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수 9:27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창가의 화초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놓인 그대로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그 생명을 다하며 꿋꿋하게 푸르른 모습은 경이롭다. 창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화분의 흙을 만져보고 물을 준다. 햇살과 바람과 물만 있으면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는, 화초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제는 길을 걷다 문득 본 것 같은 새싹들을 보았다. 사물의 하나로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마른 가지에서 푸릇푸릇 새순이 돋고, 돌 틈 아스팔트 사이에서도 파릇하니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13).
주어진 상황에서 그 생명을 다하여 주를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 복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은 한 민족의 생명력을 보게 된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수 9:27).” 당시 주변국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는 때에 ‘기브온 주민’들은 달랐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들었다. 저들은 꾀를 내어 먼 길에서 온 자들로 꾸며 자신들과 조약 맺기를 간청하였다(4-6).
비록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묻지 못하고 저들과 화친하여 살려둔다(14-15). 뒤늦게 이를 알지만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19).” 하고 저들을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로 삼았다. 그럼에도 저들은 다행으로 여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25).” 이는 주를 경외함이고 그 생명을 보존하는 데 있어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한 일이다. 하여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저들을 건져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날에 저들은 주의 백성들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이 되었다. 이처럼 주어진 한 생을 다 한다는 것,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오늘 이 한 구절의 시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것 같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두려워할 줄 앎으로 온전한 공경과 주를 인정하는 마음이 가득함이다. 생의 가장 절박함 앞에서 우리로 주를 찾고 주께 의뢰할 수 있는 마음은 복이다.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셔서 구원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주신다. 한 달에 한 번 첫 주에 그리하심으로 나는 여느 주간과 달리 헐렁하고 느슨하다. 대신 주변에서 오미크론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로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저들이 겪는 오늘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된다. 다음 본문으로 준비하고 있는 시편 88편의 시에서 나는 생의 고통과 절박함이 복의 기회가 된다는 것에 가닥을 잡았다. 본문은 하나님의 징벌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 절규하는 시이다. 표제에 따르면 저자 ‘예스라인 헤만’은 솔로몬의 지혜를 설명할 때 비교하는 대상으로 언급될 정도로 탁월한 지혜자이다.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왕상 4:31).”
시적배경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표제의 밝힌 ‘마할랏르안놋’이란 뜻은 ‘질병 중에’ 또는 ‘고통 중에’라는 뜻으로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시편에 실린 36편의 비탄 시 가운데 가장 절박하고 애처로운 시로 꼽혀 욥의 상황을 연상케도 한다. 시의 구조는 5연으로 나누어 1연은 1-2절,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주께 부르짖는 모습이 그려지고, 2연 3-5절에서는 다급함을 주께 토로한다. 3연 6-9절은 자신의 죽음과 소외를 통해 하나님의 징벌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4연은 10-12절로 죽음이 가져올 망각과 멸절로 인하여 절망하며 두려움을 아뢴다. 끝으로 5연은 13-18절,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을 간구하며 절규한다.
고통 중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나는 길을 걷다 돌 틈새, 아스팔트 사이에서 파릇하니 돋아나는 생명을 보면 경이롭다. 동시에 살아 있다는 것의 숭고함을 되새긴다. 시편 88편은 그러한 시이다. 우리는 그렇듯 무덤의 문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누구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부디 오늘의 저들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하나님이 주신 삶의 숭고함과 그 사명의 소중함을 다시김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그를 위해 더 극심한 고통을 간구할 수는 없으나 주의 긍휼하심을 다시금 깨닫고 뉘우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기회가 되기를. 그리하여 이제 남은 생은 온전히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30:1-2).
살다보면 생의 어느 깊은 곳에서 주를 부르게 될 때가 있다. 이는 엄연히 주를 알고,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주가 나를 돕는 이심을 확신하는 데서 시작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68:19).
이와 같은 고백과 체험이 없는 신앙은 황량하다. 그럼에도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신음한다(시 88:1-3). 그럼에도 주를 안다는 것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4).
하는 자신만의 체험이 보화다. 이와 같은 보물을 마음에 가자고 살면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고 주는 나를 멀리하는 것 같을 때도,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31:22).
이것이 우리 믿음의 생명력이다. 이는 결코 끊어질 리 없고 외면당할 수 없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은 오히려 돋보이고 확실하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시 88:4).
그러할 때도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2-13).” 때로는 육신의 질병이 또는 생활의 어려움이 우리를 목줄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주 앞에 선 것이다. 그러할 때 바울의 설교처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더욱 주를 바라고 주만 의뢰할 수 있는 주의 능력은 고통 가운데서다. 이때에 우리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시 88:5).
아무리 우리의 생이 어떠하다 해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이보다 더 귀하고 복된 소식이 또 있을까?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 116:15).
어떤 죽음은 그러하고 어떤 죽음은 저러하였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2).” 고통의 극단에서 주의 참 선하심을 본다. 누구는 거지로 죽었으나 천사에 받들려 천국에 이르고 누구는 부자로 죽었으나 불꽃 가운데서 신음하며 고통이 시작된다(눅 16:22-24). 영원한 삶이란 이처럼 죽음 너머의 일로 때로는 막연하나 때로는 확실하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에 우리의 생사화복은 모두 하나님께 있음이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시 88:6-7).
이를 알았던 소수의 민족은 꾀를 내어 생명을 보존함으로 살았다. 여호수아의 실수인 것 같으나 이 또한 주의 긍휼하심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곧 우리는 앎으로 주를 찾는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의지한다. 누구의 아픈 소식으로 나의 기도는 어지러웠다. 그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구하다가도 엄히 그 상황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고 주의 긍휼하심 앞에 승복하기를 바라게도 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이 놀라운 고백은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시 31:15).
주를 의뢰한다는 것, 좋을 때나 싫을 때나 주를 인정하며 주 앞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의무이고 축복이었다. 내가 화초들을 감탄하는 것은 더욱이 열악한 생의 최전방 같은 도로 길가 아스팔트 틈새에서 그 좁은 흙을 발판으로 생명을 틔우는 여린 숭고함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도 그와 같아서이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오직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맡김으로 복되었다. 때론 심각한 소외와 외면을 당하면서 오히려 하나님만 의뢰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 88:8).
이 또한 주의 섭리 가운데서 받아들이고,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38:11).
그러함에도 우리 주님이 먼저 보여주셨던 놀라우신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게 보게 되는 것,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이는 바울도 같아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곧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어려움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의 최종에 동참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 중에 주를 찬송함이 우리의 영광이고 하나님께 기쁨이었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삼하 24:14).” 우리가 주께 붙들린다는 것, 이보다 더 귀하고 복된 사실은 없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 18:6).
기도란 실제고 삶이다. 허상도 꿈도 낭만도 아니다. 막연한 기대도 희망도 아니다. 자주 아프고 때론 늘 아픈 듯 지겨울 때도 있지만 나는 나의 나 된 것으로 오히려 주를 더욱 바람이었다. 그것으로 주를 바람은 자주 나를 돌아보고 주 앞에 온전한가, 근신하게 한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고통의 미학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때이다. 나는 저의 입에서 주여,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나오기를 기도한다.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절박할 때는 고상함도 자신의 자존심도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오직 주만 바라게 된다는 것, 이를 오늘 시편으로 축약하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실은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못난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생명력이 강한 양버즘 나무들이 사람들의 생의 최전방에서 방어한다. 앙상하게 말라 죽은 줄 알았던 플라타너스 가지마다에서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것을 보면 어김없이 겨울은 지니고 봄이 오고 있는 데서 경탄이 저절로 나온다. 주는 살아계시며 오늘도 역사하신다. 우리 생을 주장하시며 주관하신다. 아플 때나 평상시에도 동일하시다. 어떠하든지 주를 바람은,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68:6-8).
하나님의 실재, 그 실존의 역사하심을 가장 감사히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이 공교롭게도 우리가 고통 중에서이다. 그러할 때,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19, 28).
주를 바라고 주만 신뢰하며 주를 의뢰할 줄 아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능력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