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전봉석 2022. 5. 4. 05:23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삿 19: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1-2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인 타락이 한데 어우러져 끔찍한 현실을 만들고 있다. 한 구별된 레위인의 타락, 그의 첩의 타락, 딸의 행음을 방조하는 아비의 타락, 나그네를 농락하는 베냐민 족속 기브아 사람의 타락이 뒤섞여 끔찍한 성적희롱과 살인이 벌어졌다. 모든 게 다 자신들 소견에 좋을 대로 자행하는 일이다. 곧 하나님의 법이 통제를 그치면 그 실상이 이와 같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삿 19:1)”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곧 우리에게 주신 규례는 우리를 속박을 위한 게 아니라 참 자유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 6:24).”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을 누리게 하심인데,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시 119:1).

 

그럴 수 있는 것이 말씀의 통치를 받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먼저 목사로 또는 권직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타락은 교회의 기능과 그 역할을 상실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적 순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리하여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곧 우리의 신앙적인 절제는 승리하는 삶의 필수 덕목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이를 위해 자신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다’는 바울처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자신에게 승리하는 길은 겸손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겸손은 하나님께 복종이다. 오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주신 바 그 한 날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는 세례요한의 놀라운 신앙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이는 결코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곧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겸손한 자로 살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 자신의 권리나 권익을 스스로 요구하거나 이를 위해 맞서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또한 우리의 겸손은 ‘진리를 위해 기뻐하는 것.’ 즉 이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일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곧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이를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짐을 알고, 믿고,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곧 베드로는 고백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였을 때 이를 알게 하신 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신 것을 예수님은 상기시키신다. 바울은 보다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부끄러움과 모든 죄의식을 인정하고 그 어떤 비난이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결코 우리의 의는 내 것이 아니며, 상대적으로 누구보다 낫다고 여기는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왜 이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또 말씀하시는가를 오늘 본문이 모든 악을 들추어 보여줌으로 알게 하신다. 더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생각하며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7-19).” 우리는 오늘도 매순간도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꿈꾸어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개인적으로 렘브란트의 유화 <돌아온 탕자>을 좋아하는데, 그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우리 아버지는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37:4, 145:19).

 

오늘 본문 사사시대의 이야기는 하나님, 우리 왕의 통치가 없을 때 과연 우리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아주 단적이고 끔찍하고 모든 죄악을 한 장에 그려놓은 그림 같다. 죄는 우리로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바로 우리 앞에 주를 모시고도 이를 알지 못하여 표적을 구하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4).” 결국은 요나의 표적으로밖에… 기어이 불순종하다 극한 지경에 이르러서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분하고 그 안에 서러움이 많은지… 그래서도 우리의 겸손은 우리로 더 알고자 하고 배우고자 한다. 자라고자 하고 주를 닮고자 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오늘은 아무 변화도 없고 어떤 성과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어느 순간에 꽃이 피고 의의 열매가 맺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 이를 위한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2-3).”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더는 생각이 아니고 현실이 된다. 툭, 하면 튀어나오는 말대로 산다.

 

그러니 얼마나 자주 또 아무 생각 없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오늘 시편의 표제에는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고 밝혀져 있다. 곧 같은 말도 하나님 앞에 쏟으면 토로하는 기도가 되고, 사람에게 하면 저주가 되고 원망과 비난이 된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얼마나 다 옳은가? 한데 그것이 후에 하나님께 경고를 듣고 욥의 기도로 용서함을 받아야 했던 것은 서로를 비난하는 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오늘 사사기의 이야기는 더 큰 화근이 되어 이내 이스라엘 민족의 내전으로 번진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 주님은 이르셨다. 또한 바울은 이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우리가 왜, 어찌 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럼에도 늘 같은 날의 연속인 까닭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주께 맡기며, 주가 하시는 대로 우리 삶을 놓아둘 수 있는 것이 신앙의 경지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나만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성경을 오늘도 나에게 일러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하고 강권하시는 것 같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102:1-2).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면 연기 같다고 할까?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3).

 

다들 다 사는 게 참 비통하다. 여기에는 성도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 시편은 작가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탄식도 다르지 않다는 데 큰 공감을 준다. 이를 다윗의 기도로 들으면,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7:6).

 

저는 기도하기 전에 확신이 있었다. 주가 들으실 것이고 응답하실 것이란 걸 말이다. 곧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누가 내게 같이 기도해줄 것을 부탁할 때에 나는 저의 심정을 가늠하지 않는다. 저의 호소가 내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같은 심정일 때, 기도함으로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괴로운 날은 기도하라는 신호와 같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5).

 

지혜자도 누누이 강조한 바, 내가 가장 자주 묵상하는 말씀으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이는 성경이 가르쳐주신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좋은 날이면 찬송하고, 슬픈 날이면 기도하라는 것. 이는 앞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예레미야의 애가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1-2).” 느헤미야의 애가,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4-5).” 우리가 누구 앞에 하소연을 하겠나? 어떤 말을 한들 위로가 돌아올까?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이는 어쩌면 성도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필연적인 시간이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에서는 근심이 우리를 시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3-7).

 

이 외로운 탄식을 성경으로 수록하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의 인생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주의 말씀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으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러니 기죽을 거 없다. 근심에 한숨 쉴 일도 아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이는 예수님의 약속이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 때,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8-9).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주가 지키신다. 이는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이다. 그러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붙드시고 말씀하신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곧 오늘 우리가 받는 어려움은 마치 영적인 건강검진과 같은 것이다. 오늘의 문제로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우리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되돌릴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모든 게 다 끝장난 것 같을 때, 그때 나의 부친은 주의 사명자로 이 길을 걸으셨고, 나 또한 기어이 주 앞에 두 손 들고 나아왔다. 그렇게도 부르시는 것이 주의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시 102:12-13).

 

마치 이 고통의 날이 영원한 것 같으나 가당치않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앞이 캄캄한 것 같은데 잠시만 뒤돌아보면 주가 그때마다 나를 어찌 인도하셨는가가 확실하게 선명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오히려 이러한 시기를 통해 주의 은혜를 되새기고 날마다 부어주시는 은혜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된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 106:14-16).

 

은혜는 가치 있고 이 가치를 알 때 값어치에 맞는 처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 5:9).” 당장은 이를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러므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 40:5).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시 102:17).

 

이를 알고 믿고 확신할 때,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5-27).

 

아침마다 이와 같은 시편 앞에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는다. 주는 결코 곤고한 자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22:24). 또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8).” 곧 우리에게 가장 큰 저주나 형벌은 주의 말씀이 가려지는 것이다. 들을 수 없고 보이지 않을 때, 곧 말씀의 통치가 없을 때 우리 삶은 금세 오늘 사사기의 이야기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짐승과 다를 게 없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행여 방심할 때에 ‘중년에 데려가심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공연히 겁주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또한 주의 사랑이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자녀 된 것으로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멸망당하는 것을 보실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흔들릴 거 없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축복된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고로 오늘 시편의 마지막 구절도 이를 증거하시는데,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부모로, 앞서 걷는 믿음의 사람으로의 책무가 따른다. 그러할 때,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