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전봉석 2022. 5. 1. 05:41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삿 16:22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3

 

 

삼손은 어쩌면 우리의 가장 친밀한 자아 같다. 자신에게 허락된 특별한 은사를 그 모양으로나 사용하고, 구별하여 세움 받은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그 지경으로 삼으면서도 번번이 주의 권능으로 사용하심을 받은 일생이니.

 

오늘 서두에도 한 기생에게 빠졌다. 블레셋의 성읍 가사에서의 여인이다. 영웅호걸이란 그만큼 헛헛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자아로 생지옥을 맛보며 사는 꼴이다. 성경은 일러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일생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육신의 정욕에 대해서는 본능과 같고, 안목의 정욕에 대해서는 거들먹거리는 교만의 소산이며, 이생의 자랑은 내심 내세울 게 없는 자들의 허허로움이라 하겠다.

 

어디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한 여인이 화려한 침대로 바꾸었다. 이를 자랑하고 싶은데 부부의 침실을 공개하며 침대를 자랑한다는 게, 하여 꾀병을 앓고 친한 이웃들이 문병을 오게 하였다. 그 이웃 중에 또 한 이는 최고급원단의 명품 브랜드 속옷과 속치마를 선물 받았다. 이를 자랑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속없이 내보일 수도 없어 속만 태우고 있다 문병에 같이 가기로 했다. 침대에 누운 여인을 둘러서서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묻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침대로 전환되었다. 아프다고 누웠던 이가 반쯤 일어나 어디서 수입한 무슨 제품이라고 한참 자랑을 하는데, 갑자기 끼어들어 그 옆에 치마를 들추고 앉아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또 다른 여인이 물었다. 그러자 순간 눈길이 저의 속치마로 끌리고 여자끼리라 속옷 이야기를 하며 어디 제품이고 원단이 어떤지를 늘어놓다 민망하여 물었다. ‘자기는 근데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그러자 어느새 도로 누운 침대의 여인은 살짝 귓속말로 ‘자기랑 같은 병이지 뭐!’ 하였다.

 

웃기고도 유치한 이야기 같지만 이생의 자랑이란 게 그처럼 덧없다. 제 아무리 경건한 삶도 이와 같은 것들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어서,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10).” 그것이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닌가? 죄의 숙명으로 우리는 시달리면서 무엇이 위로가 되고 자랑이겠나? 알게 모르게 우린 육체를 따라 산다. 이는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하는 중간 부분의 말씀을 잡지 못할 때의 결과다.

 

죄의 정욕은 언제든 인다. 삼손의 이야기가 새삼 나의 이야기와 중첩되면서 우리가 받은 사명을 얼마나 경시하고 함부로 재단하며 살고 있는지, 바울 사도의 이 놀라운 설교는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왜 그런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이를 오늘 삼손은 망각하였고, 우리는 수시로 망각하며 살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경계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이고 나그네일 뿐이라는 소리다. 시편에서도 잠언에서도 이에 따른 허무를 노래하였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시 39:11).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 24:20).

 

결국을 다 알면서 습관처럼 죄로 산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 우리는 영혼을 붙들고 주를 바라야 산다. 주의 말씀으로 살아야 산다. 아니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잠 6:15).”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주를 경외함이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삼손의 결국은 이를 말한다. 들릴라를 사랑하면서 저는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갔다. 저의 결국은 비참하다. 모든 결국이 그러하다. 이에 지혜란,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시 119:112).

 

‘내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 성경은 이르시기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이를 마치 특별하고 생소한 소리로 들을 게 아니다. 이 땅에서도 목표한 바를 위해 나름은 다들 부지런하다.

 

아내가 시간을 쪼개 사이버대학에 편입, 사회복지사를 공부하고 있다. 요즘은 중간고사 기간이다. 오늘은 마지막 리포트를 제출하느라 새벽 두 시가 다 됐는데도 식탁에 앉아 있었다. 잠이 달아난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다 그만 자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안방 베란다에 마련된 ‘나의 골방’으로 왔다. 아직 새벽 두 시. 아내는 내가 시간을 잘못 봤나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간을 말해주었다. 나는 슬그머니 안쪽 베란다 문을 닫았다. 30분 혹은 한 시간만 더 일찍 일어나도 고요하게 턱을 괴고 앉아 말씀을 오래 되새길 수 있다!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가져와 ‘하나님의 농밀하신 섭리’를 오래 머금고 있을 수 있다. 졸릴까봐 미리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오래 머물고 싶다. 그 촘촘하고 짙은, 빽빽한 ‘하나님의 씨실과 날실’들 사이의 경륜과 섭리를 나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주의 영이 열어 보이시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하는 시인의 고백을 나는 이처럼 단순하게 이해한다. 마음이 실제의 시간이 되게 한다. 하루 일과 중 이 시간을 중심으로 사는 것 같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그러다 이와 같은 말씀을 마주하면 더더욱 생겨나는 마음도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각자는 마음을 기울이며 더 나은 것을 향해 간다.

 

삼손은 이후 소렉 골짜기에서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4). 저는 기생이다. 삼손은 그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셈이다. 마음의 ‘홀림과 끌림’은 정욕의 정직한 저속어다. 천하의 다윗도 순간이었다(삼하 11:2-4). 그 일의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의 아이러니한 결과로 지혜의 왕 솔로몬이 저에게 낳으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씨실과 날실’, 그 농밀함과 세밀함의 섭리를 어찌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겠나? 그러니 더 내 마음을 기울일밖에.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려하시는 바,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왕상 11:2).” 결국의 결국은 비극뿐이다. 이는 다윗도 솔로몬도, 누구보다 주의 특별한 은혜로 살아갔던 이들의 증언이다. 고난의 대명사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시인도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그러니 우리의 날들이란 얼마나 모질고 험악한가. 그러나 이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란….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삿 16:16).”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죽을 맛인지.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보다 그 삶이 더 고역이라 한다면, 스스로에게는 물론 곁에 안 믿는 자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 일이다. 결국은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17).” 저는 결국 들릴라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의 결국은 참혹하였고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22).”

 

이는 머리털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라는 열매를 따 먹는 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업신여긴 것이 죄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 해도 죄는 여전하다. 주일 한 번, 말씀 한 번, 헌금 얼마, 얼마큼의 기도가 문제가 아니고, ‘그럴 수 있지’ 하는 게 ‘그래도 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전부를 잃은 뒤이다.

 

누구는 선교사로 나갔다. 얼마 후 비즈니스 선교로 전환하였다. 그러다 선교는 사라지고 비즈니스만 남았다. 누구는 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동물보호 단체에서, 또 누구는 낙후되고 피폐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주의 이름으로 헌신하여 오지로 떠났다. 얼마쯤 지나 저들에게는 주의 이름과 주의 마음은 사라지고 자신들의 신념만 남았다. 신념은 아집이 되어 돌아왔다. 자신들의 일을 알리기 위해 비폭력을 어떤 폭력보다 적대적으로 행사한다. 결국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잠 6:27-28).” 그게 어디 남의 여인뿐이겠나?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육신의 정욕에서다. 안목의 정욕은 그 바라는 것의 실상이 된다. 스스로는 선할 수 없다. 우리는 다 죄인이다. 이를 자주 잊거나 부정한다. 성경은 간곡하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이는 수동적인 게 아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12).” 이는 오늘 삼손이 던지는 외마디 비명이 아닐까?

 

이어 시편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근간으로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경륜과 섭리를 알리신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3, 5, 9).

 

하는 오늘 시편에서 연거푸 세 번 반복하는 어절을 되새기다, 죽어도 거룩할 수 없는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와 안길 뿐이다. 저가 세상 모든 만민을 통치하신다(1-3). 공의를 행하시고(4-5), 찬양을 촉구하신다(6-9).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듣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어릴 때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믿어지지는 않는데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이 아주 무서운 적이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여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고… 거기다 사람을 흙으로 지어 그 코에 바람을 넣어서 생명이 되었다니! 어린 것이 뭘 안다고, 나는 그게 그렇게 믿을 수 없었다. 특히 ‘영원’이라는 시간이 제일 어려웠다. 으악, 하고 고통 중에 죽으면 끝나야 하는데, 그게 영원하다는 영원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끝도 없는 시간의 끝을 생각하다 무서워서 울기도 했던 것 같다. 누가 그때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이가 말하길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믿음이야!’ 하고 말해주었다.

 

오늘에 이르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시는 말씀이 이처럼 값지고 보배로울 수가 없다.

 

오늘 시편은 만민이 떨 것을 요구한다. 대체 무엇을 무서워하라는 소릴까? 예수님은 일러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즉 무서울 걸 무서워해야지, 이건 그저 이 땅에서 어찌 살까를 두고, 가진 것으로 만족함이 없이 두려워 떨며 사는 꼴이니,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2).

 

우리의 자긍심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바울은 이를 위해 죽기까지도 두렵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앞서 저의 말씀이 나에게 되묻는 것 같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그야말로 우린 무엇을 위해 죽어라하고 살고 죽어도 주의 영광을 위하기를 바랄까? “…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나의 자긍심이다. 어디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정말로 그러한가? 시편은 나의 손을 잡아 이끄시는 것 같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99:3-4).

 

참 두려움은 공의와 정의의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미 죽어 마땅한 자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이가, 공의와 정의를 가지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의 죄를 없이 하신다. 이와 같은 공의와 정의 앞에 어찌 아니 두려운가?

 

충만, ‘은혜 위에 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이란 늘 송구하고 기쁨에 넘치는 일로,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 61:8).” 이것으로 자긍심으로 삼을 때,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5).

 

아, ‘그는 거룩하시도다.’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서면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는데도 저의 거룩하심이 나로 거룩하게 하심으로,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시었다. “…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3-4).” 나는 여호수아의 이름을 가리고 내 이름을 적어놓는다. 저가 나인 것을 이제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고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를 알고 바라기에,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자 그럼 다 됐지, 뭘 더 바라겠나?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시 99:6).

 

감히 내가 견주어 그들의 이름과 어찌 나란히 설 수 있겠나만, 저들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하는 것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노래하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55:17).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62:8).

 

말씀이 위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주가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기를. 그러므로 기도뿐이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9:7-8).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누구에게 말한들? 누가 내 마음을 알까? 잠언은 결코 그런 일 없다고 단언한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누구보다 솔로몬이 할 소린 아닌 듯한데, 모든 걸 다 누리고 살았던 이가,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하는 고백은 오히려 위로가 된다. 이어서 저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7:3).” 우리 안의 말 못할 사연이 오히려 우리로 주를 더 의지하게 한다. 이제 나의 남은 생은 오로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부디 그러하기를.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