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전봉석 2022. 4. 5. 05:33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모두가 아니라 할 때 주의 약속을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살아서 자신들의 발로 그 땅을 밟았다. 이에 갈렙은 정당하게 자신에게 약하신 땅을 바란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 14:12).” 그럴 수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으로다. 믿음으로 주를 가까이 함이라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 73:28).

 

그러는 동안 우리 안의 갈등과 어려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나? 이를 바울의 표현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라 하였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믿음으로가 아니면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 속에 살면서는 이를 알기가 어렵다. 다들 고만고만하여 제풀에 겨워할 따름이다. 늘 내 안에 있는 어떤 이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문둥병으로 졸지에 모든 생을 잃고 고통 중에 살아가면서도 오히려 그 긴 세월을 ‘잠시’로 받고 가벼운 일로 여겨 더 크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약속을 붙든 사람들. 일찍이 하나님은 나의 어린 날에 저들과 살면서 이 땅의 환난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이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을 왕래하며 그때는 그것이 비극적이고 참혹한 줄 알았는데 이 또한 엄청난 ‘축복의 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단정되었다. 아버지의 그와 같은 표현이 그때는 참 싫더니만,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낙심하지 않고 매일 더욱 더 주 앞에서 새로워져 가는가를 알 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으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알게 된다. 오늘 시인은 이로 인하여 괴로워하다 주를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 73:3-9).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교묘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인 사람이 있는데, 저들은 참 잘 산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말이다. 저들은 자신들의 교만을 목걸이로, 강포를 옷으로, 소득은 늘 마음의 소원보다 많고, 소위 세상에서 잘 되고 강건하기가 저절로 그리 되는 것처럼 돈이 돈을 벌어다 준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성경을 알고, 읽고, 이를 삶으로 산다고 사는데도 늘 그 삶이 어렵고 곤고한 경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한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적인 교훈의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곧 우리가 어려운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시기에 앞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 그러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 가운데서 부디 악에 빠지지 않고 주의 영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 삶으로 주의 뜻을 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하는 다윗의 기도는 비장하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은 얼마나 무지몽매한가. 죄가 늘 문 앞에 있고 아차, 하다 순식간에 넘어가기 일쑤라,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20).

 

그러함으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과 함께 우리가 남들과 다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축복이었다. 찔리고 산란함이 괴롭고 어려울 따름인데,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서 우리는 찔리고 괴로워하다 주의 뜻을 구하게 되고 이것이 복이다. 이는,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2-23).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그리하여 주께로만 나아간다. 나는 늘 아주 잠시라도 주의 긍휼과 자비가 없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순간 괴물이 되는 것을 느낀다. 욱, 하고 치미는 어떤 화가 또는 슬픔이 억지를 발하고 순식간에 나를 휘감아 돌면 순식간에 내 안의 찌꺼기들이 회오리치듯 자기 논리에 빠지게 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6-17).” 곧 내 안에 바로 살 수 있는 길은 진리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다. 한순간도 나는 온전할 수 없지만 주를 바랄 수는 있다. 주는 날 위해 기도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8-19).” 이와 같이 우리의 거룩을 위하심이었다.  

 

자주 누구의 기도부탁을 들을 때 또는 말씀 앞에 앉았을 때 순간 욱, 하고 치밀면 겉잡을 수 없는 나를 두고 주 앞에 고한다. 무엇으로 나를 이길 것인가? 우리가 가장 당해내기 어려운 상대가 자신임을, 내가 나를 어찌 다스리지 못하ㅗ 주체하지 못할 때,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에만 바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세상은 앎으로 행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행하심으로 안다. 이르시는 것도 그것이어서 우리의 거룩은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행사도 할 수 없다.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일치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뿐이다. 아주 단순하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환난이니 고통이라 해도 개의치 않게 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모두가 주의 이름을 부를 것 같지만 그럴 수 없다. 실은 알면서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확신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주의 뜻에 맞추려는 용기는 알고 행하는 게 아니라 행함으로 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주의 뜻을 안다는 것은 행함으로다. 나는 번번이 여기서 좌절한다. 나름은 설득과 이해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제도 누구의 전화를 받았다. 어떤 선택지를 놓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을 하였다. 사탄은 그럴 때는 그대로 있다, 아주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하루 이틀 쉼을 제공하였다. 저를 초대한 이는 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어찌어찌하다 돈을 많이 벌어 제주도에서 유유자적하며 위인이었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그에게 다녀오기로 했다는 소리에 나는 순간 안 가는 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늘 사탄의 전략도 공식이 있다. 우리가 열심일 때 저는 협조한다. 수고에 애쓸 때도 토를 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마음에 자기만족도 더한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때론 위세다. 충분한 시간을 갖은 것 같다. 이쯤 했으면 됐겠다 싶을 때 사탄은 슬쩍, 아주 ‘잠시’ 나를 위한 휴식을 요구하게 한다. 그게 왜 나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당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외친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다. 우리로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는 신호도 어려움으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것도 고난으로다. 수만 가지 더 나은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본래 그리도 악하다는 것을 순간 순간 까먹기 때문이다. 이에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3).

 

안 믿는 자들도 산에 올라 혹은 강과 바다 앞에서 탄성을 지른다. 누가 중국 여행을 다녀오고 그때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울창한 산과 수려한 계곡을 보며 가히 일품이라고 경탄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저의 탄성과 나의 탄성은 다른 의미였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하지만 누구는 그저 허무한 것에 탄성한다. 이를 지으시고 조성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안 믿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신다. 좀 너무한가? 그럼 어찌 사회생활을 하냐고 누군가 반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다. 나는 어제 누구에게 잠시 그에 따른 설명을 하다 그런 말이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저들의 잘 됨이 우리 안에 부러움으로 드나드는 것을 본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시 73:12).

 

상대적으로 그럼 우린 어떠한가? 때론 말도 안 되게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이상하기만 하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3-15).

 

우리 안에 이와 같은 유혹과 절망이 자주 드나든다. 나름 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믿는데도 돌아오는 것은 고통이라면, 이를 감당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다. 성경은 엄히 일러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아니 우리로 선하고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위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주가 사람으로 오셨을 리가 없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이 되셨을 것도 아니었다. 성경을 읽고,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조언을 구하려 한다면 십중팔구 사탄은 일단 성공이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저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누구보다 예수와 함께 있었고 예수 곁에서 예수를 보고, 듣고, 느끼며 생활하였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우리는 무지몽매하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곧 여태 우리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행함으로가 아닌 이해와 상식으로 알았던 것이다. 바울은 이를 괴로워하다 그 비밀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누가 아직 나이 오십도 안 돼 어찌어찌하다, 주식인지 비트코인인지 무엇이 대박나면서 수십억의 이익을 보았다. 저는 그대로 빠지고 그 이익을 챙겨 남은여생을 즐기는 데에 쓰기로 하였다. 누가 봐도 부러울 따름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3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일도 있었다. 일찍이 저의 모친이 저를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는데 그 상대가 명 짧은 부자였다. 십수년 후 저의 생모가 찾기 전까지 저는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모 중소기업을 다니고,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낳고, 조그마한 빌라를 대출 끼고 사서 아침엔 우유배달 낮에는 직장 생활 저녁에는 대리운전으로 나름 성실하게 살던 이였다. 저를 찾은 생모는 그리 고생하며 사는 자식에게 평생 모아도 쥘 수 없는 재산을 주었고, 졸지에 저는 회사도 우유배달도 그만두고 모 레스토랑 사장이 되었다. 집도 어느 신도시 중형 아파트로 옮기고, 장사가 잘 돼 1년만에 가게를 늘려 2호점을 냈다. 내가 만난 그는 예전에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그렇게 십수년이 흐르고 어째서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짐작은 간다. 모두 망하고 오히려 빚더미에 앉아 이혼 당하고 아이들은 탈선하고 저는 어디 고시원에서 근근히 생활한다고 들었다.

 

너무 극적이라 통속적인 내용으로밖에 들리지 않지만, 인생 참 허무할 따름이라. 누군 그래서 번 돈으로 한 달씩 제주도 어디에 장기투숙을 하며 고급호텔인지 펜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여유롭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어찌 아니 부러운가. 그러니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전략은 상투적이면서도 피할 수가 없어 가상하다. 우리가 어찌 눈으로 안 보이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의 구구한 설명을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은 하나다. 마침 또 어떤 중요한 결정, 몇 곳에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오고 그것을 두고 올 들어 몇 개월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며 주께 묻고 있었는데, 하필 결정을 앞두고서 '그런 여행'이라, 나는 그럴수록 자중해야 할 것을 말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름은 기도의 사람이고 말씀으로의 생활이라 하니, 천하의 다윗도 솔로몬도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그 상대가 믿는 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고 묻다 입을 다문 것은 뭐라 한들. 우리가 붙들고 붙들어야 하는 것은 복음뿐이다. 복음이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4-6).” 이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길은 위험하다.

 

대뜸 돌아오는 말이 또는 생각이 내가 너무 도식적인 사고가 아닌가 하는데. 나 역시 답답하여 뭐라 더는 말을 잇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엄연히 어떤 존재였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영적으로 빛이 비칠 수 없는 어둠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주의 긍휼하심으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신 것이다(1:18-19). 결코 우리는 저들과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한 방에 훅, 간다. 저들보다 나은 게 없다. 복음으로가 아니면 말이다. 

 

오늘 본문은 자신에게 약속된 산지를 요구하는 갈렙에게 기꺼이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수 14:13-14).” 우리의 온전함은 주를 경외하는 데 있고, 주를 경외함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을 운운하며 저의 조력을 구할 게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마음이 산만하고 찔려야 옳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시 73:21).” 왜 그런가?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나도 다를 바 없이 짐승 같으나 존귀함을 깨달음으로 주의 영광을 바란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49:12).

 

한 시도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를 넘나든다. 그리하여,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2-3).

 

당연히 부럽지. 상대적으로 자신은 초라하지. 주의 축복이란 게 너무 막연하고 영원한 영광이란 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같은데, 저의 오늘의 안락한 삶이 천년만년 갈 것인가? 상대적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영원할 텐가? 잠시뿐이다. 곧 다 지나간다. 무덤 뒤로 남을 것이 무엇인지!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8).

 

다른 더 좋은 것은 없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좋다. 세상은 앎으로 행하고 믿는 우리는 행함으로 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0).

 

그러므로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6,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