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내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삿 18:31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 101:7
사사시대의 타락과 ‘자신들 좋은 대로’ 섬기고, 행하던 것에 대해, 이어지는 말씀이 희한하다 싶을 정도이다. 이를 본문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 규정한다. 어쩌다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1).” 그때까지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가와 단 지파의 단적인 우상숭배와 자기들 좋을 대로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모습을 여전히 반영하는 듯하다.
단 지파는 아모리인들로 인해 산으로 물러갔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1:34).” 그런 상황에 땅은 협소해지고 제때 땅을 분배 받지 못한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아모리인들이 강하였으나 그것을 이유로 내세우기에는 저들의 안이함이 문제였다. 결국 자신들이 할당받은 땅을 포기한 것이고, 허술한 북쪽 라이스를 정복하려 하는 내용이다. 그때에 저들은 미가의 집에 들어가 멋대로 제사장인 레위인과 저들의 우상들, 은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빼앗아 나온다.
본문에서 재밌는 표현 하나가 7절에 이어 나오는데,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어떤 씨름, 영적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소위 평화주의는 우리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 오늘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의 자세는 인본주의적 화평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말이 안 된다. 상대적으로 믿음으로 씨름하며 살던 믿음의 사람들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시 84:3-4).
곧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1-2).” 오늘의 우리는 박해와 고난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곧 우리의 참 기쁨의 정체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우리의 넉넉하고 부요하고 평안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13:9).” 가령 운동선수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어려운 훈련과정을 마다하지 않는 법인데,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우리의 기쁨 곧 승리는 환난 가운데서의 것이다.
그런데 단 지파의 경우 결국은 미가와 같은 미숙한 이의 우상들을 가져다 어린 소년 제사장을 앞세워 고작 그들이 치러 올라간 곳은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삿 18:9).” 곧 저들은 평화로운 백성들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쉬운 대안을 찾는 경우가 우리 삶에서도 어디 한두 번이던가? 상대적으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신 1:36).”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순종에는 엄청난 저항이 따른다.
그러니 삶 가운데 주의 뜻을 분별하기란 성경의 권위와 그 통치를 받을 때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부활을 신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이다. 특히 부르심을 받고 주의 길을 가는 소명자라면 그 직분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본문의 레위 소년과 단 지파의 흥정하듯 하는 주의 일에 기가 찰 노릇이다. 그들이 출정에 앞서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18-19).”
이 무슨, 주의 백성들이란 자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 없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인지!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그렇게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가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복은 주의 길을 바로 갈 때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세상의 득실로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어떤 의미에선 믿는 자로서도 가히 달갑지 않은 삶일 수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환난과 기쁨, 고통과 감사가 어찌 하나 되어 복이라 할 수 있겠나? 이를 시인은,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19:1-2).
곧 우리의 복은 세상이 규정하는 그런 결과로가 아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어디 좋은 데 들어가고 하는 것으로 기도 응답을 운운하고 바로 믿는 신앙을 저울질하는 것은 그릇 가게 하는 일이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4).” 오히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곧 그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한데 오늘 본문에서 단 지파는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삿 18:20).” 저들이 자기들 좋은 대로 주를 따랐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는지! 누가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였더니 그 응답으로 어디 대기업 꿈의 직장에 다시 취직을 하였다. 누구는 나름 한다고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는데 자꾸 어려움이 따르고 그 형편이 궁벽하기만 하다. 이때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하나님의 뜻을 와전시킨다.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셨는데,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를 좋아라 하고 우리 의지로 따르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엄연히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여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오직 주님만, 오직 성령으로, 오직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데서 새 힘을 얻어야 한다. 절대 지금의 어떤 상황, 그 결과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심지어 사탄도 잘해준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결국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살 18:31).” 뭔가 서로 엇갈린 곳에 머물 수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곁길로 간다는 게 뭔가 엄청난 배반의 자리 같으나 거기가 거긴 것처럼, 스스로 안주할 때 분별력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스스로 선택하여 그리 행하는 것들에 대하여,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하는 나름의 판단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하는 어떤 성과를 두고 복을 운운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론할 때에 엄히 경고하시길,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3-15).” 하여 나는 무섭다. 행여 누구의 성공을, 어떤 이의 잘 됨을 두고 함부로 축복이라 말하기가 말이다.
무언가 자기 목적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이와 같이 그릇됨이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걸친 옷이 사람을 말한다고,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신들 좋을 대로’의 신앙에 도취되면 끝장이다. 사사시대의 최악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가 머물지 못하는 때였다. 이에 오늘 시편은 절대 주권자, 우리의 참된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이를 의지하고 이것만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이 성도다. 그래서도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악한 저들을 주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곧 우리의 삶은 바른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2).
주어진 상황에서, 그것이 때론 우리를 속인다 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주의 성품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곧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는 먼저 내 집안에서의 일부터다. 욥은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가정을 돌보고 가족들을 건사하는 일, 이는 가족이라는 명목 때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소 단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무탈할 때 바깥의 악한 세력과도 힘을 겨눌 수가 있다.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3-4).
뭐든지 가까이 하면 물든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서로가 가까운 것은 서로가 닮았기 때문이다. 누구와의 자리가 좋은지, 어떤 이와 함께 하는 것이 편한지, 유익한지, 더욱 가까이 하고 싶은지, 그것이 곧 오늘 자신의 상태이다. 손에 들린 것으로 그 사람의 직업을 알 수 있고, 어떤 이와 함께 하는가를 보고 그의 인격도 판가름 난다. 하는 게 다 끼리끼리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는 무엇을 같이 하는가에서 보여진다. 지혜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고 경고하듯 말한다. 이는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5).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어떤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보인다.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잠 10:18).” 그러니 뭐라 이른다고 들리지도 않을 것은,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렘 6:28).” 그러니 저들을 보고 나를 보아 내가 주 앞에 바로 서는 반면교사 삼는 것이 지혜다. 뭐라 이른들 싸우자고 덤벼 공연한 일에 휘말릴 뿐이고,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6-7).
오늘 시인의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특히 정치를 두고 또는 교회를 두고 이런저런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와의 대화는 피한다. 뭐라 한들 서로가 들리지 않을 소리여서, 누가 나더러 말씀을 운운하며 세상을 뭐라 한다고 내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나? 같은 이치겠다. 그러니 살펴 함께 가지 않는 길이 상책이다. 같이 서지 않게 내 목전에 두지 않음이 옳다. 그러니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이는 성도로서의 지혜이고 방어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다. 설득의 대상도 깨우쳐 알게 할 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침마다 나를 말씀 앞에 둔다. 오늘 아침은 알람을 한참 뒤에나 듣고 놀라 화들짝 일어나 앉아 피식, 웃었다. 진동으로 해놓은 것이 어찌나 흔들어대는지….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