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전봉석 2022. 4. 10. 05:31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수 19:49-50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쟁취하여 얻은 땅을 각 지파대로 분배하기를 마쳤다. 이제는 모두의 생활이 아닌 각자의 생활이 드러날 때이다. 이를 시편은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 같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지난날과 오늘을 이처럼 축약함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나타낸다. 우리가 누려야 할 정당한 구원의 기쁨을 잃고 산다는 일은 불신앙이다. 자신의 죄성을 다루지 못할 때 거듭남의 실재는 죄성으로 갈등한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요 5:13).” 주께서 우리에게서 몸을 숨기실 때 우리로서는 난감해진다. 믿는 자로 살면서 믿지 않는 자로 추구한다. 영생을 가졌으면서 한 날의 수고로 허덕거린다.

 

요한은 이를 엄연히 지적해준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곧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음을 아는 증거는 형제를 사랑함에서다. 이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곧 누가 교회를 위하고 그 마음에 더하시는 사랑으로 주를 섬긴다는 것은, 저가 나를 보고 돕고 위하는 것이겠나? 이 못난 사람이 주의 종인 것과 비록 교회는 부족하나 주가 이루시는 것을 알고 이를 취함으로겠다. 성령이 그 속에 있지 않으면 곧 하나님이 선재하지 않으시면 이와 같은 일은 불가능하다. 실제 나는 이제야 그의 하시는 일이 뚜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 나와 상관이 없는 자인데 꾸준하게 신학을 하라 권하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 뒤늦은 학부의 등록금 일체를 감당하던 이도… 그때마다 교회에 주의 이름으로 헌물을 아끼지 않는 이들도… 우리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겠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누구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몸소 깨닫고 돌이킨 자이다. 그와 달리 유다는 제 길로 갔으나, 우리가 주께 돌이킬 때,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4).” 곧 하나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시는 것을 내가 어찌 알고 증명할 수 있겠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거가 된다.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우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막연하여 행동하기도 힘든 사실을 두고 묵묵히 준행할 수 있는 까닭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시는 말씀의 실현이다. 곧 말씀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은 머리로 깨닫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는 성령이 나에게 증언하신다. 이는 나의 일상에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리고 우리로 삶 가운데서 우리도 어찌 그리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행하게 하심으로 알게 하신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15:26-27).”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이 가르쳐준 이치와 정반대이다. 곧 세상은 배워서 알고 행하지만 우리는 행함으로서 배우고 알게 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3).”

 

이를 바울의 진술로 다시 되새기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즉 지금은 행하면서도 막연하여 ‘이게 맞나?’ 싶을 때도 있겠지만 곧 얼굴과 얼굴을 맞댄 것처럼 확실해질 때도 있다. 작든 크든 우리가 행함으로 주가 함께 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이 때론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할 때 도리어 우리 안에서 진리의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드디어 분배가 끝났다는 것은 비로소 이제 개개인의 삶이 달렸다는 데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든다. 저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는 다 같았으나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를 나누고 각각의 지파대로 분배하는 과정까지 끝낸 것을 보면서, 안도하기보다는 이제 시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오늘 시편의 한 대목이 아니나 다를까 어느 훗날 그 결과를 나뉘게 하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시 78:65-69).

 

이를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말씀에서 더욱 확실히 해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3-34).” 이와 같은 말씀에서 아찔함을 느낀다. 구원의 기쁨을 잃었으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도취된 삶도 많다. 교회는 열심이고 나름은 신앙을 가졌다 하나 그 삶은 세상 것에 마음이 팔려 사는 심령들도 허다하다. 특히 이런저런 일로 주의 종의 이름으로 무엇을 도모하는 일에는 심히 주의 할 필요가 있다.

 

전에 누가 와서 자신의 교회에 어느 성도가 무슨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서류상 사내 이사로 그 목사의 이름을 올려야 했고, 그때만 해도 그 일로 얻어지는 이익으로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유익하겠다 싶어 저는 그리하였다. 그런데 그 사업이 무슨 송사에 휘말리고 얽히고설킨 교인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저는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한 일이라고는 하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시 119:94).

 

하는 말씀을 받아 바울은 그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사로이 쓰이고 불릴 것이 아니다. 내가 주의 것임을,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이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4).” 곧 우리가 주를 온전히 바라고 섬기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유혹이나 현실적인 문제는 실제의 일로 드러난다. 누구도 저는 목사이면서 어느 사업체에 이름을 걸어두고 얼마의 소득을 얻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흔히 어쩔 수 없다는 데서 시험의 강도는 세다.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는 단지 목사로서만이 아니다. 믿음의 자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로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어떤 이득을 스스로 도모하려 할 때 사달이 나게 돼 있다. 실은 어제도 그런저런 이야기 속에 나의 조건(?)은 킹 카드이기 때문에 더 이익이 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저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나는 뭐라 말도 못하고, 대체 이 일을 어찌할까… 하고 주께 아뢰고 구하고만 있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주가 알게 하시지 않으면 반박할 수도 때론 거절하기도 참 어렵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빌 3:3-4).” 하면서 무엇을 추구하려 할 때의 아찔함에 대하여. 차마 일련의 상황을 글로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점점 더 교묘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 거절하기도 어렵고 사실은 피하기도 쉽지 않은… 그러나 엄히 주의해야 할 일에 대하여.

 

첫째, 이 땅에서의 상대적인 수치와 자존심의 문제가 실은 신앙을 지키는 기초가 될 수 있다. 둘째, 이와 같은 어려움이 주의 영광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데 있어 남들처럼 성취하고 누림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보다 분명하다.

 

어디에나 몇몇의 거짓 교사가 있다. 저의 말은 합리적이고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독생자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하는 것보다 사람 예수로만 인정하는 것이 훨씬 합당할 것이다. 그럴 때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요한은 우리를 붙들고 분별하라 이른다. 애매한 상황이 너무 많다. 누가 직설적으로 지적했던 것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다들 자기 생각이 옳다 할 때,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2-3).”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로 양분되었다. 누구는 저를 하나님이라 하고 누구는 그저 사람 예수로만 알았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은 파생되어 ‘어떤 선택’ 앞에서 저마다의 주관적인 해석을 따르기 십상이다. 이때에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어제 침묵하였고 나의 침묵은 묵인이 아닌 강한 거절의 의사표시였다. 곧 이제는 교회를 위하고 주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 외에, 나는 없다. 이에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1:8).” 이 두 말씀이 서로 상충되는 것 같지만, 그 다음 구절의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우리는 그때에 즉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 이로써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사도 요한의 이와 같은 역설이 오늘을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까? 나는 이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비유하여 이해하였다. 이것이 변이하여 오미크론으로 겪을 때도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고통을 당한다. 이를 무찌르기 위해 약을 먹고 견디며 면역력을 향상시킨다. 곧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으로 난 자이면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수시로 매순간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살고 본의 아니게 이는 바이러스와 같이 우리 안에 침투하여 영혼을 침체시키는 것은 물론 파괴하기까지 한다. 그래서도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마치 우리가 평소 건강을 돌보고 면역력을 기르고 몸에 좋은 것으로 무장하고 산다 해도 언제 어느 때에 죄는 바이러스처럼 우리 안에 침투할 수 있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백신을 3차까지 맞은 사람과 1, 2차만 맞은 사람의 경우, 확진되었을 때 그 앓는 날 수가 3차는 2-3일 1, 2차는 5-6일로 나타난다고 했다. 물론 평균 수치이다 보니 다소 개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의 일상을 조명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행함으로 입증하라’는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타종교나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아니다. 값싼 구원의 확신, 가짜 믿음의 신념이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오늘 시편에서 특히 눈에 드는 표현이 있는데, 주가 우리를 지도하신다는 것이다. 지도한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그 방향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인데,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52, 72).

 

이것이 오늘의 우리 자신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별함이다. 어떤 일을 두고 순간 뭐라 반박을 하며 옳고 그름을 따질까 하다, 좀 더 두어 주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서로게 알게 하시기를 구하기도 하였던 하루였다. 그런 가운데 뜻하지도 않은 손길로 교회를 채우시고 그 어려움으로 곤고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피부로 느끼면서… 사실 우리는 겁낼 것 없다. 아무리 세상이 어떻고 내 자신이 주체할 수 없다 해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아,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는 순간 모든 게 평정이 된다.

 

하여 우리는 결코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때론 오늘의 어려움이 징계 같으나 이러한 고충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받아야 할 정죄를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심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우리가 존귀하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49:20).

 

그러하니 주가 지도하신다.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신다. 그의 손은 능숙하시다.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 78:52, 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