을 가지고 좋은 성과를 내는 게 목표라고 하였다. 결국 내년을 한 번 더 보고 가는 길이다. 그런데 2차가 생각보다 저조하여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작전상 내년에 1차를 패스하지 않고 치러(본래 1차에 합격하면 그냥 2차만 준비해도 되는 것인데) 2차를 준비한다고 하였다. 일종에 다시 1년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포석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처럼 어렵다고 하는 시험이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최소한 2, 3년 족히는 4, 5년을 준비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척척 붙여주시던가, 나는 내심 주의 부르심으로 신학을 하여 저 아이들의 명석한 두뇌가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좀 더 깊이 있는 성경 연구와 교수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 이 땅에서의 ‘보장된 생활’을 위해서도 이처럼 기를 쓰고 전력을 다하는데 하물며, 영생의 삶을 두고 주의 길을 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하다 잠깐 면구스럽기도 하였다. 물론 구원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없다. 그러나 영생의 삶을 두고는 다르다. 천국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열심을 다하려는 것은 누림과 영광의 문제다.
그러니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은 장하고, 허튼 데 마음을 두지 않고 젊음을 알차게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나 그와 같은 시간이 영적으로도 유익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기특하면서도 안쓰럽고 대견하면서도 속상한 것은 주님의 마음도 같지 않으실까? 자기와의 싸움이란 참으로 모진 것이다. 적은 오롯이 자신이다. 부디 아이들이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함으로 오늘의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결과는 주의 것이다. 물론 그 마음이 주께 붙들려 오바댜와 같이 다니엘과 요셉과 같이 이방 땅, 죄악된 곳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힘과 권세로 주의 뜻에 합하기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 사회가 밝고 정의로우려면 주의 자녀들이 세상 곳곳에 포진해야 한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곁에서 아이들의 노력을 지켜보면서 늘 마음을 졸이는 이유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주께서 든든히 세우시고 붙드시기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라, 말씀으로 양육하고 주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것뿐 스스로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것이다. 말씀으로만 정복할 수 있다. 나는 평소 아들과의 대화나 괜한 참견은 일체 피한다. 그럴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여 이를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으로 권하는데,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어제 아이와의 대화에서도, 그럴수록 주를 의지하고 말씀 붙들고 기도로 자신을 단단히 붙들어 세우며 걷기를 당부하였다.
말씀이 정복하셔야 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우리가 한 아버지의 자녀이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은즉,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저들의 수고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주가 사용하시려는 것이라.
누군 또 그 가정에 아이가 확진이 되면서 고열이 나고 고통 중에 있음으로 그 부모가 애간장이 탄다. 그와 같은 일들이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를 주가 아시고 우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로 주 없이 살 수 없음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저들 이스라엘 주의 백성들을 두고 주가 행하시는 일은 구별하는 것이고 그 땅의 수확을 먹게 하심이요, 저들과 마주하여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일이다. 이에 엄연히 주의 군대가 호위하신다. 선두에서 우리를 인도하심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다.
이는 성령으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세상을 살며 세상이 스며들지 못함은 마치 몽돌과 같이 단단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우리로 주가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이 땅에서의 안정과 보장된 생활을 위해서도 그처럼 기를 쓰고 죽어라 노력해야 하는 일인데, 하물며 주의 자녀와 천국 백성으로 산다면서 구별됨도 없이 어찌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겠나?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 수 3:1-2).” 곧 우리로 부당하고 악한 세상에서 부당하고 악한 길로 빠지지 않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3).
주는 미쁘사,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만이 우리의 살 길은 한 길 가는 순례자이다. 우리의 본향이 있다. 이를 위해 잘해야 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래서도 주를 더욱 의지함이다. 곧 오늘 아이들의 외로운 사투는 그 값이 이 땅에서의 보장과 안정된 생활로 보상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상의,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로 오직 주의 뜻을 바라는 데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늘 그리 이르고 설교를 통해 말씀으로, 평소 아들에게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대신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이것이 우리로 이 땅을 살게 하신 이유다. 이 값지고 귀한 시간이 때론 고되고 외로운 길이지만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라고 의뢰함이라니! 우리가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그리하여 복이 많다. 우리의 생각은 오직 주께로 향하는 것,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고작 인생이란 그뿐이지만, 그리하여 더욱 주를 바람이라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 오직 주만 바라고 주께로만 그 마음이 향하기를.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시편은 함축하여 찬양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9-10).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 우리가 주의 자녀들로 천국 백성인 것. 그 영원한 삶을 앎으로 이를 준비하고 더 나은 구원을 이루고자 달음질하는 것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노인 바울이 곧 죽음을 앞두고도 그 마음에 주를 향한 마음이라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우리의 비밀은 이것이었다. 단지 천국 백성이 된 것과 죽어 천국에 간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 땅에서도 이처럼 죽을힘을 다해 공부를 하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데, 천국의 그 놀라운 영광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그 영광을 바라고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를 세상 논리로 받아 오해하면 안 된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사랑 받고 싶고, 사랑을 잃을까 하여 더욱 더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막연한 느낌으로가 아니었다. 나는 오늘 시인의 기도를 그리 읽는다. 단지 이 땅에서의 생명 보존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겠나?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1, 2).
(왜?)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6-7).
곧 하나님만이 선을 이루신다. 오직,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9).
왜냐하면, 우리의 자랑은 하나님뿐이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