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22. 5. 10. 05:00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룻 4:1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 108:1

 

 

각 기업에 분배된 영토는 임의로 팔거나 살 수 없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하나님이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이 모두를 주관하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가난하여, 또는 나오미와 같이 더는 대를 이을 수 없을 때에는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24).” 이에 보아스는 아무개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정식으로 저의 의사를 묻고 다음 차례인 자신이 대신 이 모두를 전수한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룻 4:1).” 여기서 그 차례의 주인공 아무개를 생각해본다.

 

저는 이 되는 일을 알지 못했다. 당장 자신의 기업에만 정신이 팔려 그 너머 하나님의 섭리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6).” 일련의 상황은 우리 우여곡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은 식솔들을 이끌고 이방나라 모압땅으로 갔다. 거기에서 자신은 물론 두 아들을 잃고 나오미는 이방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의 기업을 무를 자로 보아스가 있었고 저의 마음이 룻을 받아 저들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게 하셨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13, 16-17).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아무개’는 거절하였고 보아스는 받았다. 나오미의 본래 이름의 뜻인 기쁨을 회복하였다. 저가 돌아올 때만도 그 괴로움이 커서 스스로를 마라라 부른 것을 하나님은 본래대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마라의 시간’이 참으로 길고 모질었으나 그 너머의 ‘나오미의 시간’을 하나님은 예비하고 계셨다.

 

오늘 시편으로 그 의미를 연결 지으면, 우리를 대적하는 괴로움들, 대적들을 향한 하나님의 갚아주심을 묵상하게 된다.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로,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08:2).

 

하는 저의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을 배우게 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3).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누구도 도움이 될 수 없고 그 답을 대신 제공할 수는 없을 때도… 이를 직면해야 하고, 이를 마주하고 상대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비밀한 능력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훗날에 저가 다윗 왕의 조상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1-22).”

 

나는 더 이상 ‘아무개’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어서 감사하게 된다. 우리가 주를 의지한다는 것,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1).

 

어떤 어려움을 두고 주 앞에 아뢰고 주를 의지하는 교훈은 시편의 특색이기도 하다. 문득 시편 42편, [고라의 마스길]이 생각난다. 인생이 흔들리고 영적인 침체기에 들었을 때, 하나님과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는 몇 가지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똑같은 실패와 좌절이라 해도, 믿는 사람이어서 겪는 어려움도 있다. 즉 ‘네가 어디, 신앙 안에서 산다더니 그 꼴좋다!’ 하는 식의 조롱이 그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찌르기도 하는 고통이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3, 10).

 

남들의 그러한 질타와 조롱은 믿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살면 하는 일마다 척척 다 잘 되고 강건해야 할 것 같은데, 실은 ‘마라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에 겪는 내적인 괴로움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 11).

 

스스로의 낙심과 좌절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가 없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

 

그와 같을 때 우리가 몸부림치며 찾는 것은 주께서 처음 갖게 하셨던 그 마음의 소망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119:49).

 

나는 누구를 격려하며 저의 시간, 지금의 ‘마라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누구는 게임을 못하게 되면서 금단증상이 오는지 울면서 설거지를 한다고 하였다. 중독이란 게 그처럼 헤어나기 어렵고 무서운 일이다. 처음 주께서 더하셨던 그 뜨거움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그때 스스로에게 자꾸 묻는다. 되새기며 푸념과 넋두리로 빠져드는 것이다. 신세한탄이 이어지는데, 이때 스스로에게 묻기를 멈추고 하나님께 그 질문을 돌려야 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9).

 

저가 누구신가? 나로 하여금 주를 찬송하게 주께 기도하게 하시는 이가 아니신가?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8).

 

절망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이 엄연히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신다. 그때의 그 기도와 찬송은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다. 다윗은 절규하는 목소리로 고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하지만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설교자 로이드 목사의 어느 서적에서 읽은 듯한데, ‘삶에 불행이 오면 자신에게 선포하기보다 자신의 말을 듣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와 사연을 변명처럼 늘어놓는 것이다. 이를 자신에게 선포하라는 것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인정하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누가 ‘나오미’ 곧 그 기쁨이 10여년의 시간 만에 ‘마라’ 곧 괴로움이 될 줄 알았겠나? ‘아무개’는 거기까지 보고 그 너머를 알지 못하여 자신이 기업 무를 자임에도 그 자격을 스스로 던져버렸다. 이를 보아스가 얼른 받아 다윗을 이어 예수님의 계보에 올랐다. 유다는 스스로의 자괴감에 결국 목숨을 끊었으나 베드로는 주의 뜻을 기억함으로 그 이름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웠다. 저마다 죄를 끊는 일은 어지간한 금단증상 그 이상의 이상증상을 겪게 된다. 그때에 누구는 ‘아무개’와 같이 당장의 일에 손해를 볼까 하여 회피한다. 곧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말씀의 약속을 잊어버린다. 자신에게 주의 음성을 들려준다는 것, 그 영혼에 말씀을 선포하는 일. 살면서, 문제가 늘 우리에게 말을 거나 우리는 이를 분석하고 통계를 따라 사람들의 성향을 운운하며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오늘 시인은 이를 알린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08:12).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지만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말의 늪에서 놓여나야 한다. 나는 어제 가만히 저수지로 나갔다. 갑자기 눈이 부시게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찬 기운을 잃고 있었다. 낚싯대를 한 대 던져두고 들락거리는 생각들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말에 귀를 기울이면 한도 끝도 없다. 억울하고 불안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주 앞에 아뢰는 일, 곧 자신에게 주의 뜻을 선포하는 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3).

 

곧 내가 주의 성전에서 주와 함께 하였던 시간들을 기억하는 일,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4).

 

그때의 그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곧 주를 갈망한다는 것,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건져달라고 구하지 않는다. 그 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아뢰지도 않는다. 다만 주를 사랑한다는 것, 하나님을 갈급해 하는 자신의 영혼을 주께 아뢴다. 오늘 시편에서도,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108:2).

 

그리하여 주께 아뢰는 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곧 내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이 모든 상황을 주가 다 아시고 계심을 인정하고, 내 영혼에게 주를 선포하는 일.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3-4).

 

아무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 흔히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나 실은 이 싸움이 하나님의 전쟁인 것을 인정하는 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므로 성경은 이를 큰 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슥 9:12).” 그러할 때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108:6-7).

 

곧,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13).

 

이를 다시금 내 영혼에 선포하며,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71:4). 아멘.