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삿 3: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죄의 반복은 형벌을 부르고 형벌로 인한 회개는 은총을 더하게 하신다. 그때마다 사사를 세워 문제를 다스리게 하시는데 갈렙의 사위 옷니엘과 왼손잡이 에훗의 등장으로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라는 데 주목하게 한다. 성경은 우리로 행함으로 영적인 상태를 입증하게 하신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일련의 상황과 여건이 우리로 주의 자녀임을 알게 한다. 오늘 본문을 읽으며 이제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에 되풀이 되는 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돋보이심을 보게 된다. 이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우리의 거듭남에 대하여,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 곧 이러한 일을 통해 주의 사랑을 알게 한다.
말씀의 놀라움은 묵상할 때와 이를 묵상글로 정리할 때와 설교문으로 작성할 때와 이를 여러 번 다듬고 정리할 때와 실제 말로다 설교할 때와 그러고 난 뒤의 상황에서가 모두 다르다. 가령 한 구절의 의미가 전혀 새롭게 전개되어 펼쳐질 때 하나님이 하시고자 말씀의 의미는 또한 놀랍다고 다양해진다. 어제는 89편의 시편을 두 차례로 나누어 그 첫 시간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전하면서 전혀 엉뚱한 구절에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주께서 라합을
죽임 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시 89:10).
이를 처음에는 라합의 삶, 여성으로서 한 성에서 식객을 마주하는 일에 대하여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상력은 짐작은 하되 알 수는 없고, 알 수는 없으나 꿈꿀 수 있는 놀라운 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리 여겨 그 큰 여리고 성에서 라합만 못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고, 그런 보잘것없는 존재의 여성에게서 하나님은,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65:7).
하는 실현으로 ‘라합을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깨뜨리셨다.’는 의미를 묵상하게 되었다. 한데 저를 죽은 자 같이 ‘깨드리셨다’는 의미를 ‘깨우치셨다’로 읽었다가 이를 다시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는 의미로 비추어볼 때 저를 깨드리심은 새로운 라합, 전혀 다른 존재의 주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 아! 그래서도 오늘 시편은,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1).
주가 나로 주의 도를 깨닫게 하심과 깨뜨리심은 동의어다. 이에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하면서도 라합은 ‘시냇가에 심기어진 나무’처럼 우뚝한 것이다. 주를 믿고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 이는 마치 반복적인 우리의 모습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 3:7).” 하는 오늘 본문의 의미를 되새기며 알 수 있겠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라고 구하는 것이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 86:17).
이와 같은 생생한 경험이 우리 삶에 없다면 어찌 되겠나? 우리는 무슨 수로 주를 섬기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살면 살수록 체험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두고 아뢰고 또 구할 수 있는 것이겠다. 마치 몸에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우리 몸은 이를 상대로 대적하게 되고, 이에 고통은 따르고 괴로워는 하겠으나 그러한 생명의 위협과 어려움을 통해 평소 잃었던 간절함으로 주를 바라고 구하게 된다.
이는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원리와 같다. 주의 자녀가 악을 행하고, 이에 주변국이 쳐들어와 괴롭힘을 당하고 이를 주께 호소할 때 백신과 치료제로 그 바이러스를 물리치게 되듯이 시대마다 사사를 세워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한다. 성경은 일러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이와 같은 원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알게 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우리가 사는 동안 새로운 바이러스나 기존의 바이러스는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이처럼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를 펜데믹 상태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때에 독일에서 생겨난 새로운 신조어 함스터리티스(hamsteritils)는 불안에 스스로의 자구책을 강구, 햄스터처럼 식량을 비축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자기 살 궁리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쩌면 본능적이고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때에 우리의 소망, 그 간절함에 대하여 되돌아 보게 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은 신앙의 대명사로 ‘라합’에 대해 새롭게 묵상하게 되었다. 저는 기어이 예수님의 족보에도 오르는, 룻과 함께 이방여인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5).” 결국 저들이 다윗 왕의 조모와 증조모가 된다! 이 놀라운 신분변화를 ‘저를 깨뜨리셨다’는 시적 표현으로 재해석하면 이는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시는 예수님의 회심의 원리와도 연관이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를 두고 주일 예배를 마친 뒤 집으로 올라와 아내와 점심을 먹는데, 아내의 질문이 이어졌고 그에 따른 설명과 질문이 한 시간 가까이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되면서 그 또한 개인적으로는 기이한 일이기도 하였다.
곧 내가 새삼 ‘복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 것은 이와 같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시 1편). 나는 그래서 누구와 대화할 때는 어김없이 말씀 묵상을 강조하고, 이를 글로 쓰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권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마치 스펙트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언어의 세상을 보여준다. 여기에 주의 성령의 빛을 받으면 전혀 다양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목사이어서가 아니다. 누구나 주의 자녀이면 가능하다. 아내를 보면 때론 어린아이와 같아서 무방비상태로 말씀 앞에 자신을 노출함으로서 오히려 훨씬 더 순수하고 놀라운 세계를 고백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어찌 됐든 우리에게 복은 ‘진리를 믿는 믿음을 얻는 것’이다. 이 믿음이 결코 아무나의 것이겠나?
나는 가장 생소할 때가 내와 어찌 이처럼 말씀을 믿고 사모하게 되는지를 알 수 없을 때이다. 어쩌다 어제는 이래저래 딸애도 늦게 오고 하면서, 열한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잠을 청하면서도 새벽에 늘 정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놀라운 것은 몸이 안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뒤척거리다 화들짝 몸을 일으켜 보니 새벽 세 시, 평소처럼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을 때에 전혀 나는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떤 말씀으로 주를 마주하고 앉을지 알 수가 없다. 한데 이 놀라운 전개가 어찌 나의 지식이나 손재주에 의한 것이겠나? 성경의 언어는 계시의 언어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어서 열어보이심으로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똑같이 산에 올라 자연 앞에서 경미로움에 놀라지만 누구는 그저 그게 다인데, 우리는 그 장엄한 세계 앞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상심을 보는 것이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과 상식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이시고 들려주신다. 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인한 영광을 마주하고 이것은 우리의 영광이 된다. 하여 나는 말씀 앞에서 무엇을 구상하거나 의도하지 못한다. 그저 맡김이다. 어쩌면 흐리멍텅하게 읽고, 보고, 귀를 기울일 뿐인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 앞에 새로움을 펼치신다. 그러기까지 때론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까지 나는 그저 어떤 이의 설교를 듣고, 잡다한 책을 읽고,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 앞에 놓이고, 나의 일상에 무덤덤하다. 한데 그런 것이 한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듯 주의 세계를 보는 데 놀라운 적용과 새로운 시야를 열게 한다. 이는 전혀 의도한 바 없다. 하게 되는 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뿐이다.
이를 성도의 기본이라 한다. 우린 다급하지 않는다. 마치 양반과 같이 아무리 춥다고 곁불을 쬐지 않고, 급하다고 종종걸음을 치지 않으며, 소나기를 피해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지 않는다. 어디서 그런 느긋함과 평안함이 생겨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속이야 오죽하겠나. 그래서도 주를 부른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시 86:1-2).
곧 우리가 아뢰고 토로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면 앞서 무슨 말을 하시려는가, 무슨 일 때문이신가? 하는 마음으로 무던할 수 있는 게 곧 은혜였다. 그러게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놀라움으로도 주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 19:1-4).
이를 찬미하고 그 영광을 주께 돌릴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아닐까? 남들이 들으면 보잘것없는 교회와 교인들을 앞에 두고, 엉성하기 이를 데 없이 늘 모자란 설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나는 이러한 말씀 앞에 승복한다. 내가 무명한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나로 누구보다 부요하게 하심을. 내 안에 기쁨을 더하시는 이가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고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하시는 이와 같이 말씀이 삶으로 느껴지고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게 어찌 내가 잘나서이겠나? 오히려 내가 잘난 줄 알았을 때는 항상 좌절과 낙심뿐이라, 더, 더,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종노릇 하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나름 할려고 하는데 하는 일이 어렵기만 하고 풀리지는 않을 때, 이는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영혼이 ‘어떤 변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제 아내에게도 당부하였지만, 함부로 유듀브를 통해 누구의 설교나 성경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하는 것에 주의 해야 한다. 보면 적당히 배웠고 안다는 사람들이 이에 빠지기 십상이다. 교회의 일은 식상하고 평소 담임 목사의 말씀은 싱겁기만 하여, 뭔가 더 자극적이고 놀라운, 내 마음을 충족시키고 지적허영심을 채울 수 있는 말씀(?)을 선호하게 되는 것인데… 이에 말씀이 중요하지만 말씀보다 위태로운 것도 없다. 자기 발상이 말씀을 쥐락펴락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머리만 자라나는 외계인이 된다.
실제 우리 속에는 믿거나 안 믿거나 하나님을 알만 유전인자가 있었다. 이방 여인인 라합이 술집인지 여인숙인지 알 수 없는 업소를 운영하면서 주워들은 말로는 어찌 주의 역사하심 앞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긴 또 그렇다면 그와 같은 소식에 왜 저만 간담이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그러니 다를 알면서도 저런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결코 말씀은 폐쇄적이고 은밀한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열렸고 누구라도 들을 수 있다. 한데 그것으로 도리어 ‘썩어질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놓는 셈이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그러니 누구는 한 말씀인데 이리 가고 누구는 저리로 간다. 누구는 거듭남을 얻고 누구는 더욱 완고하여져 하나님을 돌이나 나무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영안(靈眼)이란 영묘한 눈으로 무슨 ‘신들린 사람들’의 특별함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신들린 사람들이라 하는 표현이 성도들에게 더 옳은 표현인 것 같은데, 너무 무속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세상에서 더렵혀진 용어라 감히 사용하기에는 조심스럽다. 어쨌든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가운데 육신으로 거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누군가에게 그것이 나이어야 하고, 나에게는 자연과 함께 일상의 사소함으로도 주의 역사를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말씀이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놀라우신 세계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6-9).
이에,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시 86:3-4).
우리는 주께 바라고 또 구한다. 이는,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10).
그러므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7).
하는 고백으로도 하루를 넉넉하게 살아낼 수 있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11, 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