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삿 12:4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 95:1
전날에 사사 입다가 서원을 이행하는 내용(11:34-40)이 종일 마음을 맴돌았다. 외부와의 전쟁이 끝났는가 했더니, 내부적인 갈등이 더 심화된다. 오늘은 자기들 내부의 갈등과 반발로 내전이 벌어진다. 같은 동족 에브라임이 길르앗을 찾아와 암몬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길르앗의 입다를 온전히 기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전쟁에 왜 자신들은 참여시키지 않았는가를 두고 다툼이 일어 기어이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는 고질적인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의 일이다. 저들 에브라임은 길르앗에 대해, 기드온 때에도 자신들의 우월감에 상처를 입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8:1).” 그때마다 자신들의 참여가 부족했던 것은 생각지 못하고, 그 탓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순순히 서로 같이 한다는 것은 그렇듯 쉽지 않다. 더구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인정은 하지만 너보다 낫다는 식의 탓, 어쩌면 우리 죄의 근원지이다.
남을 탓하거나 원망을 하는 일은 죄의 가장 깊은 뿌리다. 아담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여자를 탓하였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리고 하와는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뱀을 탓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이처럼 죄란,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 이는 일체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그 궁극적인 탓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게 다 하나님이 탓이 된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인데, 자책은 하고 자신을 나무라기는 해도 도리어 상대를 탓하면서, 저와 맺어주신 하나님이 문제가 된다. 또는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식의 자기비애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하나님께로 그 화살을 돌리는 격이다. 이것이 다툼이 되고, 그 근원은 허영에서 비롯되어 ‘나는 너보다 낫다.’ 하는 바탕이 탓이다. 스스로 죄인 됨을 인정할 수 없고 고백하지 못하게 한다. 회개의 바탕이 겸손인데,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우리 안의 고질적인 교만은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네가 더 나빠!’ 하는 식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순전히 수용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해서 바울 사도는 덧붙이기를, ‘우리가 무얼 하든지 주를 인정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먹든지, 마시든지, 곧 우리의 일상으로의 문제인데… 누구와 어떤 다툼이 일어날 때 이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자기 기분, 심정, 그 억울함과 분함으로 확대되는 감정이 실은 ‘너 때문이야!’ 하는 열등의식이고 자격지심이다. 나아가 탐욕이 그 중심에 있다. 곧 저가 가진 것을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 같은 불편함. 저의 승리와 기쁨을 같이 주께 영광으로 올리지 못하게 하는 자격지심의 한 형태. 상대적으로 자신은 비루한 것 같은, 이는 순전히 하나님 때문인 것 같은. 그에 따른 결과는 수치심이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그리하여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19:29).”
성경의 이와 같은 주의와 가르침은 우리 일상에 그대로 반영된다. 스스로 자책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이 결코 겸손은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였으면 주께 그것까지도 맡겨야 하는데, 어떤 가시적인 결과나 그에 따른 성과가 돌아오지 않으면 졸지에 우리 안의 열패감은 자신을 몰아세운다. 자기반성이 아니라 탓을 위한 방어 자세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다, 하는. 그래서 말씀은 우리 일상의 가장 기초적인 말에서부터,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이상한 게 생각하던 것이 말로 나오는 순간 그게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
어제는 내내 그로 인해 마음이 어려웠다. 가슴이 답답하여 연거푸 약을 먹었다. 누구를 생각한다는 일, 저를 마음에 두고 그 한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위한다는 것은, 마치 ‘연애하는 사람’ 같다. 나 혼자 들들 볶인다. 내가 이래서 그랬나? 괜한 말을 했나? 이럴 걸 그랬나? 하는 숱한 자책이 따른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면서, 살 궁리로 그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 이것이 ‘탓’이다. ‘그러게 왜 하필 나 같은 죄인에게, 왜 이런 일을 맡기신 거야?’ 하고, 나는 어느새 하나님을 향해 입을 삐쭉거리고 있었다!
하나님께 겨누는 탓은 상대에게 굴욕감을 줌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 든다. 죄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길르앗과 에브라임은 서로 동족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승리의 기쁨을 얻지 못한 에브라임은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삿 12:4).” 이와 같은 모욕감을 주면서 자신들은 정당하다는 데서 길르앗을 탓한다. 결국 이것이 싸움이 되고,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전쟁이 더 치열하여졌다. 바울은 이를 두고,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결국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이었다. 모든 ‘탓’은 하나님께로 겨누는 화살이다.
구원과 멸망은 한끝 차이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땅에서 우리의 결국은 같다. 그러나 때가 오면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주 앞에 서야 한다. 또한 하나는 양으로, 하나는 염소로 비유하시기도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 34:17).”
우리가 오늘을 산다는 일,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내내 마음이 어려웠고, 혼자 애를 태우다 지친 하루였다. 그러는 동안 주의 이름을 되뇌었고, 저들을 생각하면서 주의 도우심만을 구하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도 말이다. 멀리 돌아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무 일도 하기 싫은 사람처럼 마음은 우울감으로 젖어들었다.
마침 오늘은 이른 아침에 멀리서 친구가 낚시를 오기로 했다. 같이 새벽에 만나야 하는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앉아 나는 억지로라도 말씀 앞에 나를 앉힌다. 누가 물으면, 나는 살기 위해 이런다. 이 시간을 귀히 여기는 것은 아니면 내가 늘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마주알고주알 할 말을 머금고 주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일, 아! 내 안의 자격지심과 영등의식이었구나! 하고, 오늘도 에브라임의 시비와 저들의 내전을 보며 그것이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고개를 숙인다.
이어 세 명의 사사가 소개되는데, 입산과 엘론과 압돈으로, 더는 저들의 행적이 간소하다. 이력 정도로 소개되었을 뿐, 아마도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적이 갈등으로 인해 특정한 사건은 없었던가 보다. 적당해도 문제다. 우상이 판친다.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3-14).” 이는 그것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우리로 얼마나 우리 자신이 고약한가를 알게 하신다.
이와 같은 말씀을 먼저 붙들지 않으면 하루를 또 어찌 견딜까? 아직은 은혜의 때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나는 천천히 걷는데도 두어 번 의자에 앉아 허리를 펴고 고통을 달래었다. 아내가 이런 가운데 낚시를 간다고 하니 잔소리를 한다. 나는 그저 가만히, 가서 물가에 앉아 숨 좀 돌리고 온다는 말로 궁색한 설명을 하였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다. 그래서도 나는 나의 젊은 동기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참 뛰고,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나이와 건강인데, 곧 시간이 지나면 육신이 먼저 힘에 부칠 텐데.
또한 ‘아이’의 일은 점점 더 난제다. 더는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궁색해서도 피하고만 싶다. 근본적인 그 영혼을 위해서도 아이엄마와 함께 기도하고 주께 아뢰고, 믿음으로 건사해야 할 텐데… 우리가 왜 주 앞에, 주만 바랄 수밖에 없는지를 저는 안이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이는 점점 나이가 차고, 여자에 대해 관심은 늘고, 일상적인 사고나 대화는 어려워져 가고, 그래서 종종 보도되는 사회사건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텐데. 그러니 저이나 나나 언제까지 아이를 돌보고 건사할 수 있겠나?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낡아질 텐데. 아이는 또 무슨 운동화도 아니고 슬리퍼도 아닌, 요즘 유행한다는 것을 사고는 내심 내 눈치가 보이는지 자책을 하고 자꾸 문자를 해댄다. 뭐라 하기도 지친다.
아, 이 지긋지긋한 저마다의 자책들. 누구는 저의 남편을 감당할 수 없다면서 자신을 한탄하고, 힘에 부쳐 외면하려고만 한다. 누구에게는 자식 일이 그럴 테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무능과 열패감이 그러할 텐데… 사탄의 공략이 참으로 진부하고 상투적인데도 여전히 먹힌다! 우리 인간의 죄의 출발은 저의 꾐에서 시작된 것이라 늘 그 수법이 뻔한데도 넘어간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질 수 없는 모양이다.
오늘 시편은 그런 중에 감사를 찬양하게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 95:1).
저마다 그럴 상황이나 상태가 아님에도, 오라! 하는 청유형의 부르심이 우리로 하던 일을 멈추게 하신다. 생각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잊고 살았던 초청으로의 초대를 일깨운다. 히브리서를 근거로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추정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히 4:7).” 오라, 하고 부르시는 부름은 ‘오늘’이어서 가능하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이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하는 날은 오늘이다.
오늘 이를 받을 때 잃어버린 감사도 가능해진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2).
평소 얼마나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고 살았는지, “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2-23).”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와 말씀이 나를 찌른다.
어제도 나름은 주의 일이라 여겨 이리저리 마음을 쓰던 일에서 더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끼면서부터, 순간 밀물이 밀려들어오듯 나를 자책하는 마음이 쓸려오는가 했더니 어찌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썰물처럼 나를 몰아내버리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 햇살을 피해 어느 그늘에 앉아 물끄러미 시선을 놓고 있으려는데,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는 게 맞는가?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나를 쓸어냈다 밀어 들였다 하였다. 아내는 더는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지 말라는데, 이를 그리 보면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감사는 만족으로 오는지 그와 상관없이 오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4).
아, 나의 이 길이 맞나? 하는 데는 언제나 자신이 없다. 그러할 때,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100:4).
성경은 막무가내로 감사를 밀어 올린다. 내 안에 차는 고질적인 열패감으로 시달릴 때,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단지 그러려니 하고 저들의 일이나 그 사연을 두고 내가 씨름할 것도 아닌데, 나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어렵고 젊은 목회자 내외의 박터지는 내전을 지켜보며 속을 끓인다. 그런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히려 내 안에서도 성가시고 귀찮기만 하여 ‘아이’의 엉뚱한 문자나 전화를 회피한다. 저들 가정의 일을 모른 체 그만할까 하고 슬그머니 손을 거두려고도 한다. 그럼 됐지, 볶이는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이것이 주의 마음이겠거니 짐작은 한다. 저는 우리를 지으신 이시다. 이 모든 환경을 조성하시는 이시다. 하면 나의 내적갈등도 다 아시고 계신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95:3-5).
오늘 시편은 나로 옴짝달싹 못하게 하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를 알면서, 묵상하면 할수록… 나는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 연약한 육신을 이끌고, 그 마음은 누구보다 병적으로 예민하여 혼자 끙끙 앓는 게 절반이 넘지만, 툭 하면 남 탓을 하고 열등감에 빠져들기 일쑤지만, 그래서도 나에게는 오늘 뿐이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면 나는 딱 하루씩, 오늘만 살듯 주께 전념한다. 그러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알면 알수록.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6).
싫으면 어쩔 것인가? 안 믿는 자이면 돈이나 자기 추구에 전념하여 하나님 없이도 산다고 하지만,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 곧 내가 하루씩, 오늘만 산다고 하는 마음은 오늘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에 시달린다 해도 그만하면 됐다.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마무리로 내가 기도할 때 표현하게 되는 기도로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예배로 하루를 올려드리며 마무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다. 이는 다 주의 것이라.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1).
내가 주의 것이면 이 하루도 주가 더하신 날로, 이만하면 됐다 하는 감사와 만족보다 더 좋은 찬송이 있을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7-8).
매일 하루, 그 날의 은혜로 감사하고 그 한 날의 은총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충만하였다. 거의 5, 6년 만에 친구와 저수지에서 만나기로 하고, 마음은 들떠 전날에 다 준비를 해놓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야 하는데… 말씀 앞에 앉히고 나의 한 날의 첫 시작을 평소처럼 하게 하심도 감사하다.
내가 이제 주께 바라는 한 가지 일, 주의 뜻이 나의 한 날에 이루어지시기를.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9-10).” 이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 95: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