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새 노래

전봉석 2022. 4. 30. 05:48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삿 15:19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2

 

 

삼손이 딤나의 아내 일을 빌미로 블레셋에 보복을 한다. 여우 3백 마리의 꼬리를 묶고 불을 붙여 저들 밭에 밀어놓는다. 삼손의 분노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물론 삼손 개인의 충동적인 행동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된다. 곧 우리의 허물과 그릇됨을 가지고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신다.

 

가령 요셉의 경우 그 형제의 미움과 시기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으나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선을 이루셨다. 당사자 요셉의 증언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그렇다고 죄가 온당하다는 논리는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우리의 정당함과 하나님의 정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이내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누구의 악은 악으로 남고, 누구의 악은 그것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니,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시 7:14-16).

 

그러니 우리의 판단과 기준은 사람들의 가치와 같이 일반화시킬 수 없다. 성경의 정의는 일반화될 수 없고, 그에 따른 말씀은 상식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그러니 마음을 닫고 자신의 생각으로 우선하는 자와의 대화는 난감하다.

 

오늘 본문 서두에서 삼손의 행실은 실망을 더한다. 스스로 외면하고 버린 여인이 재가하여 다른 데 시집 간 것을 두고 어쩌면 당연한 일에 보복을 한다. 삼손의 억지는 설명이 어렵다. 저의 막무가내인 행동이,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블레셋에 알게 하신다. 이에 성경은 분명히 하길,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세상에 살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는 일이다. 한데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개인적인 은사를 함부로 행사하는 일을 두고 하나님은 그것까지 옳다고 하시지는 않는다. 삼가 우리가 또 조심하고 신중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데 주의하는 일이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4-15).”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세상은 ‘온전함’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하지 못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하였다.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하고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9-10). 즉 저들이 두려워한 것은 삼손 같으나 실은 그의 민족과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었다. 곧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이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오늘 나의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지, 꿀릴 것 없다. 다만 믿음 없는 자들에게 답을 구하려는 것이 문제다. 굳이 저를 판단하고 비판할 것도, 저들과 부화뇌동하여 교회가 정치화되고 사람이 쓸려 다니는 일도 문제다. 어느 사람을 지지한다는 것과 세상 풍토를 따르는 것은 성경이 경계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여전히 완악함이 존재한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곧 우리의 안일함과 어리석음이 주의 일을 그르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도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 결국 서로의 반목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를 알지 못할 때 이보다 난감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게 하신다. 삼손의 경솔함과 충동적인 행동들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저의 소행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 때에 저는 주께 원망하지만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19).” 엔학고레(En-hakkore)는 우물을 뜻하는 ‘엔’과 부르짖는다는 ‘학고레’를 합친 단어다. 곧 ‘부르짖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삼손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삼손은 소생하였다. 이를 시편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면,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2).

 

그래서도 우리의 감사는 그럴 가치도 안 되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늠되어야 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하시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이 복이었다. 오늘 시편은 이를 알린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경륜과 섭리와 통치를 깨닫게 한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여기서의 중심은 ‘새 노래’다. 이는 날마다의 은총이다. 오늘도 새롭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다. 전에 받은 은혜로 사는 게 아니다. 마치 ‘광야의 만나’와 같다. 날마다 부어주시는 ‘새 노래’로 우리는 산다. 우리의 난제는 그런데 자꾸 세상을 기준으로 하려 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오랜 경험과 수치를 가지고 판단한다. 이는 산술적인 과학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근거 있는 이치다. 사람들의 성향을 분류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더 많은 사람들의 가치를 선으로 놓고 판단한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분별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모든 사안과 모든 문제는 개별적이다. 통상적으로 일반화하는 성경은 사람의 견해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사람은 계통적이나 하나님은 개체적이시다. 즉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설교나 말씀은 창의적일 수 없고, 우리의 증언은 결코 창작이 아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동시에 외치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 체험과 삶은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이를 오늘 시편에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시적표현으로 언급하였다. 곧 이를 세상은 거북하게 여기겠으나,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이는 우리 기독교의 근간이다. 나를 위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나를 도우시고, 나를 지키시는 것은 순전히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하심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이를 부당하게 여기는 한 하나님의 참 존재는 부정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하나님을 변증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밖에 증명이 안 된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의 놀라운 표현은 매우 섬세하고 시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여기서의 중심은 ‘사랑이 없으면’이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2).

 

이는 엄연히 ‘여호와께서’다. 주가 알게 하시고 나타내셔야 한다. 왜?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날마다 이런저런 상황에 우리를 놓아두신다. 곧 ‘새 노래’를 익혀 찬송하게 하심이다.

 

가령 어제는 며칠째 치통으로 고생하다 치과에 갔다. 이런저런 우울한 진단이 내려지고, 그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한참 설명을 하는 이에게 나는 보험이 되는 것으로만 요구하였다. 그리고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순간 그의 표정이나 마주대하던 공손함이 사라졌다. 저절로 사무적이고 무뚝뚝한 말투로 바뀌는 저의 말투가 이해는 갔다. 지극히 나를 위하는 말들이었으나, 당연히 저의 돌변한 태도에 굳이 할 건 없다. 다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저에게 설명할 길은 없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 98:3).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볼 때 어느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심지어 내가 삼손을 능가하는 경거망동으로 함부로 살았던 때에도,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89:32-34).

 

이로써 나를 구별하심을 알았다. 오늘 시편도,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98:4).

 

내가 오늘에 있는 이유다. 곧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 목적, 그 영광의 일원으로 오늘을 산다. 이를 자각하고, 깨달음으로 주만 바라며 산다는 것은 복이고, 은총이고, 은혜이며 엄청난 깡다구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시 98:5-6).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고 가치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150:6).

 

결국 우리의 이 자연적인 몸과 그에 따른 낡아짐을 두고 너무 애지중지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복종을 배운다. 물론 삼손과 같이 투덜거리고, 저보다 더 충동적일 때가 많지만 내게 두시는 약한 육신과 불안과 신경증으로도 나는 주를 더욱 바란다. 이것이 은혜요 은사인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 이는 자연만물도 알게 해준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7-8).

 

이를 바울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우리로 엄연히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하신 세계에 대하여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상실하게 하였다. 이에 연연하며 하나님께 찬송하고 어떤 의도로 경배한다. 여느 우상숭배로 바꾸어 놓았다. 이유나 목적 없이 순수함으로 주를 바라기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새 노래’가 필요하다. 병 고침을 위해, 하는 일의 형통을 위해 주를 찾고 부르는 일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이신 순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나를 향하신 이와 같은 주의 사랑이 있었다!

 

곧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별 수 없다. 악, 소리 날 때 살려주세요! 하는 법이다. 다른 여차한 군더더기는 아직 살만한 것이다. 이를 진술하면,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한 마디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 98:9).

 

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곧 우린 엄연하게,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15:49).” 하신 말씀의 대상이다. 이를 명심함이 신앙이다.

 

그리하여 성결할 수 있다면 성결하게,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 곧 계속 이어지는 묘사가 두렵고도 설렌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1).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8).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1).

 

내가 들어갈 나라, 주의 나라에서 주를 영화롭게 하려면 오늘도 ‘새 노래’로, 오늘의 은혜로 살아야 하는데…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시 9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