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개척하라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수 17:17-18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성경의 세계는 곧 우리 일상이며 성화의 날들이고 곧 들어가 차지하고 살 우리의 본향, 하나님의 나라이다. 특히 시편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를 고스란히 나타내고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의 역사와 섭리를 알게 한다.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하는 말씀이 또는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하는 그 의미가 매우 깊고 놀라운 것 같다. 예수님은 일러,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신 말씀이 가나안을 나누고 분배하는 데 있어 그 표상이 된다. 그저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 간다고 하는 막연한 신앙으로는 이 세계를 누릴 수 없다. 말씀의 세계가 놀라운 까닭은 이를 입에 머금고 그 맛을 음미하면 할수록 더욱 그리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하실 때 어찌 그러한가? 노여움이란 그 마음의 서러움과 어떤 슬픔, 좌절과 어떤 낙심을 모두 일컬어 하시는 말씀일 텐데, 부모도 자식도 우정도 사랑으로도 어찌 상처 없고, 노여움 없는 관계가 가능하겠나? 목요일에 오는 이가 무슨 일 때문인지 오늘도 가서 할 말이 뻔해서 안 갔으면 한다고 문자를 했다. 나는 몸이 아파서 못 오는 게 아니면 오라 하였다. 늘 나의 기도 제목은 저도 저지만 저의 남편 목사의 바른 목회이고, 이를 마침 묵상하였던 시편 51편의 내용으로 어제는 준비하고 있어서였다. 감사하게도 저는 그리 왔고 나는 그리 전하였다.
특히 성경 가운데 시편을 중심으로 여러 해 설교를 준비하고, 또는 이처럼 아침마다 묵상하는 데 있어 시편 한 장씩을 꼭꼭 펼치고 보니, 이는 마치 우리 인생의 지도 같고 천국의 구도 같다. 때로는 밖에서 보고 또는 안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속에 들어가 산다! 늘 누가 온다 하면 시편 어느 대목을 연상하거나 묵상하는데, 어제는 아침에 교회에 올라가 묵상글을 읽고 51편의 시를 뒤적거렸다. 51편은 너무 유명한 다윗의 밧세바 강간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저의 회개로 자복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언제는 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죄책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일상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그러그러하였던 죄의 참상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내용은 없었다. 회개이면 이러해서 여인을 범했고, 저러해서 이를 은폐하느라 살인까지 하였다는 둥 그 죄상을 낱낱이 고해야 할 텐데… 시편은 이를 모두 생략한다.
시편으로 시편 안에서 산다는 일은 감정에 의한 자기 한탄과 비애에 빠져 사는 게 아니다. 물론 그 일의 배경인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결국 그 일로 태어난 아이가 죽고 아이를 낳은 어미의 찢어지는 마음이 연상되지만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그 일을 수습하는 데 있어 ‘이 모든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 저는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부터 자기의 성욕에 이끌려 그녀를 데려다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이를 은폐하려 전장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들였다 자존심만 구겨져 결국은 저까지 죽게 한 뒤,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아 아이까지 낳았다. 얼추 1년여의 시간 동안 다른 이도 아니고 다윗은 어찌 이 모든 죄악을 그처럼 죄 위에 죄로 덮으며 시치미 떼려할 수 있었을까?
특히 저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다스리시는 데 있어 그 당사자 다윗은 무사히 넘어가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죽고, 그 어미가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고, 앞서 억울하고 저의 충성된 신랑이며 신하인 우리야가 죽음을 당하였다. 일련의 처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회의를 갖게 된다. 저가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다윗은 즉각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고 이를 인정하였고, 이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8).” 하고 그 일에 대해 죄를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앞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분개하는 마음까지 든다. 한데 ‘그가 바로 나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와 같이 나 또한 용서함을 받고 지나간 죄에 대해 없었던 일로 지워주신 셈이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6).” 이것이 우리가 아는 복음의 초석이다. 이로써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 이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그 어떤 죄라도 주 앞에 고하고 이를 자복하면 하나님은 더는 그 문제로 죄를 삼으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3).
10년 전 30년 전의 죄도 여전히 나로 하여금 주의 긍휼하심 앞에 무릎 꿇린다. 곧 시편의 세계가 놀라운 것은 자신의 죄를 끔찍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주의 긍휼하심 앞에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다윗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1).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사나? 어찌 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살겠나?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를 꿇린다. 하여 죄 씻음을 간구하는 것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2).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의 은혜로 십자가의 보혈로 지난날의 죄는 물론 앞날의 모든 죄까지도 용서함을 받았다는 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고 우리는 늘 죄가 가져오는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3).
이로 괴로워할 줄 아는 것이 성숙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그 정도가 무슨 죄로도 여겨지지 않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는 가망이 없다. 죄의 참상은 말씀하실 때에 이를 바로 알지 못하게 한다. 역으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마다 말씀의 의로우심과 심판의 순전하심을 더욱 알게 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4).
회개는 자신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순전하심을 체험하고 고백하면서, 타고난 자신의 죄성과 그 참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
곧 오늘의 우리 문제는 어제 오늘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 날 때부터 아니 더 이전 모태에서부터 안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도 더욱 더 자신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거듭 거듭 거듭남을 간구한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6-7).
다윗이 요구하고 바라는 은밀한 지혜란 무엇일까? 왜 목사나 돼서 게임에 몰두하고 포르노에 정신이 팔리고 심지어 복음 아닌 것에 열을 올리며 정치적으로 휘둘리게 되는 것일까? 다윗이 정작 두려웠던 것을 살펴보면 그 해결책이 나온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1).
그럼 그야말로 끝장이다.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처럼,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심의 의미를 두려워 떨며 받들어야 옳다. 자신은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천국 간다’는 확신이 헛된 망상이 될 수도 있다. 주 앞에서 내쫓기고 성령을 거두시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에 바울은 간곡히 설교하는 것이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를 듣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면 이는 심각하다. 자신은 예외라고 여기면 이 또한 끔찍하다. 바울도 스스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하는 저의 두려움이 믿음이 없어서이었겠나?
베드로도 증거하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곧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날마다 굳게 해야 한다. 아니면 실족한다. 다윗은 이번 일로 오히려 자신이 더욱 주 앞에 정직하고 강건하기를 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이는 날마다 매순간의 새로움이지 어쩌다 뚝딱, 그랬으면 됐지 뭐! 하는 따위의 헛된 믿음으로가 아니다. 깨끗한 사람은 날마다 씻고 더러운 사람은 언제 씻었는지도 모른다. 이로 인하여 파생하는 문제는 정말이지 끔찍하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8).
죄는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좌절시킨다. 언제 그처럼 기쁘고 즐거움으로 주의 일에 만족하고 기뻐했는지 까마득하다. 그 기쁨을 잃으면서 게임에 빠져들고, 내 곁의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조차 잃어버렸다. 자기 변덕대로 요구하고 힘없는 아이에게 분풀이를 한다. 아내를 업신여기고 아이를 기분에 따라 막대하고 막말한다. 저의 어린 시절 고스란히 그때의 감정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면서 정작 자신도 자기 자식을 똑같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즐거움을 대신하려는 것 때문이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2).
곧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그 영혼은 황폐하여 안 믿는 자보다 더욱 더 황량하다. 성질이 고약하거나 막무가내이고, 끝없이 침울하거나 자책을 일삼고, 이는 고스란히 가족들 몫으로 돌아가 아이가 눈치를 보고 아내는 사랑을 갈급하게 된다. 그런 자로 말씀을 전하고 주의 일을 감당한다고 한 것이니, 다윗의 1년여 시간은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죄로 죄를 덮고 덮으면서 묵인하고 살기는 하였으나… 모든 죄는 기쁨이 문제다. 참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그 자리에 다른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운다. 주식에 골프에 나름은 남부럽지 않게 누린다고 누리면서 명품으로 제 몸을 가리고 산다고 하지만 그 악취는 자신의 코를 찌르고 그 괴로움은 자신만이 안다. 미국 사회의 80%가 정신과 약을 처방받고, 특히 부유한 자들의 대다수가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이룬다고 하니… 문제의 뿌리는 죄로 인해 잃어버린 기쁨이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5).
그 날이 언제였던가? 두 손 들고 찬양을 올리며 뜨겁고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주를 노래하던 때가! 언제부턴가 청승맞은 노랫말에 눈물을 짓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며 사는 꼴이 되었으니… 이 모든 게 죄 때문이다. 전에는 주를 찬송하며 이 기쁨을 곁에 같이 나누어 전하고 함께 하고 싶었는데,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3).
이제는 자기 외에 사랑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아내가 무슨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는지, 아이가 어떻게 그 성품이 자라가고 있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별로 심각하지도 않다. 더욱이 남의 이야기로 돌려지는 죄의 참상을 보면서도 무덤덤하니 채널을 돌리고 오락프로에나 시시덕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었다. 당최 자신에게 부여하신 그 부르심의 상에 대하여는 까마득히 잊은 지가 오래다. 다윗이 주 앞에 고하다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으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7).
나의 어떤 성과나 남다른 부흥을 바라시는 게 아니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곧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천국이 나의 것임은 내 심령이 그것으로만 부요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에 애통함으로 받은 위로가 천국에서 찬송이 되고 영광이 된다는 것을.
나는 목요일에 오는 이의 남편이 언제가 같이 올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한다. 저를 부르심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면, 오해나 잘못된 인식이 아니라면 주께서 반드시 그 심령을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하는 오늘의 말씀과 함께,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하는 말씀은 반드시 응할 것이다. 이로써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4).
내가 사랑하고 내가 꿈꾸고 내가 바라던 헛된 즐거움이 약탈되고 그 위에 주의 존귀하심만이 세워질 것이다. 반드시,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7).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