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전봉석 2022. 4. 4. 05:29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수 13:33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그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것. 그 특별함에 대하여는 그 길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마치 먼 길을 나서는 데 있어 자동차를 정비하고, 공기압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기름을 새로 채워야 하는 일처럼 사소하면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자주 되뇌곤 한다. ‘우리 나이’란 게 참 어중간한 나이여서 오십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늙었다고 하기에는 젊고, 젊다고 하기에는 늙은… 한데 이 한 구절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의 여호수아의 나이도 그렇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13:1).” 아직 할 일은 많은데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을 것은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어 그 마음이 주도하는 것이 다르다. 이에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신 이가 이르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수 13:33).” 외형적으로는 남들처럼 주어지는 게 없는 것 같으나 주가 곧 기업이 되신다는 것. 이를 앎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마다 새로워진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가 말씀을 전하러 오시는데 뵐 때마다 한 뼘씩은 노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았는데 그 모습이 낯설다. 혈기왕성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던 예전의 ‘전투적인 목회자’로는 상상이 안 간다. 그럼에도 날로 그 속사람은 새로워져서, 나이 들어 익힌 자판을 더듬더듬 손수 치면서 성경을 쓰고 묵상하고 지난날의 설교나 그 말씀의 깊이를 더하여 글로 남기는 것에 감사하다. 나는 여전히 습관처럼 설교를 받아 적으며 메모를 한다. 언젠가 아내는 묻기를, 프린트한 게 있는데 뭘 그렇게 받아 적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문자로 정리된 언어와 언어 사이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이시다. 이를 담은 것은 성경이고 성경은 글자이다. 문자는 그 언어의 뜻을 이상으로 하는 어떤 세계를 내포한다.

 

곧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는 데는 세 가지 확실한 필수 요건이 있는데, 첫째는 묵상이다. 물론 읽고 이해하고 뜻을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말씀은 공부나 연구가 아니다. 신학이나 교리는 가방이라면 그 안에 담긴 것을 꺼내고 각기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묵상이다. 마치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과 같다. 제아무리 진수성찬이라 해도 이를 가져다 입에 넣고 씹고 삼켜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는 먼저 그 맛을 음미하고 즐겨야 한다. 고라의 자손이 표현하기를 이는 갈급하여서 ‘목마른 사슴’ 같다고 비유하였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1-3).

 

이는 허기를 느껴야 하고 이를 갈망함이 갈급함으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갈급하다는 것은 조급함을 뜻하는데, 조급함이란 참기 어려운 것을 의미한다. 느긋할 수 없다. 생각해 보고, 나중에 하는 따위의 말로 여유부릴 사이가 없다. 이는 맛본 사람은 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3).

 

꿀맛 같다는 것, 이를 말로 표현하는 일보다 빈약한 게 없고 문자로 읽는 것보다 밋밋한 것도 없다. 이는 직접 입술에 적셔 온 몸으로 퍼지는 달콤함으로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묵상은 말씀, 곧 문자와 문자 그 언어와 언어 사이의 어떤 긴장관계 혹은 음미해야 알 수 있는 맛과 같은… 사랑하는 연인을 곁에서 보는 것과 직접 그 당사자가 되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묵상이 이루어져야 두 번째, 순종이 가능해진다. 왜 쭈뼛거리고 왜 밍밍하기만 한가? 나는 나의 가까운 두 친구가 있는데, 우리는 공교롭게도 뒤늦게 주를 영접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를 알았다. 그 중 하나는 가끔씩 통화라도 할 때면 서로의 안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때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알지, 그치, 감사하지 하는 말이 서로는 추임새처럼 흘러나온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싱겁다. 나는 신기하고 놀라워서 그 일을 들려주는데 저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느긋하다. 스스로도 고백하곤 하는 것이 왜 자신은 그런 맛을 모르겠지? 하고 별로 재미없어 한다. 오히려 골프 이야기나 어디 신도시 건축 이야기가 나오면 어찌나 신나게 말을 하는지…. 순종은 인격적인 체험이다. 시켜서 억지로 그래야 하는 숙제 같은 게 아니다. 그렇게는 또한 그 맛을 알 수 없다. 싫은데 좋고, 아픈데 고통스럽지는 않다. 마음 쓰이는데 싫지 않고, 온 신경을 다 몰두하고도 아쉽기만 한… 사랑 같다. 순종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감출 수 없는 표정 같고 애달픈 마음 같아서,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고 생각이 그의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묵상과 순종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열매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잠 18:20).” 믿음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마음으로가 아니다. 사랑도 감출 수 없는 표정과 드러나는 감정으로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열매로 남에게 주어진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나무는 자기 열매를 먹지 않는다. 주는 것으로 족하고 족한 그 자리에서 다시 열매가 맺힌다. 그렇듯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4).” 말로나 마음으로만 사랑을 하는 것은 헛된 것과 같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고’ 우리의 새로움은 그 열매로 나타난다. 묵상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순종은 자라나는 것이라면 열매는 내 안에 거하시는 말씀이 충만하여짐으로 밖으로 맺하는 열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보는 것이 묵상이면 순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 되고 그 열매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지는 일이다. 일이라 하는 것은 노인이 되어 유유자적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합당한 행위를 계속함인데… 나는 나의 아버지의 설교를 너무 늦어서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설교문을 받아쓰게 하신 것이 훈련이 되긴 했어도 그때는 내게 듣는 귀가 없었다. 즉 그 맛을 알지 못했다. 나는 나의 늙으신 부친이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성경을 되새기며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는 ‘일’을 존경한다. 열매는 수확하여 나누고 먹는 것이고 보고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러느라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렘 3:21).” 우리의 괴로움의 절반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자신이 자신의 길을 굽게 하고 헐벗은 산 위에서 애곡한다. 이에 성경은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22).” 우리로 주를 바라고 돌이키게 하시는 데까지 주는 결코 포기하거나 외면하시지 않는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23).” 백날 허튼 소리에 쓸려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바울은 이 귀한 은혜를 질그릇에 담으셨다고 하였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하였다고 끝이 아니라 그제야 시작인 것처럼, 주의 은혜로 단번에 구원을 받았다고 믿음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이다. 곧 내가 전에는 옳은 줄 알았고 그다지 악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모든 것이 죄였다. 어느 친구와도 늘 같은 말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보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땐 우리가 어쩜 그러고 살았니? 하는 서로의 고백에 목이 잠기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의 약함을 알면 알수록 나의 심령은 가난해지고 애통하는 자로 주 앞에 세워진다. 매일의 은혜가 필요하다. 오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날마다 새로운 은총이 필요하다. 누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더는 괴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고 고백한다면 저는 초인이거나 사이비다. 한 번 주께 회개하고 더는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느니, 한 번 구원 받았으니 더는 천국 갈 일만 남았다느니 하는 소린 모두 미친 소리다.

 

낡아지나 새로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길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8:2).” 이 역설의 훈장이 성도의 삶이지 않겠나? 나는 억지로 다시 붙들려 신학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더욱이 목사가 되기만 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무엇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그때부터였으니… 결혼만 하면 사랑이 다 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였다. 나이 들어가면서 무르익어가는 사랑이 있듯이 신앙이란 그때마다 열매로 맺혀가는 성령의 열매로 알게 한다.

 

누구보다 바울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알면 알수록 더욱 바라고 귀히 여기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이제 은퇴하고 소일거리를 찾아 여유로운 삶을 즐기려는 데서 우리의 오해는 비롯되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곧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이는 날마다의 일이어서 나의 아침마다의 묵상글은 아주 초보적이며 마땅한 일에 불과하다. 성경 안에 있는 ‘그러므로’와 ‘함이니’의 사이에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맛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이 들어 겉사람은 낡아져 몸은 예전 같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드는 것만 같은데,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하는 데서 ‘그러므로’의 답이 있다. 이에 왜 그런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함이니’에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 오늘의 이런저런 수고와 괴로움이 전부인 같고 그래서 기구한 듯하나 돌아보면 가장 잔인하였던 나의 학창시절이 가장 짧았다! 나를 괴롭게 하던 것이 여전한 것은 여기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무엇 때문인가? ‘함이니’는 ‘때문에’란 말로, 그것으로 우리는 영생을 주목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하나님이 어떤 정의나 수학공식과 같은 것으로 오시지 않고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나는 감사한다. 곧 성경이 있어 이를 언어로 우리 앞에 두신 것은 은혜다. 모든 언어는 ‘사전적인 의미’와 ‘지시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 신학은 사전적인 부분이면 교리 즉 실천으로 지시적인 의미다. 이를 살아서 각자의 일상으로 배양하고 열매를 맺음으로 함축적인 의미는 새롭다. 누가 저 작은 씨앗이 훗날에 배추가 되고 무가 될 줄 알았나? 누가 저 작은 묘목에서 숱한 알곡이 주렁주렁 열려 열매가 될 줄 상상이나 했겠나? 한 이름 없는 선교사가 그것도 채 5년여 남짓 인디언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다 죽은 일기 한 권이 훗날 수많은 젊은 목회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여 전 세계로 달려가는 선교사들의 불씨가 될 줄 알았겠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주가 이루신다.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늙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레위 지파가 성전 일을 맡아 한다. 저들의 기업은 하나님이다. 이를 오늘 시인은 이렇게 함축하여 운율에 담은 듯하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오늘도 나에겐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다. 새로운 긍휼하심을 바란다. 하루하루 맡기신 날들이 새로운 것은 '그러므로' 또는 '그래서'의 이유가 이것이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여기서 '함이니' 또는 '때문에'에 따른 뒤이은 묵상과 순종과 열매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일. '그러므로'와 '함이니'의 결론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하는 말씀으로, '다시 오늘'의 내 할 일이었다. 나에게 맡기신 일, 특별히 부르신 데 따른 가장 기본적인 첫 걸음, 믿음으로 달려 나가는 것.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시 72: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