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수 11:23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4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전쟁을 알리는 일과 같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를 대적하는 우리 안의 속성과 우리 밖에 형성된 문화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저들은 말을 하고 행동하고 우리는 행동함으로 말씀을 준행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다’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것. 세상은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우리는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던진다. 이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얼까?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나는 종종 아들의 기도에서 그 답을 얻는다. ‘오늘도 성경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살게 해주세요.’ 하는 이 짧은 내용 속에 진리가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주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곧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는다는 데서 얻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17).” 곧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
다시 읽으면 우리 속에 불의가 없는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 교훈이 말씀하시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 교훈은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묵상한다. 묵상한다는 것은 상고하는 일로 우리의 영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곧 오늘에 주시는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 그리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이 놀라운 고백을 내 것으로 삼고 사는 일이 복되었다. 사탄은 욥을 시험할 때에 그의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차례로 치고 건드렸다. 물론 사람인 욥은 이를 괴로워하고 심히 고통스러워하지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이는 대단한 신앙이지만 저로 하여금 그리할 수 있게 한 것은 평소의 신실함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신실함은 우리 안의 만족함으로 얻어진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고백,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는 것, 지금은 비록 한계가 있고 유한하며, 불안정하고 제한된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자족하는 삶’으로 살게 하신다. 이에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다시 읽으면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자족하는 마음과 경건한 삶은 일치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선적으로 신뢰하는 일이다. 이는 그리 여기고 막연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현실로써 ‘나보다 나를 더 높이 다니게 하시는 일’이다.
가령 요즘은 오미크론의 확산으로 아내의 수입이 반 토막 나고 자연히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줄었다. 그와 같이 교회도 어려워서 이번 달 임대료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손길을 통해 뜻하지 않은 감사의 예물이 들어오게 하셨고 이는 맞춤하니 임대료를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덕분에 나는 요즘 누가 나의 묵상글을 깊이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주 안에서 서로 연락하게 하심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직접적인 체험이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면서부터 오늘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의 곳곳에 포진하여 주의 손길을 알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주가 함께 하심을 누리는 일이다. 더욱이 교회를 이뤄가면서 매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다루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말씀으로 증거가 되고 우리의 행함으로 실현이 된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나아갔고, 모세는 주저하고 두려운 마음에서도 말씀을 따라 준행하였다. 곧 우리가 주를 알고 느끼고 함께 한다는 것은 손에 쥔 확실한 무엇을 가지고서가 아니다. 오히려 빈 손인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기쁨, 말도 안 되는 말씀이 현실이 되어 늘 나의 손에 들려 있다. 세상은 조건에 따라 기뻐하지만 우리는 기뻐함으로 조건은 의미를 잃는다. 다만 성경이 우리 삶에 실현되는 것을 본다. 나의 하루는 그러하여서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고 글을 쓰고, 이를 위해 책을 읽고 성경을 본다. 누구와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종일 주를 생각한다. 묵상함이란 어떤 일, 누구의 사연 혹은 나의 어려움을 두고 되새김질 하는 일과 같다. 말씀을 보고 책을 읽고 대화를 하다 다음 날 아침, 그것으로 묵상글을 쓰고 그것들이 모여 주일 날 설교원고가 된다.
나는 나보다 나이어린 동기들에게 교회 개척을 주저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주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를 말이다. 막상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더욱이 늘 도망치다 끌려온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부디 나처럼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조건 뛰어 들기를. 만일 아브라함이 손익계산을 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운운하며 미적거렸다면, 저는 일흔다섯의 나이에 여태 안주하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었겠나? 모세가 애굽으로 가라 하시는 말씀 앞서 앞날을 설계하고, 계획하고 조목조목 그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느라 뜸을 들였다면 저는 결코 주의 명령을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 헌신이란 그만큼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불가능한 일투성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쫓기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다윗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찬송이 나온다는 것은 기가 막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37:3-4).
아,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고 사는 일, 이는 몸소 겪은 현실이다. 나는 일련의 우연한 만남과 지난 한 주간의 일을 돌아보면 새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데 더욱 확신을 얻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나 뛰어들고 우선 길을 나서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살아지는 현실’을 사는 일처럼 '거저 먹는다.' 나는 솔직히 민망한 소리지만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인데 주의 은총으로 거저 산다. 맞닥뜨리는 일이 모두 그러하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이는 바울의 놀라운 설교와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니 이제 나가 주의 것이라는 데서 얼마나 안도하며 사는지!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노후가 없다. 이제 나이 들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정리한다는 소리는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저들은 죽음으로 끝이라는 생각을 하고 삶을 정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현실이다.
곧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노인 바울이 것도 감옥에서 곧 이태 뒤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런 현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하는 소리였을까? 그럴 리 없다. 그쯤 되면 할 만큼 했고, 이제 자신을 돌보며 회고하고 늘그막에 생을 정리하며 자신의 노년을 안주해려 해도 흠이 될 게 없다. 그런데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하는 저의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면,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실인 것이다. 저는 여전히… 달려간다. 이는 ‘부름의 상’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기 중에 누구는 여전히 주저하며 여러 해를 아무런 진척 없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이가 들고 금세 죽음이 그 앞에 다가올 것을 저는 아직 이른 나이라 실감을 못하는가 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습성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이는 매우 본능적이다. 저를 붙들 듯 모든 믿는 자들을 발목을 묶는다. 또 누구는 이런저런 일에 막힘이 있어 경험상으로도 더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부르심의 사명은 다 잃은 듯 수동적으로 교회 일을 하고 사무적으로 직업군의 하나로 살아간다. 모두가 로이드 존스 목사의 표현처럼 ‘영적인 침체’에 빠졌다. 침체는 진전이 없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그리스도인 곧 거듭난 영혼의 날들은 그와 같이 전투와 전투 속에서 주의 살아계심을 실현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주변국들이 연합하여 군대를 보냈다. 하솔 왕 야빈이 마돈 왕 요밥과 시므론 왕과 악삽 왕과 및 북쪽 산지와 긴네롯 남쪽 아라바와 평지와 서쪽 돌의 높은 곳에 있는 왕들과 동쪽과 서쪽의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산지의 여부스 족속과 미스바 땅 헤르몬 산 아래 히위 족속에게 사람을 보내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다(수 11:1-4). 오죽하니 그 수가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다고 표현하였다. 이 왕들이 모두 모여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 가에 진을 쳤다(5).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위협적이고 이와 같이 현실을 초래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안심시키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주어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6).” 그런데 내일은 엄연히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다. 오늘은 저들이 위협적으로 포진하였다. 일어나 봐야 아는 게 내일이다. 말씀만 믿고 의연하게 기다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저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처럼 나로 하여금 더는 세상에 머물지 않도록 여기까지 이끄셨다. 그러는 동안 홍해와 같은 불가능한 현실을 지나왔고, 광야 40년 동안에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셨던 것처럼 한 번도 굶기지 않으셨고 옷이 해어진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늘 마음은 간당간당하여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불안은 여전하다. 여러 궁리에 사로잡힌다.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교회를 다시 글방으로 주력하여 이를 주의 일로 삼으면서 돈벌이도 하고 교회도 하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늘 되풀이 한다. 누구처럼 곧 운신이 어려운 노인이 될 텐데 그 전에 다만 얼마라도 모아 나도 노후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아내는 어디서 보고 알았는지 무슨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추천하는 사이트를 링크해서 보내오기도 하였다. 그냥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어떤 불안감.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무력하여 어디 공모전에라도 글을 좀 보내 얼마라도 돈을 좀 벌어볼까? 하는 생각.
그러할 때마다 붙드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말씀은 고개를 저으신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8-19).” 그렇다면 오늘의 나 역시 '육체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 목사가 되면서 나는 주 앞에 다짐한 것이 하나 있는데 더는 돈벌이를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것이었다. 누구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니 글을 쓰는 일에서도 돈벌이를 위해서는 안 한다고 말이다. 묵상글이나 설교문은 창작글이 아니다! 모두가 남의 글이고 어디서 들은 설교이고 말씀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누구를 생각하고 저와 만나는 일은 모두가 주의 부르심에 합당한 일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은 연합하여 공격하듯이 생활을 위협하기도 하고, 어떤 무기력이나 괜한 자격지심이 나를 억압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일련의 상황이 주가 천사를 보내시고 그의 손길로 오늘을 이끌고 주도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딱 그만큼, 더도 덜도 않고 딱 그 정도에서 경험하게 하신다. 우리는 서로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넘치게도 모자라게도 아니하고 딱 그 정도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32:11).
곧 우리가 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일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16:11).
곧,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5).
실제 나는 저의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감동하게 하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늘도 이처럼 한 편의 묵상글을 쓰면서 하루를 시작할 뿐, 우리의 모든 남은 날은 노인이 되는 것도 노후의 삶을 즐기는 따위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오늘이다. 죽음으로 생을 다하는 날에도 오늘이 일할 뿐이다. 의인의 죽음은 그 값이 크다. 살아서 사는 날 동안 다를 바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다. 나는 지금 은퇴를 하고 평생 회사생활로 찌든 자신을 위해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시간’을 꿈꾸는 손위 처남의 노고에 마냥 응원의 마음을 보낼 수는 없다. 이는 세상의 구호다.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 ‘떠나라.’ 하는 부추기는 외침은 사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고상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다. 존 파이퍼 목사는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느니, 일찍 생명을 잃는 것도 낫다고 단호하게 설교하였다. 이는 엄포가 아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어제는 공교롭게도 오랜만에 친구의 전화도 받았다. 3월로 해서 반평생 영화제에 몸담고 살았던 영화판을 떠났다. 군대 갔다오고 시작한 일이 굵직굵직한 영화제를 맡아 하게 되면서 저의 천직이 될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은퇴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저의 첫 마디는 ‘몇 개월 좀 쉬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도 좀 만나고, 산에도 좀 다니고, 기회가 되면 유럽 어디로 여행도 좀 다녀오려고, 하면서 허탈한 목소리로 시원섭섭한 듯 말하였다. 곧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런 점에서 조만간 찾아오겠다는 연락이었는데, 나는 수고했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 말이 내 입에서는 떫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동안 사회 일에 쫓겨 등한히 여겼던 교회 일과 말씀 보는 일과 남은 시간을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데 있어 어디 성경공부도 좀 할 수 있으면 좋겠어! 하는 소릴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노인 바울의 목소리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는 데서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며, 고작 남은 인생 2, 30여 년의 노후를 꿈꾸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들떠 마음을 설레는 일보다 백배 천배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듣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죽는 날까지도 ‘복음을 증언하는 일’로 그 사명의 날이다. 오늘 다윗의 시는 그와 같은 유혹과 도전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주께 아뢰는 것은 아닐까?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70:3-4).
세상은 온통 자신들이 깨달은 바, 아하 아하 하며 인생을 즐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5).
하는 기도와 함께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42:2, 14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