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 1:16-1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시 105:7
한 생을 두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룻기’는 짜임새 있게 그려주고 있다. 어느 사사시대의 이야기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 에브랏 사람 엘리멜렉은 그의 아내의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의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다. 어찌 흉년을 피하여 살아보겠다고 한 것인데, 엘리멜렉이 죽었다.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만 남았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오르바와 룻, 두 여인을 각각 아내로 맞았다. 그렇게 ‘거기’ 거주한 지 십 년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다.
뒤늦게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갈 생각을 한다. 두 며느리에게 일러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고 이른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갔다. 룻은 나오미 곁에 남았다.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강권함에도 저는 뜻을 정하여 말한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6-17).”
이 모든 상황을 그려보는 게 벅차다. 생이 참 기구하다는 말, 단지 순탄하지 못하고 가탈이 많다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때에 우리의 판단과 비난은 성급해진다. 여하튼 나오미가 이방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저의 된 것을 베들레헴 사람들이 듣고 뭐라 할 말이 없다. 나오미가 스스로 일러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하고 자신의 지난날을 두고 ‘괴로움’으로 정의한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0).” 말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내포되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저의 평가는 비난이 아니다. 이는 전능자의 권한이시다. 저들이 돌아온 때는 베들레헴이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였다.
간밤에 누구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주님이 늘 기도해주는 친구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저의 생이야말로 나오미를 능가하는 ‘험난한 인생’으로 압축된다. 사는 일이 너무 고생스럽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보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모든 생이 다 그렇다지만 누구보다 더한 이가 있고 저의 괴로움으로 전능자의 섭리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저를 생각하게 되고, 저를 생각할 때면 나도 모르게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주는 전능자이시다.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만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이가 예수이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까닭은 우리의 시민권이 저 하늘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0-21).”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구하고 험난한 인생 이야기는 단연 예수의 인생이다. 한데 또한 놀랍고 신비로운, 기이하고 요란하였던 인생도 예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 모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심이다. 이를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늘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하여 저는 우리의 고난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러므로 저를 경탄하고 찬미하는 일은 마땅하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이 놀라운 사실-말씀 앞에 아뢰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와 같은 권세를 자신이 누리지 않으시고 날 위해 아낌없이 나눠주심이니, 우리는 그의 판단을 헤아릴 길이 없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누구의 카톡은 그렇게 들어와 있었고 ‘힘들 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를 보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하는 저의 내용을 나는 이 새벽에 나오미와 룻을 마주하기 전에 확인하였다. 나는 지금 저가 어디 사는지, 어떤 지경인지, 그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간의 일을 들어, 우리로 주께 감사하게 하시려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본다. 우리가 알듯이 우리 주님은 편만하시다. 편만하다는 것은 널리 찬 것으로,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주의 능력은 일련의 역사와 나 같은 자의 인생 가운데서도 함께 하셨음을 앎으로 이를 확신한다. 이제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벧전 3:22).” 전능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의 이 모든 상황을 다 아신다. 결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가 약속하셨다(마 16:18).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저가 속한 사회나 그 주변인들의 여러 모양이 저로 괴롭게 하나 이를 다 아시는 이가 이를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놀라운 경륜을 우리는 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우리가 더는 선과 악의 기준에서 놓여난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고로 우리는 어떠하든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로 생명의 부활로’ 주의 나라에 시민권이 있음을 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고로 우리가 서로의 일로 주께 감사하는 것이 은혜다. 그 권세는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에서 이와 같은 찬송을 함께 부른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시 105:7).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어 ‘출애굽’을 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기이하신 역사를 회고하며 지은 시이다. 이때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로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1).
이것이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나는 누구에게도 직접 말한 바 있지만, 저의 가정사가 어떻고, 그 인생이 어떠하며, 그의 기질이나 성격이 어떠한 것에는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놀라우신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거듭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어찌 살고, 어떤 일이 고달프고 힘든지, 하는 따위의 푸념과 넋두리로는 서로가 할 게 없다. 내가 동감하며 듣는다고 한들, 저가 그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들, 잠시의 위로는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의 최종 관심은 그게 아니다! 시편은 이를 찬송하는 게 아닌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그 일로 주의 세계, 말씀을 배운 게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105:2).
오늘 시편도 같은 소리다. 귀히 쓰기 위한 것은 더욱 ‘고난의 풀무’로 단련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시편 17, 18절에 담아내는 요셉이란 인물이 그러하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7-18).
오늘 우리는 저가 예수의 표상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곧 오늘 우리를 연단하심도 공연한 어려움으로 괴롭히기 위한 게 아니시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가만히 지난날을 떠올리다 어떤 일, 혹은 누구를 떠올릴 때면 그 시절, 내가 주를 멀리하고 마치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도 우리 주님은 한 번도 나를 홀로 두신 적이 없었다. 아, 그때 그 사람이 주가 내 곁에 두신 자였구나! 아, 그 일이 실은 나로 하여금 세상 모든 게 허망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구나! 아, 그때 그 외로움이 또는 못 견딜 것 같은 슬픔이 실은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심이었구나! 하는 것들이 나의 생을 꽉 채우고 있었다.
곧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제라도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심을 감사하며. 누군가 일련의 일을 겪으며 주님께 감사하게 하시는 것처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을 더하신다. 곧 원치 않는 생의 험난한 순간에서도 주의 뜻을 따라 나아가게 하심이었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19).
이는 혼인한 사람이 더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고, “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 우리의 신랑은 예수시고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된 것을 알고,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곧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놀라운 사실은 주님은 이에 따른 고난을 겪으셨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사람으로 사는 동안 고난이 달갑고 좋을 리가 없으나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분명 이 모든 고난은 지나간다. 기한이 있다. 때를 정하신 연단이다. 반드시 작정한 시간이 있다.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단 11:35).” 성경은 이를 보장하고 약속하신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0).
이 자유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고 더는 죄책으로부터,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까지도 우리에게 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놀라우신 말씀 앞에 더는 무엇이 걸림이 되겠나? 기질? 성격? 형편과 사정? 그 따위로 더 이상 주의 자유를 내게서 빼앗을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곧 우리의 가장 귀한 은혜는 주의 말씀을 받은 자로 사는 일이다.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2).
이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왕상 10:24).” 우리 개개인의 사명이 단순히 어느 특정한 이의 탁월한 재능이나 성품의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 이상의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지혜였으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그러므로 오늘의 이런저런 고난과 역경은 보장된 축복을 더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곧 자기 안의 억울함, 어떤 서러움,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 기구함을 제어하는 일이었으니…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사 그의 대적들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
(24-25).
곧 어느 이야기 하나도 허튼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상황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이것이 우리의 외침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그러하였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그때마다,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
(39-40).
이를 나의 삶 가운데서 내가 살아왔던 날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하나님이 나를 그때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결국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기까지,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41-42).
성경은 우리의 회의와 의심을 관통하시는 듯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1).” 이를 성경이 보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 아침도 말씀 앞에서 나를 세우시며 이르시기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이 놀라운 사실 앞에 더는 무엇을 주저하겠나?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