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전봉석 2022. 4. 24. 04:59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삿 9:53-54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 92:15

 

 

스스로 왕이 된 기드온의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들을 도륙하였다(1-6). 그 사이의 요담이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저를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우화로 백성들을 설득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형제들은 정중히 거절하여 하나님이 주신 자신들의 책임을 우선하는 반면 불쏘시개로나 쓰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어 세겜 족속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결국 저의 최후를 지켜보면 스스로 높여 심판자를 자청하는 자의 말로를 확인하게 된다.

 

성경은 일러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하나님이 이루시고 갚으심을 알린다. 내가 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다를 게 없다. 우리의 신앙은 기다릴 줄 아는 데 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기다린다는 것, 실은 이게 참 어려운 신앙의 단계인 것 같다. 그러느니 내가 어찌 말로, 또는 행동을 보여 저를 다스리는 게 빠르지 ‘하나님의 일’은 너무 느린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6).” 오늘 본문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7-15). 이에 시편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그러는 것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2-3).

 

결국 우리의 평온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었다. 이사야는 이를 가리켜,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사 16:6-7).” 슬퍼하고 근심하는 데는 자신의 교만과 거만함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린다.

 

이때 자기 분수, 하나님이 주신 분깃을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결국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겸손이란 주신 바 그 범위의 한계에 따라 묵묵히 감사함으로 사는 일이다. 다른 자와 견주어 비교하지 않는 것,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우리의 결국이 곧 닥치게 될 텐데 우리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살려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결국 누구는 좋은 몫으로 주어졌던 것을 잃는다. 주의 일을 하는 데 미적거리고 뭉개는 일보다 일을 그르치는 불순종도 없다. 다른 일이 산적한 것이다. 어쩌겠나? 생각하기는 행동하기를 미루고, 행동하기는 바라는 것을 더디게 하여 불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할 따름이다. 가라, 하실 때, 모세의 착화된 미다안 생활의 미적거림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야말로 성도의 길보다 무모한 게 또 있을까? 누구는 발 빠르게 계산하고 앞서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늘어놓는데, 이는 명령을 수행하는 병사로서 명령을 의심하게 할 뿐이다. 그 사명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겠나? 결국은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삿 9:57).” 서로의 불행일 뿐이다.

 

시편은 이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복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시 92:1).

 

이를 다윗의 시로 다시 받으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이와 같은 아름다운 고백이 결코 남의 것이 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인데 아삽의 시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73:28).

 

결국의 공통점은 하나다. 고라 자손의 시에서 이를 밝힌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49:10).

 

나름의 노력과 그 결과로 얻는다는 게 고작 이 땅으로의 생으로 전부라면 것도 안 믿는 자의 일이겠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보호하시는가를 알면 알수록 그 깊이는 달라진다. 오늘 시편은 이를 찬송하는 것이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1-4).

 

곧 감사하고 찬송하고 좋아할 때, 성경은 일러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이를 우리는 삶으로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게 우리의 오늘이고 영원한 내일이다.

 

요즘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누구의 여전함과 그들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저들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만도 못한 것을 두고 자신들은 스스로를 옳다 하고 잘났다고 여기는 생각들에 대해 안타깝기만 하다.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 오히려 '아픈 아이'를 모독하는 일이겠으나, 아이는 절박함으로 하루에 다섯 장 열 장 성경을 쓴다. 뭐라 이르면 두려워할 줄 알고 어찌 고쳐보려 안간힘을 쓰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제도 아무 생각없이 '노승과 잔나비(?)'란 무슨 노랫말을 버젓이 교회 단톡방에 올리고 나름의 신앙 고백을 썼다. 아침 일찍 아이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 노승의 뜻이 무엇이고 잔나비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자, 얼른 글을 삭제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사전도 찾아보고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라 이르는데, 아이는 자꾸 죄송하다고만 하였다. 

 

뭐라 이를 때, 내가 무엇이 돼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니라 저가 나의 말을 주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기특하다. 한데 어른들(?)은 특히 이 지겨운 목회자들, 동기들은 다들 저마다 자기들의 지식과 주장으로 비딱하다. 네가 뭔데 간섭인가? 하는 모양도 있어 그럴 때면 더는 입을 다문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동안은 별 수 없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주의 이름으로 받고 그 앞에 고할 줄 모르는 한, 이고지고 그 짐을 고스란히 자신이 지고 가는 것이다. 누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의 무게가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며 서른에는 30배였다면 마흔이 되니까 40배가 넘는 것 같다. 그러더니 불쑥 목사님은 안 그러신가 하고 물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10대에는 열 배의 무게로 20대는 스무 배의 무게로 느끼더니, 그때까지는 그저 그 정도였던 것이 결혼하고 아이를 낫고 30이 되고 40이 되며서 그 나이의 배수 만큼 인생의 책임과 무세게에 짓눌리며 살게 된다. 

 

나는 저에게 그와 같던 것이 더는 견딜 수 없는 것을 느끼면서 주 앞에 내려놓으니까 50배가 60배로 느껴지던 무게가 오히려 요즘은 그 이상으로 가벼워진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저가 물어서 나는 세상적으로는 그만큼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실은 2, 30대를 살고 4, 50대로 넘어오면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 앞에 내려놓고부터 더도 덜도 말고 그만큼씩 줄더라, 하고 일러주었다. 주의 말씀이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니 견딜만 하면 견뎌보시던가! 나는 이제 거저 산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이를 저는 알아들었을까? 보지 못한 것을 점점 더 확실하게 믿고, 볼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나이 드는 게 나쁘지 않다! 곧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하여,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주께서 눈을 열어주시면 비로소 보인다.

 

곧 이를 이사야의 글에서 다시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43:2-3).” 아, 이와 같은 날을 사는지?! 나는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다 빠지고 물 위로 다시 걷다 빠진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내 손을 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하여 꾸짖으시지만 그때마다 또 손을 잡아주신다. 이와 같이 주와 함께 하신다는 것,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시 92:4).

 

오늘의 이 찬송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심으로도 복되다. 다른 시편에서도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시 146:6-7).

 

이와 같은 찬송이 나의 삶으로 계속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점 더 실제의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진다는 것인데,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이와 같은 고백이 실제의 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의 결국은,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시 92:5-6).

 

이를 사는 동안에 바로 알지 못하고 사는 일보다 불행한 일도 없겠다. 그러니,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7).

 

오늘의 이런저런 일로 저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진술을 놀랍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7-9).”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 존재들인데, 고작 이 땅의 날 수로는 그 영원한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베드로의 설교처럼 우리는 그의 소유가 된 것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

(8-9)

 

우리가 주를 피난처로 삼는 데는 다 주의 능력으로다.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으로가 아니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이를 긴가민가하면서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도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성경의 지혜자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이다. 다윗은 이를 시로 표현하기를,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32:7).

 

아, 이 아름다운 고백을 날마다 입안에 머금고 사는 일보다 복된 날들이 또 있을까? 누구와의 연이은 통화와 저의 이런저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나는 주의 이름으로 굳건하기를 기도하였다. 예수 앞에서도 귀신이 발악을 하고 사람을 넘어뜨리고 발광을 하는 것과 같이 순순히 물러나는 죄악은 없다. 이를 상대할 때 기도가 우선이고 ‘주의 이름으로’ 하는 최선이다. 강하고 담대하게 맞서라, 하고 말해준 것도 그래서이다. 오늘의 이 모든 일을 조성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승리한다. 이를 보여줘야 한다. 누구는 자신의 삶이 넉넉해지는 것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그 생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진다고 하는 모순 앞에서도 주를 부를 수가 없다. 나는 저의 물음에 가벼워지는 이유에 대해….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

(10-11).

 

우리의 결국은 어찌 그리 다른지,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지난날을 돌아보면 주 앞에 새롭다. 나아오는 자와 스스로를 높이는 자의 차이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세상은 늘 상대적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절대적이다. 상대평가의 결과와 절대평가의 결과는 그 주관자의 온전하심에 달린 문제다. 우리에게는 또한 이길 수 있는 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것도 넉넉한 승리로 말이다. 이를 위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별 수 없다. 이고지고 가는 수밖에. 다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얼마나 쉬운가? 오늘 시편의 후반부의 결론이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12-15).

 

결국 우리의 결국은,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 3:10).” 이 상반되는 결국을 예상하면서 우리는 이제, 인정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