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삿 20:23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시 103:6
그야말로 민족상잔의 비극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앞서 레위인의 타락과 그의 첩을 농락하다 죽인 베냐민 지파와 그 시신을 토막내어 열두 지파에게 보낸 사건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삿 19:16-30). 한데 오늘 본문에서 저들은 이를 응징하기 위해 총회로 기브아에 모였다. 그런데 세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두 번째는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에 대해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다. 셋째는 기브아 거민이 속한 베냐민 지파를 총회에서 배제함으로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저들은 매우 감정적이었고 즉흥적인 결정으로 상황이 몰아갔다. 결과적으로 한 민족, 그 지체의식은 와해되었고, 잘잘못을 떠나 자신들의 죄과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김으로 생긴 결과이다.
이는 훗날 고린도교회에 전하는 바울의 서신에서도 똑같이 재연된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전 5:1).” 문제는 이를 문제로 여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2).” 지체의식 또는 공동체의식 없이는 이 모든 게 헛일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12:26-27).”
또 하나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민의 곧 여론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파악하려 드는데, 결정적인 예로 금신상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경우가 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 결국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못 박은 게 저들 아니겠나?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 27:22).”
분별하지 못하는 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것과 화합을 도모하지 않는 것과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 명분은 여론에 따른 결과다. 문제의 발단과 그 원인을 파악할 분별력을 잃게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자신의 죄를 먼저 부끄러워하지 못할 때 그릇된 감정에 우선한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겔 43:10).” 이는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엡 5:10).” 곧 자신이 행한 일에는 관대하고 남의 일에는 엄격하게 구는 것이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를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겉으로 그럴듯하고 속으로는 섞어 문드러진 영혼으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서 서로를 판단하려 하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고 저를 위한다는 일은 엄연히 불가능하다. 그 기준은 자신이다. 특히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하여 말할 때, 내 안의 찔림은 내가 저에게 하는 말이 고스란히 내게로 향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아니 그런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먼저는 회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 이 놀라운 용서와 화해의 기회가 있는데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 하여 나는 두렵다.
그러니 ‘말을 하는 자’로 사는 게 일인데 나의 행함은 말보다 더디고, 남의 허물을 들추어 판단하는 데는 능숙하기만 하니… 내 안에 나를 요동하게 하는, 죄가 문제였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 서로 하나 됨이 필요한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말씀을 전하는 일과 그 말씀으로 사는 일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을 기리고 귀를 막게 하는 것이 자신의 감정적인 대응과 판단이다. 이에 동조하는 집단이다. 이기적인 생각이 얼마나 자주 또는 쉽게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지…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겔 34:18).” 주신 바,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 때 그 마음에 더하는 것은 미움과 시기와 증오뿐이다. 순간 괴물들이 된다. 나를 붙들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다. 말씀밖에 달리 길이 없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 3:14-15).”
저들의 괴로움으로 저들이 깨닫게 하시고자 하나님은 그리 행하라 하셨다. 결국은 열두 지파 운명 공동체에서 베냐민 한 지파는 몰살을 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 왜 이와 같은 말씀에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냐면,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시 119:98).
말씀으로가 아니면 답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처럼 기를 쓰고 이른 새벽에 말씀 앞으로 앉히는 까닭은 내가 나를 당해낼 수가 없어서이다. 그러고도 돌아서기 무섭게 또한 그릇된 길로 행하기 일쑤이니,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다시 또 다시 주 앞에 앉히고 말씀 앞에 붙들어두는 까닭도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는 것, 곧 누구에게 끌리는 마음은 저가 주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데 확신을 가지고서다. 아니면 저들 가정사에 또는 이래저래 살아가는 이야기는 내 코가 석 자일 뿐인데 누가 누구를 마음 쓴단 말인가. 하나님이 두시는 마음이라, 어찌 세는 잘 얻었는지…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고는 있는지… 이런저런 마음이 먼저 기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인생 다 내 맘 같지 않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
어렵다. 내가 나는 참 어렵다. 그러므로 회개할 것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저들은 이제 이 일을 어찌할까? 회개만이 하늘 문을 여는 열쇠다.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5-16).”
오늘 시편은 그런 점에서도 나로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곧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그럴 자격도 가치도 없는 존재이나 주 앞에 가만히 붙들리는 것,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2).
스스로 자기내면을 향해 외쳐야 한다.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누가 서로의 속을 알아주겠나? 다윗은 자신을 향해 고하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7:17).
나는 내 스스로는 말씀에 일치된 삶을 살 수가 없다.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 멀리 도망쳐 숨어 살고 싶고, 입을 다물고 더는 ‘말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데서 물러나고 싶다. 하지만 이 또한 감정적이고 회피본능일 뿐, 은혜를 망각했을 때 우리 안에 밀려드는 온갖 더러움은 가히 표현도 못할 정도이다. 오늘 사사기서의 원인은 무얼까?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살 2:10).” 알지 못함은 관심 밖의 일로 우선순위에서 멀어진 것이다. 먼저 구하고 생각하고 의지하려 하는 것으로 우리를 스스로를 망각의 늪에 빠뜨린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도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8-20).”
특히 가족 사역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남이면 보이는 면보다 보이지 않는 면이 더 많아 숨을 수라도 있을 텐데, 이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게 가족이라, 저들에게 말씀으로 권면하고 다스리기란 내 삶이 더 훼방이다. 말씀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할 때 겪는 이중 고통이란 게 여간한 일이 아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어찌 살아왔던가?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1-13).” 주의 은혜를 망각하는 일보다 무서운 것도 없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44:17).
우리의 구원은 결코 어쩌다 얻어걸린 게 아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4-5).
곧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나로 의인 삼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 은혜,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나를 대신하여 나의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신 것이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러니 하나님은 나로 만족하신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6-7).
고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내가 더욱 주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에 불가능한 것을 알았고, 내가 나를 바로 붙들기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 수고하고 애써 내가 어찌 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령 나의 학창시절은 늘 다음 학기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새 학년에 올라가면 다신 안 그래야지, 잘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일들은 번번이 학기 초면 벽에 부딪쳤고, 여름방학을 전후해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2학기에 들어서면 빨리 이번 학년은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다음 학기, 다음 학년에는 잘해야지 했던 것은 늘 어김없이 무너졌고, 서정인의 <강>과 같이 나는 매년 내가 어떻게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는지 매년마다 목격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에도 여전하다는 데서 나는 절망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8).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고3에 올라가고 그 해 이른 봄 가출을 했다. 나를 좋아해준 선생도 찾아가고, 매주 가던 특수학교 아이들도 만나러 가고, 첫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소녀’에게도 찾아가고… 결국 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아주 멀리 길고 느린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생소한 어느 해변에 앉아 나는 하염없이 뜨고 지는 하늘만 바라보았었다. 지겹도록 되묻곤 하였던 질문,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질문 앞에 답을 얻고자 며칠은 그 해변을 떠나지를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문득 그와 같은 심정이랄까, 어떤 벽 같은, 아무리 문을 찾아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없는 벽에 서서 그때 그 암담하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나는 늘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11).
나는 이와 같은 시편이 아프다. 나를 마구 찌르신다. 과연 나는 주를 경외하며 사는 게 맞을까? 여전히 나는 그저 새 학년만 되면 뭔가 다른 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대로 기다리던 청소년기의 나로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2-14).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나는 살 수가 없다. 나로 혐오스러워 수치심으로 여전히 해변을 떠나지를 못하고 빈 하늘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 같다. 아,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때도 그랬다. 모두에게 미안하고 저들이 알고 있는, 알게 된 나를 지우고 싶었다. 그 길은 학기가 빨리 바뀌거나 새 학년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럼 좀 나아질 것이란 헛된 희망.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스스로의 혐오스러움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었고 오늘에도 여전한 것 같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아픈 아이’와의 관계에서, 아내 앞에서 나는 숨겨지고 싶다. 아이의 전화가 들어온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전화를 받는다. 무슨 이야기들, 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 얼른 끊으려 한다. 순간 아이는 자기는 혼자인데 더 통화하면 안 되냐고 할 때, 문득 학창시절 나의 어쩔 수 없었던 외로움을 마주한 것 같기도 하고… 누구와의 통화에서 무엇을 지적하고 말하다, 순간 내 앞가림도 못한다는 사실 앞에 좌절한다. 가정예배 후 아내와의 이어진 대화에서 더는 어쩔 수 없는 어떤 벽 앞에 서는 느낌으로… 아직도 나는 그때 그 해변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막연하게 하늘만 바라보면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5-18).
나는 내가 어렵다. 내가 어려운 나는 아들이 어렵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어렵다. 누구는 여전히 얼마 전 회사에서 당한 구타로 목을 다쳐 병가중이라는데, 나는 저에게 기도할게, 힘내! 하고 답을 하다 눈물이 고였다. 다들 참 어렵다. 좋을 때야 좋은 줄 알았던 것들이 실은 모두가 허상이었음을. 인생이란 게 참…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욥 14:2).” 나는 나의 나 됨 앞에 자신이 없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결코 나는 허무주의도 그렇다고 낭만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지독한 현실주의고 상대주의다. 이만하면 됐지, 하고 여기는 것은 누구를 견주어 드는 마음인데 이 또한 바람과 같아서 부질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나는 언제쯤 의연하고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19-21).
내가 주를 바람이 과연 순수하기는 한 것일까? 행여 나의 이와 같은 행실이 강박적이고 신경과적인 문제로는 아닐까? 어쩌면 나는 평생을 같은 숙제를 놓고 풀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저의 문제를 거침없이 말하다 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프고 따끔거렸던 하루였다. 어찌해야 할까?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 30:8).” 여전하다 해도, 이래저래 구제불능인 영혼이라 해도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하여 나는 이 아침에도 말씀 앞에서 신음한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