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삿 6:10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시 89:32
역사의 반복이 때론 참 기구하다. 살만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을 일삼으니 것도 한두 번이지, 몸에 밴 죄성은 어쩔 수가 없는가보다. 이에 오늘은 미디안 사람을 세우시고, 오늘 시편의 표현처럼 회초리를 드신다. 이에 저들을 ‘칠 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신다.’ 이를 피해 ‘이스라엘 자손이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 살았다.’ 그러니 이 무슨 고생인지. 또는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였다.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정신 차릴 만도 한데,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에 오늘 세우심을 받는 기드온은 당돌하다. 저를 ‘여호와의 사자’는 ‘큰 용사여’ 하고 부른다. 저는 주를 알고,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하고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마치 주를 원망하는 듯하다.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앞서 그에 따른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주께서 저를 불러,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1-14).”
보면 저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 이는 겸손이 아니라 저 자신에 대한 열패감이었다. 한데 주는 일부러 저를 찾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 주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에 저는 표징을 바란다.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주의 사자가 일러,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20-21).”
저는 곧장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24).”고 “그 날 밤에 …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25-26).” 이를 그대로 행한다. 당연히 온 성읍이 난리가 났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28).” 자신이 지금껏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현재 당하는 고통의 출처도 알지 못하고 고착된 생활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에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31).” 하는 외침이 비로소 자신들의 신분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뒤집어엎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죄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오늘의 싸움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간단하게 보면 늘 그 모양 그 신세일 뿐이다. 결국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삿 6:32).” 한데 이 당돌한 기드온을 보소. 하는 짓이 참 어이가 없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36).” 하고 주를 시험하듯이 요구한다.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37).” 하여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38).”
하면 믿을 만도 한데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39-40).” 이와 같은 말씀에서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되새기게 된다. 주의 긍휼하심이 무궁하시다. 작금의 현실이 누구로 인한 결과인데… 주의 사랑이 한이 없으시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저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89:32-34).
주는 말씀이시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한다 하지만 우리를 섬멸하고 강탈할 수는 없다.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2-23).
우리에게는 주가 계시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사탄도 우리 곁을 맴돌며 설친다는 소리다. 예수님은 공생애에 앞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고, 사탄이 따라와 예수를 시험하였다. 사탄의 예의주시함은 집요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가 주를 바라고 우리 안의 주의 영이 활동하실 때, 사탄도 넙죽거린다. 하여 우리 주님은 자주 이르셨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우리 육신의 약함을 아심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감정이 늘 우리의 마음보다 앞서는 사람이라, 예수님도 “따로 기도하실 때에…(눅 9:18).”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통로다. 기도 없이 우리는 한 걸음도 온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린 죽은 자들이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그랬던 우리에게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곧 오늘 우리의 행함을 위해서도 기도는 필수이고 주의 도움은 필연적이다. 오늘 시편은 일러,
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시 89:22).
이는 엄연한 사실로 비록 지금은 비루하나 그 너머 주의 놀라우신 섭리가 있음을 알게 한다. 이를 다윗은 알고 있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2).
현실은 우리의 이상을 넘지 못하고 우리의 이상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데 발판을 두고 선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11).
저가 괜히 다윗은 아니었다. 우리가 괜히 주의 자녀이고 주의 일꾼으로 세우심을 받은 게 아니다. 어쩌면 기드온은 이를 알고 ‘감히’ 주를 시험하듯이 표징을 여러 번 얻는다. 하는 짓은 불신앙적인데도 주의 긍휼하심은 크고 넓으시다. 결국 하나님께 신실한 자는 세상도 관통한다. 오늘 시인의 표현대로면,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24-25).
우리가 악하고 불충할 때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만이 돋보인다.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알면 알수록 주가 나와 함께 하시는 것도 알 게 된다. 주가 나와 함께 하실 때, 주가 나의 ‘뿔’을 높이신다. 내가 높이려 하면 낮추시고 내가 겸손하면 주가 높이신다. 이 원리를 알면 그처럼 죽어라, 하고 살 이유가 없다. 오직,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4).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는 주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곧 이와 같은 형통은 이 땅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돈이 전부이면 돈은 떠난다. 건강이 우선이면 늘 병약함으로 시달린다. 세상을 섬길 때면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아, 이 놀라운 진리를 알았을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저는 굴하지 않았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 놀라운 역사는 우리로 자원하는 심령을 더한다. 이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 89:26).
일찍이 시인은 알고 있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놀라운 비밀을 알았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와 같은 고백은 저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통된 신앙고백이다. 왜냐햐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우리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모든 우주 질서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을 거들먹거리는 기드온의 행태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언약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 89:27-29).
표면적으로는 다윗과의 약속의 성취이나 나아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나의 오늘이며, 우리의 이 날이다. 이 날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다시 말하면 언제 주의 재림이 실현될지, 오늘일지 지금 당장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는 이사야의 진술은 우리를 바로 세운다(사 9:7).
이를 예레미야의 진언으로 읽으며 시적으로 옮기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6).
곧 예수는 야훼시다. 저는 전능자, 우리의 창조주,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이시다. 저가 오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오늘 우리의 충만함은 더도 덜도 말고 말씀으로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오늘 시인은 이를 ‘회초리’라 하였다. 가끔은 ‘채찍’이 필요하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2-3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흔들릴 게 무언가? 이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35).
성경은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여 어제도 묵상하였던 내용인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 안에 소망이 있다. 이를 알았고 그래서 베드로는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이런저런 삶의 징글징글한 현실이 때론 나를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오늘 시인은 반복하듯 외친다.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
(36-37).
하늘을 달이 증인을 서는 일처럼 주의 사랑은 확고하시다. 고난의 대명사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는 놀라운 고백이 어디 사사로이 나왔겠나?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하여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이와 같은 진리의 통찰이 우리에게는 열려 있다. 주 앞에 앉아 기도와 말씀으로 다가가면,
…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셀라)
(38-45).
모든 게 절망스러운 듯하나,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를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겪었고, 믿었고, 의지하였다는 것.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하는 공통점을 가졌다(히 11:7).
고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심이다(46-49). 오늘 시인은 절규하며 이를 반문하여 역설적으로 알게 한다. 이를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주의 말씀 앞에 아멘, 하는 일일 뿐인데. 그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면 우린 주 앞에 호소할 수 있다.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50-51).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주를 대적하는 일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7).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릴 살린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10:2).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83:1).
비로소 능력을 더하게 하신다. 곧 이 모든 일을 주께로 돌리는 것이 능력이고 주의 권능이며 믿음의 증거였다.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89:51).
이에,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