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 해 돋는 쪽 곧 아르논 골짜기에서 헤르몬 산까지의 동쪽 온 아라바를 차지하고 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
수 12:1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 71:14
낙심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좌절을 즐거워하는 사람도 없다. 자살까지 하는 이들의 심정은 더는 낙심하기 싫어서,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제 묵상하게 된 말씀에서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이를 시적으로 운율을 살려서 읽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결론부터 읽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람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동안 모든 것은 낡아진다. 손에 익숙한 성경이 낡고, 가방이 낡고, 연필이 낡고, 사용하는 몸이 낡아진다. 그렇게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하실 때 속사람은 보일 리 없어 난감하나 이를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겉사람으로만 살고 속사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무슨 소린가 할 수 있겠다. 이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를 위하여 잠시 받은 환난의 무게에 대해 역설하는데, 그 가벼움을 영원한 영광의 무거움과 비교한다. 여기서 ‘낡아진다’는 의미는 성경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일러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낡아지지 않는 배낭, 곧 그 낡아지는 데는 좀이 먹어서이다. 좀은 작은 벌레로 빈대가 있고 나무좀이 있고 돌벼룩좀도 있다. 이는 동물로 길이 11-13밀리미터로 작고 흑갈색 비늘을 하였다. 머리에 서너 개의 강모가 나있고 꼬리는 중앙에 긴 강모가 있다. 모직물이나 식료품 따위를 파먹고 나무의 해충도 감람나무 사과애기속 좀이 있다. 북한 속담에 좀벌레가 퇴기둥을 넘어뜨린다는 말이 있는데 ‘하찮은 게 큰일을 망쳐놓는다’는 의미다(표준어국어대사전 참고). 곧 이 땅의 모든 것은 좀 먹어 낡아지기 마련이다.
또한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계 8:9).” 깨진다 할 때도 낡아진다는 의미와 같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설명하면서,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29:5).” 할 때의 해어지다의 의미도 같은 것이다. 이를 함축하여 우리로 낙심한다고 할 때 낙심과 좌절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부서지는 것,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멸망시키신다는 의미도 같다. 그 대상은 땅을 망하게 하는 것들이다.
오늘 본문은 서른 명의 왕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점령하고 들어가는 우리의 속사람의 상대적인 열거다. 사도요한의 계시처럼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계 8:9).” 죽고 깨지고 하는 것이 우리 육신도 다를 것은 없으나 우리의 속사람은 상대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르다. 모든 피조물은 낡아지고 해어지고 부서지고 깨진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이는 모든 피조물의 숙명이다. 모든 것은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는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누구나 몸의 속량, 질병과 재난과 고초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란,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26:11).
내가 완전할 수 있는 길은 완전하신 이의 뜻으로 사는 길뿐이다. 곧 완전하신 이의 품에 안길 때 나도 완전하다. 내가 의인인 까닭도 나의 의로움으로가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 속량하신 예수의 의로 의인이라 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31:5).
그러므로 이를 알고, 믿고, 산다. 누구도 대신하여 서로의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 아무리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그 부모나 자식의 질병이나 슬픔도 대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49:8).
고로 이를 앎으로 우리는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진다. 새로워진다는 의미로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곧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다. 곧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새로워진다는 것과 자라간다는 것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온갖 세상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 날로 새로워지는 비결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곧 이 땅에서의 염려나 낙심, 좌절에 휘둘리지 않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저마다 한 날의 괴로움으로 족한 것이다. 곧 내일은 내일의 괴로움이 있다. 인생이란 죄로 인하여 이를 피할 길이 없다. 한데 이를 통하여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우리가 할 수 있는 참된 것, 영원한 것을 바라고 사모함으로,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 71:23).
오늘 시편의 찬송이 그러하지 않은가? 내가 주를 찬양하는 것은 주께서 나를 속량하신 내 영혼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날마다 내 안의 것을 하나씩 죽여 나의 속사람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겠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 곧 서쪽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 산까지 쳐서 멸한 그 땅의 왕들은 이러하니라 (그 땅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구분에 따라 소유로 주었으니 곧 산지와 평지와 아라바와 경사지와 광야와 네겝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라)(수 12:7-8).” 이미 나를 차지하고 있던 것들, 이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여 차지하는 삶이 믿음의 성장이고 성화의 과정이 아니겠나?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의 자유, 마침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종종 고백한다. 우리가 주를 믿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른 데 기웃거리며 어떤 살 길을 모색하며 사느라 여념이 없던 시절을 생각하며 치를 떤다. 나를 목사로 또는 주의 자녀로 부르심은 뭔가 엄중하고 대단한 일을 맡기시고자 함이 아니요, 곧 나 자신으로 주 앞에 온전하여지기를 바라시는 것인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주를 경외함으로 그 특징은 족하게 지낸다! 저와의 통화에서 언제부턴가는 서로의 감사뿐이다. 이런저런 일이 왜 없고 그에 따른 어려움이나 낙심하고 좌절할 일이 왜 없겠나? 한데 우리의 대화 마무리는 주께 감사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27).” 다른 말에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이에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제는 이와 같은 말씀에 시샘이 난다. 나도 항상 자족하여 어떤 일에 처하든지 일체 감사를 잃지 않고 싶다. 물론 나는 못한다. 내가 아는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하고, 수시로 지금도 어쩔 수 없는 자신 앞에서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나는 못할 것을 알지만 나로 하게 하시는 이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다.
내 주제가 말도 아니고, 내 코가 석 자인데도 나로 하여금 자꾸 남을 돌아보게 하신다. 누구는 좀 나아졌는지, 저는 어찌 결심하고 주의 길을 가는데 충실한지, 저 아이는 어째서 그런 성향으로 힘들어 하는지, 그 부모가 어떠한지….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쓰임으로 내가 힘에 부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한 친구가 있다. 이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때론 이런저런 사소한 일까지 기도부탁을 한다. 어제는 일찍 잠들었는데 잠결에 계속 카톡이 들어왔다. 계속 속 섞이는 세입자문제와 함께 어디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몇 중 추돌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연이은 추돌사고에서 자신들 차만 간신히 추돌을 피하고 섰고, 그 뒤에 오던 차도 뒤에서 멈췄는데 이어서 연이은 추돌이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그때 문득 내가 생각났다며 항상 나의 기도로 주가 보호하심이란 생각이 퍼뜩, 들어 감사하였다고 한다.
나는 늘 사랑에 빚진 자로 산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고작 내가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너무 사소하여, ‘바람이 불고 해가 지는 일처럼’ 사소할 뿐인데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주께 송구하기만 하다. 이렇게 쓰는 묵상글도 그렇다. 나는 날 위해 내가 겨워 주 앞에 붙드는 말씀이고 생각이고 나의 소소한 이야기일 뿐인데, 이것으로 누군가는 주를 바라고 주를 더욱 의지한다고 하니… 요즘은 새삼 느끼고 더욱 애쓰는 것은 ‘고작’ 묵상글 하나 쓰는 게 전부인 사람이라 민망한데, 이를 위해 더욱 ‘공부’를 한다. 더 열심히 듣고 읽고 밑줄 긋고 메모하고 누구의 일을 마음에 두어 주께 아뢴다. 나름은 이를 묵상글로 쓰기 위한 것이라면 말이 되기는 할까?
이를 위해 더욱 알고자 한다면, 우선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자 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나는 종종 내가 무얼 쓸지, 쓰고 있는지도 모르고 쓴다. 책상 위에는 성경과 함께 전날에 메모했던 여러 장의 메모가 널브러져 있다. 이를 오늘 본문으로 다시 묵상하는데 어느 것도 연관이 없는 게 없고, 괜한 일은 하나도 없다. 모처럼 친구와의 긴 통화도 서로의 안부에서 주가 함께 하심을 삶으로 각자가 느끼고 체험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언제부터 그러 사이였던가? 나는 제일 감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세상 즐거움을 즐기며 젊은 시절 철없이 주를 멀리하고 지내었던 친구들과의 신앙 고백이다. 서로의 삶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서로의 감사로 이어진다. 또한 누가 나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이제 메모를 하고 아예 저들 사연을 적어두는 노트를 곁에 둔 것도 그래서이다. 저의 새로워짐과 감사가 나의 영혼을 즐겁게 한다.
오늘 여호수아서에 나열되고 있는 점령하는 왕국의 왕들 이름처럼 내 안에 나의 영혼이 점령하고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숫자가 늘어가기를 기도한다. 나로 기도하게 하는 누군가의 기도 부탁과 이를 기꺼이 받아 적고 주께 조아리는 일은 또 다른 점령이고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럼 그럴수록 나는 주께 피한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감히 저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을 한 게 없는 사람인데,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시 71:1, 3).
곧 저이들로 인하여 나는 주께 더욱 밀착할 수 있다. 나의 약함은 드러나서 점점 낡아지지만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일이어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6).
곧 오늘의 나로 그러할 수 있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8)
곧,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