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전봉석 2022. 4. 29. 04:48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삿 14:4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 97:10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신묘막측하시다. 신기하고 묘하고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 어찌 저런 행실에서 주의 역사가 이루어지겠나, 싶은 데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증거다.

 

블레셋에 의해 오랜 시간을 시달림을 당하는 민족에게서 삼손이 났다. 삼손은 블레셋 딤나로 내려가 그곳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부모의 반대와 우려는 마땅하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는 부분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에도 어긋남이 없다. 그런데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하는 것은 옳게 여겨지지 않는다(2-3).

 

그런데 성경은 이를 소개할 때, 이와 같은 생각과 마음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4).”

 

신앙은 때로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과 기준을 흩트려 놓는다. 이를 오늘 시편의 명징한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 97:10).

 

이를 바울의 시선으로 읽으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곧 당장의 어떤 현상보다, 그 너머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인데, 이를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하던 저의 의지가 단순한 결기는 아닌 것이다.

 

신앙은 그저 곧고 바른 과단성이 있는 성미가 아니다. 말씀으로 의미를 새겨,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보는 일이다. 표면적인 것 이상의 것을 붙드는 일이다. 앞서간 모든 믿음의 발걸음들이 그러했다. 그 시대에 노아의 행동도, 아브라함의 결정도, 특히 모세의 상황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즉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계시의 세계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셔야 알 수 있는 세계다. 성경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곧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고, 당면한 문제로도 아니고,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고 막연하게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는 나중 일이고, 나아가 우리 몫이 아니었다.

 

누가 혼자 사방으로 뛴다. 5백에 얼마, 천에 얼마, 하는 자리를 여러 곳 보고 다닌다. 교습소를 하려 하는데, 실은 교회를 염두에 둔 마음이다. 그런데 정작 그 일에 앞장 서야 하는 이는 나 몰라라 하고 집에 널브러져 방관만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싶은데, 시쳇말로 싹수가 노랗다. 의미가 없는 짓 같다. 그럼에도 나는 저의 전화가 올 때마다 위치를 묻고, 그 주변을 살피고 상상한다. 천에 70에 나왔다는 29평짜리 2층 자리는 본래 교회였다는데, 크기도 적당하여, 벌써 여러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어디 학교 앞에 있다는 다섯 평짜리 자리는 교습소로는 적합한데 교회로는 부적합하다. 예배당으로는 너무 협소한 것이다…. 우리의 이런 대화를 누가 들으면 헛웃음만 나올 게 뻔하다. 그럼에도 나는 저의 전화가 걸려오면 우선 머릿속으로 교회로서는 적합한지를 생각한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서 거의 형이상학적이기까지 하다. 뭐 이런 자가 나실인으로 사사로 세우심을 받았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주의 마음을 생각하고 주의 사랑으로 위하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이 일은 사람의 판단으로가 아님이다. 내 안에 이는 우려나 갈등도 그와의 싸움이다. 실은 불신앙적인 요소다.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지만 그에 앞서 주께 맡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 생각에는 수천 수백 명이 훨씬 더 나을 텐데, 하나님은 다 돌려보내시며 이르셨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삿 7:7).” 이는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

 

곧 우리의 자만과 교만함은 그렇다. 그러므로 “네가 누각을 모든 길 어귀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아니하도다(겔 16:31).” 누각,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는 망대 같은 그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산들? 제 값도 못 받는 창기만도 못한 것이다. 하여 바울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저의 ‘약함의 예찬’은 나에게도 늘 힘을 돋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그러므로 우리로 주만 바라고, 주의 뜻만을 생각하며 달려가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여 나는 누구의 수고와 그의 눈물을 응원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3-5).

 

복, 우리가 바라는 참된 복은 하나님만 바라는 것. 저 본향의 푯대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 오늘 시편은 그에 따른 절대 주권자, 우리의 구속자 하나님만을 바라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1-2).

 

우리의 산만한 주위를 환기시킨다.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낸다. 주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게 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회복될 것을 노래한다. 때가 이르리니,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5:24).” 더는 악한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하게, 우리가 전에는 어떠했는가를,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그러나 이제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하여, 오늘 우리로 이처럼 말씀 앞에 세우신다. 나를 끌어다 앉히시고 들리신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22:5).

 

곧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반드시 그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당장의 현실과 가시적인 결과로는 어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으나,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2).

 

이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가 시내산에 임하셨던 일로,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16).” 하나님이 엄위하심으로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신 4:11).” 그의 위엄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알기 어려우나 감추시지 않는다.

 

성경은 계시의 세계라서, “또 그 모든 편지(성경)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행여 우리의 판단과 기준으로 주의 일을 하려 할 때는 모든 것이 억지스럽고 나감하기만 하다. 여러 번 생각하고 또 신중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욥은 이에,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우리가 주를 찾는 것 같지만 주가 찾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한다. 우리는 주의 일을 속단할 수 없다.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다만 ‘푯대만 바라보고’ 나아갈 뿐. 우리는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어느 날 볼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 45:6).

 

오늘 시편에서도,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97:3).

 

이처럼 확실하고 확연하게 드러내신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싹수가 노랗다고 여겼던 데서 새순이 나고 튼실한 나무로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가능은 없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시 97:4-5).

 

그러니 나의 급한 마음이 문제고, 부정적인 생각이 영적인 시야를 가린다. 혼자 생각이 많고 공연히 마음이 어려우면 동시에 주만 바라기가 어려워진다. 나의 이 아이러니한 마음까지도 주가 들어 사용하실 때, 나의 생각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우리로 오늘에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는데, 그 보이는 것이 하나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해도,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말씀 앞에 나의 허무한 마음을 허무신다.

 

괜한 생각을 부순다. 어지러운 생활을 단순화시킨다. 아침이면 이와 같이 말씀 앞에 앉아 시편을 옹알거리듯 되뇐다. ‘조각한 신상’이나 ‘허무한 것’은 모두의 예단이다. 앞서 달려가는 근심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재고 따지느라 미적거리게 한다. 모든 염려와 근심들이 하는 일이었다. 특히 안 믿는 친구나 불신앙적인 이들과의 대화에서 덩달아 나의 마음이 어지럽다가도….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시 97:6-7).

 

시편의 진술은 하나님의 선포다. 나를 붙들어 앉힌다. 자중하게 한다. 욱, 하고 일던 마음을 다스린다. 풀이 죽어 고개를 꺾고 있던 나의 어깨를 감싸서 고개를 들고 저 멀리를 보게 한다. 그리고 똑바로 서서,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사 1:29-31).” 막연하게 의지하고 또는 불안해하던 것의 결과를 똑똑히 보게 하신다.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시 97:8-9).

 

이를 반드시 주가 책임지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사 43:5).” 나의 나로 나를 이길 수 있게 하실 것을 믿게 하신다. 늘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누구에 대한, 어떤 일에, 마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서 새 힘을 얻게 하신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3).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97:10).

 

이는 모두 우리의 책무다. 필연적으로 매일 싸우고 싸워서 나를 쳐 복종시키는 이유였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덩달아 으르렁거릴 것 없다. 대대거리며 상대하고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곧 그로 인한 나의 갈등 말이다. 그러니 내가 늘 나의 적이고 원수다. 스데반도 예수님도 그러한 날 위해 죽기까지 기도하셨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가끔 누구와의 대화에서 누구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저도 어쩔 수 없어 그러는 것을 우리가 주의 마음으로 품어야 한다. 이해하고 감싸야 한다. 저도 안 됐다. 성령이 아니시면 그 영혼이 풀려날 길이 없다. 정작 그 일로 모두가 어렵다.

 

오늘 시편은 우리의 길이 그럼에도 기쁨으로 약속된 길임을 알려준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 97:11).

 

이를 앎으로 요셉은 유혹을 뿌리쳤고(창 39:9), 다니엘과 세 친구는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단 3:16-17, 6:10, 16), 선한 싸움을 위해 물러서지 않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8-19).” 정말이지 그러기 딱 좋은 세상이다. 무슨 코인이니, 주식 투자나 하는 게 이제는 우리의 의식주보다 더 필연적인 세상이 되었다.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강요당하는 세상에 산다.

 

성경은 일러 전혀 엉뚱한 것을 바리시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대체 우리 스스로의 행복추구권을 성경으로 무시당하는 것일까? 이에 오늘 시편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기 위해서도,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97:12).

 

우리로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기를, 왜냐하면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1:6).

 

이를 위하여 우리가 오늘 흘리는 눈물에 대하여는 그 값이 귀하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이를 친히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보증이 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곧 오늘 누구의 애타는 심정과 그 수고의 잔으로, 어느 훗날 반드시 저들은 주의 사명을 감당하며 기뻐할 것을 위하여 기도한다.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97: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