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수 10:8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 69:5, 32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허공에서 외치는 메아리 같은 게 아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문득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누린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즐기고 마음껏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내어 이스라엘 앞에 굴하고 화친하였다. 이를 알고 주변국들이 연합하여 기브온 성을 치려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저들을 물리치고 이 모든 소요를 평정한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수 10:8).” 아직 시작도 안 한 전쟁을 두고 하나님은 일찍이 약속을 하신다. 이는 일찍이 주의 이름으로 약속하신 말씀이다.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출 23:23).”
하나님이 행하신다. 우리 앞엔 산적한 문제들이 있고, 어떤 일을 두고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괴롭기만 하다. 그러할 때에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사 45:2).” 하시는 말씀 앞에 놀라운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누린다는 것은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 옳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 22:24-26).” 즉 네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낭만 따위를 티끌로 여기고 오직 전능자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면 기쁠 것이다, 하는 소리다. 물론 저의 말은 옳으나 하나님께 엄히 야단을 맞고 욥의 기도함으로 용서를 받는다. 왜냐하면 저의 말은 옳으나 옳은 방향에서 한 게 아니었다. 곧 욥을 공격하는 데 이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42:7).” 옳은 말도 상처가 되고 남을 찌르는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엘리바스의 말처럼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함은 하나님이 보화가 되시고 고귀한 은이 되어 우리의 전능자로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는 기뻐하며 하나님께 얼굴을 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느낌이 그렇다는 고백으로 전부가 아니다. 저를 느끼고 맛보고 누리는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다시 음미한다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 69:5, 32).
가령 연애하고 좋아할 때는 가리고 숨기며 예쁜 모습만 보이려고 하지만 사랑하여 서로 한 몸을 이루면 더는 숨길 것도, 꾸며서 보이려고 할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가 좋고 귀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가식을 떨며 살아야 할 때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를 다 드러내며 같이 나누고 덜어서 사랑을 누린다. 더는 그런 게 허물이 되고 비굴한 게 아니다. 내가 숨기고 있던 상처와 남모르게 안고 살던 모든 괴로움도 서로가 한 몸이 되었을 때는 같이 나누고 누림으로 기쁨이 된다. 투덕거리면서도 같이 씨름하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막연한 공경과 예의를 갖추는 친절로써가 아니다. 나의 우매함도 나의 죄도 숨김이 없다. 마음이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그 마음이 소생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지식에 넘친다. 곧 우리 머리로는 이해와 상식을 초월한다. 아무리 우리 죄가 깊다 해도, 그 죄악이 무겁고 높고 끝도 없이 많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으로 넓고 길고 높고 깊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를 누린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긴장하고 격식을 갖춰 때론 가식적이었다 해도 집에 돌아오면 아내 앞에서는 순간 어린 아이 같이 다 풀어놓고 숨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에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귀하게 여겼던 것을 티끌로 여기면 전능자 하나님이 나의 보화가 되신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 22:24-26).” 내가 주를 기뻐함으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것이라는 것. 예수님도 이르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즉 하나님이 나의 사랑이신가? 하면 저는 나의 보물이다. 내 마음이 저에게로 향한다. 이를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찬송이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다시 말하면 주가 나를 사랑하심이 내 생명보다 낫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다. 이는 욥의 고백과도 같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저를 신뢰함으로 내 모든 행위를 고한다. 사랑한다. 이는 오늘 내게 두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주의 인자하심으로 받는다는 소리다. 곧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승복하면 오늘의 건강도, 삶의 이런저런 여건도,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아, 이 고백이 내 것이 되어 살아가는 날들이라면 더는 무엇을 상대로 괴로워하고 낙심하겠나?
오늘 여호수아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얼마 전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렸다. 아이 성과의 전투에서는 실패도 있었다. 한데 왜 남의 전쟁에 휘말려야 한단 말인가? 저들이 연합하여 기브온 성을 치려하든 말든… 그러나 하나님이 앞장서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전적으로 기브온을 위한 게 아니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심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42).” 곧 우리로 인하여 우리를 인정하는 이들에게까지 주의 승리는 전가된다.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광포가 있다. 특히 예기불안이라 하여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우리로 두려워 떨게 하기도 한다. 혹은 학습된 무기력과 같아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두려움도 있다. 시편 88편 10-12절을 보면, 고난이 주는 과대 공포증이 어떤 것인가 알 수 있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인의 내적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알게 하는 순간이다. 마치 하나님께 따지고 묻듯이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하고 억지를 쓴다. 아무리 주의 인자하심이 크고 놀라운 것이라 해도,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하고 되묻는다. 죽고 난 뒤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이 말이다. 내가 지금 ‘흑암 중에서’ 또는 ‘잊음의 땅’ 곧 고통으로 망강의 늪을 지나고 있는데 ‘주의 기적’이 무슨 소용이고, ‘주의 공의’가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자괴감으로다.
그러한 자포자기 같은 심정이 들 때도 있다. 아브라함이 약속으로 주신다는 아들을 기다리다 아내도 늙고 자신도 나이 들어 더는 가망이 없다는 판단에서 집에서 기른 충신으로나 혹은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나 잘 키워 그 약속을 대신하겠다고 궁싯거리는 것과 같다. 그때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4).” 하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당연히 우린 할 수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능치 못함이 없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곧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어제도 고통 중에 있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좀 어떤가? 하고 물었다. 가족이 모두 양성으로 확진 되어 고통 가운데 있는데, 그 신랑의 작태가 너무하긴 하다. 오후 두 시가 다 됐는데 저는 여태 밥도 안 먹고 약도 못 먹고 있었다. 아들과 신랑 밥을 차려주고 심지어 고기까지 구워주고는, 아무도 같이 고통 중에 있는 저이를 돌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오겠나? 인간 타령을 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데 그도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 참 너무한다는 생각뿐이라. 그러니 듣는 나로서도 할 말을 잃는데 당사자인 저는 오죽할까 하여 뭐라 하기도 그렇고, 안쓰럽기만 한 것이었다. 듣다보면 늘 드는 생각이 구제불능이라. 어찌 저런 인간과 같이 더 남은 생을 살라하겠나 싶기도 하고, 그런 이가 어찌 주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나 싶기도 하고… 오죽하니 나는 말하길, 전화를 안 해볼 수도 없고 들으면 덩달아서 시험에 드는 것 같으니, 원. 이를 어쩐다? 우리의 영적침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 88:15).
고착된 설움과 학습된 무기력은 원망과 좌절만 일삼을 뿐이다. 저들 내외의 일련의 여러 사연을 두고 나는 늘 마음이 어렵다. 평신도라 해도 문제고,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해도 가관인데 하물며 주의 사역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터에… 도대체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가? 싶은 것이다. 한데 늘 듣다보면 이 일이 어제 오늘의 문제로가 아니다. 누적된 죄의 습성이고 고립된 영혼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신 것일 텐데, 어떻게 저들을 상대해야 하나? 나는 내 안에 두시는 어려운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기브온 성을 둘러싼 여러 국가들이 연합하여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한 마음이 들면 ‘저의 맹인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는 궁금증이 저절로 생긴다. 그럴 때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1-3).”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로 하여금 저의 일에 어떤 속상함으로 함께 하게 하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이라 확신하게 된다. 우리 안에는 이처럼 고착된 고질적인 영혼의 문제들이 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3:2).” 나면서부터 그러했으니 저로서는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0).” 무려 열두 해 동안이나 겪은 일이다. 그 마음에 절박함이 필요하다. 이를 알지 못하며 괜한 일에 참견하는 것 같고, 공연히 마음 쓰는 것 같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
오늘은 전화하지 말아야지, 더는 관여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주가 두시는 마음은 그런 게 아니다. 오늘 여호수아에게도 이르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수 10:8).” 곧 그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2-28).” 이 여인의 필사적인 간곡함이 주가 주시는 마음이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7:15).” 당하지 않고는 길을 찾지 못한다. 이에 저의 고통이 저로 순종하게 할 것을 믿는다. 그리 여기고 기도하며 전화라도 한 통 하여 상황을 묻는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7).”
오히려 우리를 끔찍하게 하는 것은 ‘이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무사 안일한 마음으로의 간과하게 하는 죄다. 이에,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시 88:16).
고통이 축복이라는 말, 참 듣기 거북하고 말해주기 어려운 이 진리를 당해본 사람은 안다. 죄의 삯이 얼마나 끔찍한가는 죄에 걸려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하여 바울은 누누이 강조한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그런다. 있을 때 소중한 것을 모르면 거두심으로 그 사실을 확인시키신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2).”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하루라도 빨리 이를 알고 뉘우쳐 주 앞에 고하는 게 상책이다. 이를 위해 우리로 어둠 가운데도 두신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하나님이 빛 되심을 확실히 알 게 된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 88:18).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들, 저들이 졸지에 증발하는 사건을 나는 경험하였다. 그리고 더는 예전과 같이 함께 즐기고 좋아하던 것을 멀리하게 하셨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때론 외롭고 때론 그립다. 생각이 밀려들 때면 억함이 들기도 하지만 이상한 것은 예전의 내가 아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세상을 우러르는 것을 보면, 예전에 내가 그러했던 것들까지 불편하고 혐오스러워진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아, 나는 이제 이 말씀을 알겠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올려드릴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막연하게 믿습니다, 고백하고 형식으로 교회에 나가고 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늘 여호수아는 이를 깨닫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고로 우리도 승리할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42).” 모든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고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시 69:5).
하나님 앞에 숨기고 가릴 게 무엇이겠나? 우리가 주를 누림은,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2).
우리의 기쁨이 파생되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주변에서부터 더 멀리 세계 방방곡곡까지 전파될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13-14).
주가 이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35-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